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함에 침묵하지 않을 용기를 청하며

무조건 침묵으로 일관한다고 평화로운 건 아니다.

by 청리성 김작가

침묵은 매우 유용한 도구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의견이 없는 건 아니다. 그 의견을 자신의 입을 통해 내뱉는 것보다, 안으로 삼키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하는 거다. 무엇이든 100% 옳고 그른 것이 없듯, 침묵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침묵하는 게 옳은 건 아니다. 때로는 침묵보다 의견을 명확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부당함과 마주 섰을 때다.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을 용기를 청하며”라는 문장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부당함이라 느껴지는 상황 앞에서 마음속으로 되뇐다. 그렇게 용기를 내서 침묵을 깬 적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되뇐 적도 있다. 상대가 너무 크게 느껴져, 두려운 마음에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럴싸한 변명을 조금 더 보태자면, 주변 사람들까지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강자 앞에서만 그랬던 건 아니다. 어쩌면 약자 앞에서 침묵했던 횟수가 더 많을 수도 있다.



약자이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했다.

무슨 소린가 싶을 거다. 약자인데 왜? 약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너무 약해서 혹 내 한마디에 상처를 받거나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약자라고 해서 항상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인 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정해진 약속에 무책임한 사람도 있다. 합의해서 정한 일정에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긴다. 이 정도면 침묵으로 인내하는 것에도 한계를 느끼게 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 아이들도 그렇지 않은가? 애가 뭘 아냐며, 무조건 오냐오냐해주면 자기가 잘하고 있는 줄 착각한다. 자기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른들이 손주 사랑에 했던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라 소개한다. 아이를 위한 것인 줄 알았지만, 아이의 무의식 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 잡게 했는지 안다면, 소름이 돋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달려가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진다.

요즘은 문지방을 없앤 집이 많아 그럴 일이 거의 없겠지만, 예전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면 우리 어른들이 어떻게 하는가? “그러게, 조심 좀 하지!”라며 손주에게 조심하라고 충고했을까? 아니다. 울고 있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문지방을 손으로 치며 이렇게 말했다. “에이 나쁜 문지방. 너 때문에 우리 애기가 넘어졌잖아!” 그리고 아이를 달랜다. 문지방을 혼냈으니 울음을 그치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이가 울고 있으니. 하지만 그게 아니다. 사실 누구 잘못했는가? 원래 그렇게 있던 문지방이 잘못했는가? 주위를 살피지 않고 달려가다 넘어진 아이가 잘못했는가?



아이가 잘못했다.

누가 뭐래도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들이 문지방을 혼내고 자신을 달래는 모습을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자기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에 익숙해진다. 아이를 달래려고 했던 별 의미 없는 말과 행동이었는데, 아이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 탓을 잘 하는 이유가, 이런 조기교육(?)에서 비롯됐다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기도 한다.



잘못된 부분은 명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시는 보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냥 넘길 수도 있지만, 정말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이야기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피해자라는 착각 속에서 남 탓만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누군가 얘기해 주지 않으면 그것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다음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렇게 책임을 떠안길 수 있다. 만약 상대방이 더 약한 사람이라면, 너무 큰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착각의 브레이크를 스스로 밟지 못한다면, 누군가 밟아줄 필요가 있다. 더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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