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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Mar 07. 2024

실수를 약으로 활용하는 방법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 자신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하는, 실수

“훈수꾼이 여덟 수 더 본다”

어떤 의미의 속담일까? 굳이 의미를 찾지 않아도, 경험했던 기억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내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하면 이렇다.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한테 장기를 배웠다. 재미있다면서 말을 놓고 어떻게 이동하는지 알려줬다. 친구는 잘 모르는 나를 위해, 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종이에 그려줬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바로 게임에 들어갔다. 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종이에 적힌 걸 봐도 잘 모를 때 게임을 했다. 빈칸으로 옮기기에 급급했던 나는 옮기는 족족 친구 말에 잡혔다. 너무 좋아했던 그 친구의 표정이 아직 기억된다. “이제 갓 배운 친구를 이기니 좋니?”라고 묻고 싶었지만, 모르는 게 죄라 생각하며 마음을 삭였다.      


집에 돌아가 장기를 습득하기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아버지와 장기를 두면서 하나씩 수를 배워갔던 거다. 뭐가 뭔지 감이 서서히 잡힐 무렵, 그 친구한테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친구는 흔쾌히 도전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자기가 이길 거라는 표정을 짓고 말이다. 하지만 그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호기롭던 표정과 에너지 넘치던 모습은, 그래프가 우하향으로 내려가듯 그렇게 꺾여나갔다. 난감한 표정과 한숨도 간혹 나왔다. 자못 진지해졌다.     

 

결과는 어땠을까?

내가 이겼다. 중요한 건 한 판만 이긴 게 아니었다. 이후 계속 이겼다. 이후로 졌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 이유를 나름 분석해 봤다. 그 친구는, 자기보다 못 두는 친구들하고만 뒀다. 이기는 기쁨을 누리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하고 뒀고 잘 두는 형이나 친구하고 뒀다. 매번 졌지만 깨달음을 얻었다. 그 때문이라 생각된다. 친구는 점점 정체 아니 더 퇴화했고, 나는 성장했다는 말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할 때는 작은 성공 경험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하지만 제대로 부딪히는 용기도 함께 필요하다. 그래야 성장하기 때문이다.      


장기를 두는 풍경을 떠올려보자.

어떤 모습이 보이는가? 장기 말고 바둑을 두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서로 마주 앉는 두 사람보다, 주변에 서서 지켜보는 사람이 먼저 떠오른다. 탑골공원을 지나칠 때나 가끔 TV 화면에 비추는 모습을 봐도 그렇다. 대회가 아니고서는, 거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도 있지만, 꼭 거드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전문용어(?)로 훈수꾼이라고 한다. 그 훈수꾼으로 판세가 뒤집히면, 뒤집힌 사람은 크게 항의한다. 판을 다 뒤집으며 무효 선언을 하기도 한다. 그냥 게임이면 상관없지만, 내기라면 다툼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래서 훈수는, 상황 봐서 둬야 한다.     


훈수가 고마울 때가 있지만, 기분 나쁠 때도 있다.

잘못된 훈수 때문이 아니다. 하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두는 훈수가 그렇다. 운전도 그렇지 않은가? 옆에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면 짜증이 난다. 운전도 잘못하는 사람이 그러면, 화가 치밀어오른다. 하수인 사람이 훈수를 두면 이렇게 반응하게 된다. “알거든!” 그리고 그렇게 둔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실제 그렇게 생각했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절대 당신 말에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는 거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하수의 훈수가 기분 나쁘다는 게 아니다. 바로 이 질문이다.    

 

“왜? 하수가 수를 더 잘 볼까?”

처음 언급한 속담을 다시 소환해보자. “훈수꾼이 여덟 수 더 본다.” 여덟 수면 엄청난 거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될까? 훈수를 그렇게 잘 두던 사람도 막상 판에 앉으면 왜 잘 돌아가던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걸까? 핵심은 머리가 아니다. 판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판 앞에 앉으면 지극히 주관적으로 된다. 자기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훈수는 어떤가? 지극히 객관적으로 된다. 왜?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자기 일은 해결하지 못하면서, 남 일은 기막히게 솔루션을 제시하는 사람 말이다. 박사가 따로 없다. 자신이 그럴 때도 있다. 누군가의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자기도 놀랄 정도로 잘 설명할 때 말이다.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제대로 알게 된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메타 인지’가 바로 그런 거다. ‘메타 인지’로 바라본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제삼자의 처지에서 바라본다. 예를 들어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또 다른 내가 천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거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을 ‘메타 인지’ 과정이라고 말한다. 코칭할 때 이런 방법을 가끔 사용하는데, 자기 자신을 좀 더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바라보게 된다. 훈수를 두거나 조언하는 사람이 좀 더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렇다.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연습이 중요하다.     


실수하는 모습에도 적용할 수 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가? 겸손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매우 교만해 보인다. 자기 능력을 착각하기도 한다. 자기 역량 때문이 아님에도 자기 역량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실수하면 어떤가? 오히려 부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이런 사람일수록 더 깊은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자존감이 급격히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실수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자기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마음 자세를 낮추는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이것이 바로, 독을 약으로 쓰는 해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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