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할 수 없는 일과 어찌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하는 식견, 지혜
마음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받아들이지 못함에서 온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받아들여야 할 것이 생긴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나 물건을 엄한데 놓을 때가 있다. 냉장고에 핸드폰이나 리모컨을 넣었다는 이야기는 종종 듣는다. 어떤 분은 싱크대 선반에 반찬을 넣었다고 하기도 한다. 냉장고로 착각했다는 말이다. 아이들 운동회에서 달리기는 하는 엄마들이 앞으로 넘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렇게 앞으로 넘어지는 이유가, 마음은 이미 저 앞에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젊었을 때 잘 달리던 기억은 있지만, 이미 몸은 그 기억을 따라가기에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오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이 있는데, 이는 그냥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원래 안 그랬는데!”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들이 하는 말이다. 원래는 기억도 잘하고 물건을 잃어버리는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았는데, 내가 지금 그러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오히려, 기억도 잘 하지 못하고 물건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보면, 칠칠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그러고 있으니 어떻겠는가? 마음이 매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잘 뛰어다니던 사람이 다쳐서 제대로 걷지 못할 때도 그렇다. 정말 별거 아니었던 행동인데, 가까스로 하는 자신이 매우 초라하게 느껴지게 된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그렇다. 이 또한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함에서 온다.
받아들이지 못함은 어디에서 올까?
의지로 할 수 있던 것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 온다. 자기 의지로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절이 있다. 나이로 치면 젊을 때가 그렇고, 몸으로 치면 건강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거나 몸을 다치게 되면, 의지와는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데 쉽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힘들어진다. 능동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은, 그 충격이 더 크게 온다. 더 인정하고 싶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자신이 자부하고 있던 부분을 놓기란, 사실 쉽지 않다.
믿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믿기진 않지만 받아들여야 할 것도 있다.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 그렇고, 사람의 이성(理性)을 뛰어넘는 현실이 그렇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첫 번째는 뭘까? 부모님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건 내 의지가 아니다. 나의 부모님을 만난 것이 내 선택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태어난 것을 단지 우연으로 밀어 넣어야 할까?
받아들여야 할 건,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없거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건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수동적인 삶이라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수동적인 삶은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지, 모든 것이 그런 건 아니다. 너무 주도적인 삶을 살아왔거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선택할 수 없고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까지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러니 마음이 힘들고 몸까지 힘들어진다. 주도적인 삶과 받아들이는 삶을 잘 구별할 때, 우리 삶의 질도 더 좋아진다. 여기서 떠오르는 기도문 하나가 있어 소개한다. 지혜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주님! 어찌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는 겸허함을 주시고,
어찌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함께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