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에 집중하지 말고, 사람에 집중하라!”
이 말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려운 말은 아닌데, 막상 코칭에 들어가면, 잘 안되는 부분 중 하나다. 그 이유는, 내 앞에 있는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사명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코칭에 본질과는 맞지 않는 생각이다. 코칭에서 고객과 코치는 이렇게 정의한다. “고객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가지고 있는 온전한 사람이다. 따라서 고객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코치는 대화를 통해 고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코치는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고객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문제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앞서도 말했듯이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일 수 있다. 친구나 동료의 고민을 듣고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떠올려도 그렇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어떻게든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 자기중심으로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고민하는 사람의 상황이나 상태보다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경험이 적절하게 도움이 되면 좋지만, 오히려 더 큰 고민을 안겨주기도 하고, 심지어 다툼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코치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이와 같다.
대화의 중심에 고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코치 자신을 중심으로 두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래야 코치가 자신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움을 주겠다는 선한 마음이지만, 누굴 위한 코칭인지 잠시 잊는 거다. 따라서 문제를 중심에 둔다는 건, 코치가 코칭에 중심이 되려고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문제에 집중하는 사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은 보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벌어진 간격을 시간이 지나면서 좁히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 채 마무리될 수도 있다.
코칭의 중심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코칭을 받는 사람이다. 사람에 집중하라는 의미가 그렇다. 고객을 코칭의 중심에 놓으라는 말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가지고 있는 고객을 중심에 두고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둔다. 그리고 듣는다. 관심을 통해 들은 내용 중 궁금한 부분을 묻는다. 그리고 다시 듣고 그 말에 공감하면서 다시 묻는다. 이렇게 반복하면 고객은 점점 본인이 처한 문제의 본질에 다다른다. 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하나씩 깨닫게 되는 거다.
“마음이 말하도록 하는 것이, 사람에 집중한 결과다.”
사람에 집중하라는 말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자기 안에 있는 그 무언가를 가감 없이 꺼내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 사람에 집중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이슈에 집중하면 그 사람이 행한 말이나 행동에 마음이 묶인다. 그럼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한 이유를 묻지 않게 되는 거다. 이유를 묻는 것과 묻지 않은 건 매우 큰 차이다. 한 사람의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도 있다. 과장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누군가 너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쳐 먹었다고 하자.
“왜 빵을 훔쳐먹었니?”라고 물어보면 어떨까? 잘못했다고 따지기 전에 이유를 먼저 물어보면 어떻겠냐는 말이다. 자신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유와 사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줄줄이 말하지 않을까? 그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정말 딱한 사정이라면, 조금은 이해하고 싶지 않을까? 아! 그렇다고, 배고프면 빵을 훔쳐먹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어떤 한 이유에서도, 이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다면, 한 번쯤은 함께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잘못했다고 무조건 법대로 처벌하라고 밀어 넣으면, 악순환이 반복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필자의 경험도 하나 공유할까 한다.
유아 체육 강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유치원은 여자 선생님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체육 선생님을 보면 아이들이 환장(?)했다. 체육이라 활동적이라는 특성도 있겠지만, 남자 선생님이라는 특성도 한몫했다. 특히 남자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했다. 아이들은 체육 선생님께 주목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했다. 정말로 그랬다. “두두~ 두두두~”하며 총소리를 내면서 손으로 총 쏘는 흉내를 내면, 드라마틱(?)하게 넘어지면서 죽는시늉을 했다. 그만큼 잘 따랐다. 하지만 어디나 예외는 있는 법.
반대로 행동하는 아이가 있었다.
옆에 아이를 이유 없이 때렸다. 심하면 손톱으로 할퀴기까지 했다. 담당 선생님도 그 아이 때문에 힘들어했다. 처음에는 그 아이를 따로 떼어내서 한쪽에 서 있게 했다. 그 아이 때문에, 짧은 수업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있으니 말이다. 가끔 그 아이를 쳐다보면 눈이 빠질 정도로 치켜뜨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마음은 쓰였지만, 다른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수업을 마쳤다. 매주 그런 행동을 봤다.
하루는 방법을 달리했다.
그 아이에게 시범을 보이게 했다. 수업할 때 동작을 설명하고, 한 아이를 불러내서 시범을 보이게 하는 게 코스였다. 아이들에게 시범을 보이는 것이란, 체육 선생님께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시범 보일까?”라는 한마디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군대 점호 장면, 저리 가라 할 정도가 된다. 두 팔은 쭉 펴서 무릎 위에 올렸고, 눈은 똘똘하게 45도 각도로 바라봤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한 명을 선정하면, 그 아이는 로또에 당첨된 사람처럼 기쁨에 넘쳐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만큼 시범을 보인다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 역할을, 반대로 행동하는 아이에게 시켰다.
모든 아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선생님, 이건 아니잖아요?”라고 묻는 듯했다. 지목당한 아이도 얼떨떨한지 평소와 다르게 주섬주섬하며 나왔다. 시범을 보이게 하고,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다음부터 어떻게 됐을까? 담당 선생님도 놀랄 만큼 모범학생이 되었다. 정말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된 거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이는 친구를 괴롭히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었다.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거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이가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이가 등원하는 걸 봤다. 할머니 손에 끌려오듯 들어왔다. 그때 느낌이 왔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아! 사랑받고 싶은 거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그래서 그렇게 했더니, 생각이 맞아 들었던 거다. 그래서 이후에는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는 아이를 볼 때, ‘쟤 왜 저러지?’가 아니라,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다는 건가?’라며 살피게 됐다. 돌이켜보니, 이 또한 공감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람은 누구나 긍정적인 의도가 있다고 한다.
겉으로 봤을 땐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렇게 한 자기만의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한 범죄자가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내가 잘못했을 때, 아무도 왜 그랬는지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계속 범죄를 저지르게 됐다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안타깝다. 누구라도 물어봐 줬으면 혹은 누구라도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더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해야 하는 이유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자비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자비의 마음이 없으면, 들으려조차 하지 않는다. 듣지 않으면 진실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자기가 생각한 대로 단정 짓는다. 공감의 문이 열리지 않는 거다. 더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남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타인의 말을 잘 듣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하고 싶은 말을 듣도록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이고 공감을 위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