『내가 받은 몫을 소중히 여기고 그 몫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결정적인 수 』
지난 달, 의미 있는 미사 해설을 했다.
모든 미사 해설이 의미가 있지만, 이번 미사는 처음 하는 해설이기도 했고 마음이 좀 출렁거렸다고 해야 하나? 딱히 생각나지 않는데,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마음이었다. 7년 만이라고 했던가? 우리 본당에서 새 사제가 나오셨고 첫 미사를 봉헌하는데, 그 미사 해설을 내가 맡았다. 미사 해설 배정은 한 달 전에 미리 나오는데, 그날 그리고 그 시간에 마침, 내가 배정되어 있었다. 흔한 말로 땡잡았다고 해야 하나? 암튼, 시작할 때는 좀 떨리기도 했다.
많은 신부님이 참석하셨다.
내가 직접 미사 참례한 기억으로, 그렇게 많은 신부님이 함께 미사 집전을 하신 건 처음이었다. 정확하게 인원을 센 건 아니지만, 14~16분 정도 되신 것으로 기억된다. 제대가 꽉 찼으니까. 본당에 계신 신부님들은 물론, 새 신부님이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주셨다는 아버지 신부님이 오셨다. 신학교에서 가르치신 교수 신부님들과 지금까지 우리 본당에 계셨던 신부님들도 오셨다. 신부님들이 입구에서 제대로 올라가시는 모습은, 그 자체가 장엄했다.
새 신부님이 주례하시는 미사였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나름 잘 준비하신 모습이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미사 경본(經本)에 적혀있는 기도문을 읽으시던 신부님의 말씀이 잠시 끊겼다. 어떤 대목에서 그런지 알 순 없지만, 신부님은 감정을 추스르시기 위해, 읽던 경본을 잠시 멈추셨다. 숨을 고르고 물 한 잔을 마신 다음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잠시 있다, 계속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때.
내 마음에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뜨거운 기운은 가슴에서부터 시작해서 목을 타고 볼을 스쳐 눈가에 다다랐다. 그리고 눈에 작은 이슬을 맺게 했다. 신부님의 기도문에 이어진 신자들의 기도문을 외울 때,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만 알 수 있는 내 목소리의 떨림까지 느껴졌다. 왜였을까? 왜 갑자기 나도 새 신부님과 같이 울컥했을까? 내가 청소년 분과장을 했을 때, 그때는 학사님이셨던 새 신부님과 함께 캠프에서 보냈던 시간 때문이었을까? 술자리에서 나눴던 많은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내 기억은 순간,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대학에 들어가고, 주일학교 교사 생활을 참으로도 열심히 했던 시절. 2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하기 전이었다. 당시 담당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신부님께서 나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셨다. “내가 지켜보니 잘 할 것 같아서 그러는데, 군 생활하면서 잘 한번 생각해 봐. 신학교에 들어가는 건 어때?” 생각지도 못한 말씀이라 당황해서, “아이고, 제가 어떻게요?”라고 얼버무렸다. “그냥 생각 한번 해보라고.”
짧은 대화였지만, 그 기억이 아직 또렷하다.
잠시였지만, 깊이 생각하기도 했었다. ‘왜 신부님은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게 생각의 결론이었다.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게 봐주시고 말씀해 주신 신부님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각자의 성소(聖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감당하기에 사제의 성소는, 천부당만부당하다.
돌잔치 할 때 돌잡이를 한다.
부모는 내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모습의 물건을 잡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물건을 친숙하게 하려고 미리 연습도 시킨다. 첫째 돌잔치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물건을 잡든 간에, 잡은 물건대로만 되기만 해도 좋겠다고 말이다. 돌잡이에 올라오는 물건에 해당하는 직업이나 역할은, 다 좋은 몫이기 때문이다. 절대, 바라지 않는 몫을 올려놓진 않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거의 가 좋은 몫을 선택했다. 어떻게 받아들였느냐는 다르겠지만.
인생은, 돌잡이처럼 무엇을 잡을지 명확하진 않다.
흘러가는 대로 순종하면서 가기도 하고, 마음의 부대낌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렇게 어떤 몫을 택하게 된다. 어떤 몫을 택하든 그 몫이 자신에게 맞는지 아닌지는, 끝까지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몫이 나의 몫이라 받아들이고 묵묵히 나아갈 수는 있다. 어떤 부름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부르심에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지금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좋은 몫을 받지 못해 지금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받은 몫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몫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뤘으며, 그 몫을 다하기 위해 어떤 최선을 다했는지 돌이켜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다른 곳만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그게 바로, 바둑에서 말하는 패착(敗着)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하는 일을 좋아하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놓을 수 있는, 최선의 승착(勝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