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무리(無理)

by 청리성 김작가
『욕심을 간절함으로 착각하고 과감하게 밀어붙이게 되는 망상』


‘무리(無理)’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단어다. “그건, 무리지!” 얼마 전에 끝난 동계올림픽 경기 중 가장 핫했던 종목은 ‘스피드스케이팅’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나라가 강한 종목이기도 하지만, ‘자유 이용권’이라는 용어가 등장해서이기도 하다. 놀이동산이 아닌 올림픽에서 ‘자유 이용권’이라니….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표현이다.

스피드스케이팅을 보면서 가슴 졸이게 되는 장면이 있다.

코너를 도는 장면이다. 우리나라 선수 포함해서 여러 선수가 한대 엉켜 코너를 도는 모습을 보면, 두 손이 자연스레 모여 턱 밑을 받친다. 코너를 돌다가 부딪혀서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선수들도 더러 있었다. 경기가 다 끝나면 비디오 판독을 통해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려 실격 처리를 시킨다.

실격을 받은 선수를 향해 해설자가 던지는 말은 이렇다.

“아! 무리하게 들어갔네요!”, “무리하게 코스 변경을 했네요!”, “무리하게 손을 썼어요!” 등이다. 여기서 공통된 단어는 ‘무리’다. 실격을 당한 이유가, 일반적인 규정에 벗어난 플레이를 감행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코너 하니까, 떠오르는 게 있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다. 백수 가족의 가장인 ‘기택’이 운전기사 테스트를 받을 때다. 박 사장이 뒤에서 커피가 가득 담긴 컵을 들고 있는데, 코너링할 때 별다른 출렁임이 없었다. 이를 보고 박 사장은 ‘기택’을 칭찬한다. 코너링의 진수를 보여줬다고나 할까? 촉박한 약속 시각을 맞추기 위해 운전해 본 사람은 잘 안다. 급커브 길이지만 속도를 줄이지 못한다. 그러면 내 몸과 차량은 꺾이는 반대쪽으로 쏠린다.

한 번은 너무 속도를 줄이지 않아, 난간 근처까지 간 적도 있었다.

부딪히지 않으려고 핸들을 급하게 더 꺾다가, 차량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이럴 때도 우리는 이렇게 표현한다. “코너에서 속도를 무리하게 냈네!” 일반적인 운전 가이드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코너에서는 속도를 최대한 줄이고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운전해야 하는데 말이다.

시간에 쫓기면 다 소용없다.

돌이켜 보면 다 별거 아닌 건데, 그때는 왜 그리 초조했는지. 그래서 웬만하면 사정을 얘기하면서 좀 늦는다고 알려주고, 규정(?)에 맞게 운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생명에 비하면, 모든 건 사소하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않기로 했다는 말이다.


지금 무리하게 밀어붙이려는 것이 있나?

사실, 나는 있다. 그러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나 혼자 어떻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대한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금은 어찌어찌 넘어갈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 기로에서 중심을 잡고 판단해야 하는 게,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무리’라는 단어가, 무디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매우 날카롭게 느끼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함에도, 무디게 바라보고 넘기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앞서 말한 올림픽 경기도 그렇다. 선수들은 최소 4년이라는 시간을 올림픽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선수들이, 왜 그런 무리수를 두는 걸까? 좋게 말하면 간절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욕심이라 생각된다. 메달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간절함, 혹은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갖고 말겠다는 욕심이다.

내가 지금 사용하려는 ‘무리’는 어디에 해당할까?

간절함일까? 욕심일까? 내가 나를 바라볼 때는 당연, 간절함이라 말할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도 그럴듯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이 바라볼 때도 그럴까? 거의 가, 욕심이라 말할 가능성이 크다. 욕심을 품은 사람의 눈과 판단은 흐려지게 마련이니.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표현이 그 상태를 대변해 준다. 아무리 객관적이라 말하고 생각해도, 사람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성(理性)은 감정이 저지른 일을 설명하고 수습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20년여 전, 한 강연에서 들은 말이다. 매우 오래됐지만, 아직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강렬했고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상식으로 알고 있던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정의를 한순간에 무너트렸지만,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만 모르고 있던 나의 비밀을, 누군가에게 들은 것처럼 말이다. 욕심은 간절함과는 다르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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