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해야 한다.

by 청리성 김작가

역할을 맡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세상에는 두 가지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다.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해야 할 일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일치되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겠지만, 모든 일이 그렇진 않다.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분명 있다. 어찌 모든 일을 다 만족하면서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맡겨진 역할이 있으니,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그것이 책임이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부끄러운 일 하나가 떠오른다.

10년도 넘은 일인데 아직도 부끄러운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그때 내 마음과 행동이 너무 비겁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별 상관없는, 그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는, 누군가가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일이 발생하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상대방에게 이 부분에 대해 말하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는 했다. 그래도 부끄러운 마음이 완전히 씻기진 않았다. 그 마음에 빚을 갚기 위해 다른 상황에서, 그때 하지 못한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학회 행사 때, 벌어진 일이다.

처음 진행하는 학회여서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다. 이에 더해, 참석인원이 2천 명 정도 되는 매우 큰 규모의 행사였다. 호텔 연회장 전체를 빌렸고 많은 진행요원이 투입되었다. 그 행사 준비를 위해 몇 달을 고생했고, 행사 임박하고 며칠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행사 이틀 전부터는 거의 꼬박 새웠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잠이 많은 내가 말이다. 행사 전날 세팅은, 행사 당일 새벽 5시까지 진행되었다. 2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나와서 행사를 치러야만 했다. 몸과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인 것만은 분명했다. 아! 합리화를 위해 밑밥을 까는 건 아니다. 그 시기를 생각하니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으로, 잠시 추억(?)에 젖었다.


내 역할은, 행사 총괄이었다.

메인 행사장인 2층과 3층을 계속 오르락내리락했고, 30층 이상에서 진행되는 소규모 미팅도 수시로 확인했다. 등록 데스크와 각 연회장 긴 줄이 늘어서긴 했지만, 이는 물리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래 기다린 사람 빼고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오전 시간을 보내고 오후가 되었다. 행사장 전체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대규모 행사에는 알바를 많이 투입한다.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실제 겪어보지 않았으니, 업무가 서툰 건 사실이다. 많은 사람까지 몰려드니 더 정신없었을 텐데,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업무가 익숙해져 보였다. 표정도 그랬다. 오전에 보였던 긴장된 모습은 가고, 약간의 여유가 느껴졌다.



이제 한숨 돌리나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럴 시간과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에게 인증서 같은 것을 출력해 줘야 했다. 사전에 출력한 사람은 나눠주면 되지만, 현장에서 출력을 요구하는 사람은 바로 출력해 줘야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수십 명이 아니었다. 수백 명이었다. 프린트돼서 나오는 시간도 필요했고, 많은 양을 출력하니 프린터에 과부하가 걸리기도 했다. 출력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고, 줄도 그와 발맞춰서, 점점 더 늘어갔다. 심지어 다른 이용자들이 이동해야 하는 통로까지 막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시 오전과 같은 혼잡함이 연출되었다.



앞서 말했듯, 내 몸과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다시 아수라장이 된 모습을 보는데, 더는 어찌할 기운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 역시 알바들이 많았는데, 업무 지원을 나온 다른 부서 직원이 매우 애를 먹었다. 심지어 펑펑 울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어찌어찌해서 수습은 됐지만 내 마음은 수습이 되질 않았다. 너무 미안했고 너무 잘못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 마음을 바로 전달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시간이 좀 지나고 이야기했다.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잘못과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전했다.



내가 역할을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뼈저리게 깨닫게 된 사건(?)이다. 많은 생각을 했다. 반성도 했고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특히, 리더의 역할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내가 그 행사에 리더였는데,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는 크게 무리 없이 역할을 소화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그로 인해 누군가가, 그 힘든 무게의 짐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리더가 자기 역할을 온전히 떠안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 짐을 떠안아야 한다. 짐을 떠안은 누군가는, 어느 순간 그 리더의 곁을 떠날 수 있다. 해야 할 역할을 무겁게 여겨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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