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ture(서곡)
눈을 다시 떳을 땐, 이국적인 환경을 보니 한국은 아니었다. 아이리스가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분수쇼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이리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아이리스는 코를 훌쩍이며, 옷소매를 눈물을 닦더니 내게 말한다.
"누나, 이제 좀 괜찮아?"
"어? 어.. 사실 기억이 없어. 꿈과 현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누나, 사실 나 누나랑 같이 있었어."
"?, 무슨 말이야?"
"아니야. 지금은 이해가 안될거야. 하지마 누나, 한 가지만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순간 긴장했다.
"진실을 마주하고, 그 상황에서도 새를 찾아야 해.
그리고 그 새를 듣고 기다리다보면 연결될거야."
호수가 보였다.
엄마랑 나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어린 나에게, 엄마는 내가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존재였다. 엄마는 항상 울고 있었다. 그렇지만 소리를 내진 않았다. 그냥 항상 눈물만 뚝뚝 흘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은 온갖 상처 투성이었다. 어릴 때의 나는 꼭 커서 엄마를 지켜줘야겠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연약하기만 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나란 존재는 갑자기 사라져도 모를 힘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엄마의 눈물이 나의 심장을 지나 호수에 다다랐는지 잔잔한 파동이 일렁인다.
그때였다. 호수 위로 노란 새가 사뿐히 앉았다.
다음날 드디어 대회가 펼쳐졌다.
어깨 너머 배운다고, 한두번 했던 경험이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렇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왜냐하면 이번엔 같이 추는 게 아닌 혼자 추는 대회였기 때문이다. 무대를 앞두고 내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아이리스가 내 떨리는 손을 잡아 지그시 눌렀다.
"누나, 또 눈 감으려고? 도망치는 자의 발에는 지도가 없어. 춤은 오직 '지금'이라는 벼랑 끝에서만 출 수 있는 거야. 떨리고 무섭다면 날개를 펴봐."
또 다시 내 눈 앞에는 이상한 광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화장실에서 미진이 무리에게 맞고 있는 나의 모습, 거실에서 맞고 있는 엄마를 위해 달려들어 감싸 안아주다가 나까지 같이 아빠에게 맞고 있는 나의 모습.
내가 그렇게 잊고자했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또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잊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었다.
칼로 애매하게 그으면 아프기만 할 뿐이라는 말 때문에, 목을 매보려고 하고 뛰어내려 보려고도 했다.
그 때의 나의 마음은 그 어느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에 미련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오히려 편안했다. 정말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지? 기억이 없다. 그냥 시간이 흘러 평소처럼 도시락 한 끼를 가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뿐이다. 근데 난 왜 옷이 다 젖은 채 화장실에서, 그리고 엄마와 같이 이 거실에서, 이 썩어 문드러질 악마들에게 맞았던 것일까. 이 때의 나는 왜 맞기만 했던 것일까. 왜 이 때의 나는 참기만 했던 것일까. 왜 맞고 있으면서 괜찮다는 식으로 웃어 넘기며 미진이 무리에게 사과를 해야 했고, 왜 눈물을 흘리며 싹싹 아버지에게 빌어야 했을까.
그냥 그게 나였다. 참 보잘 것 없는 존재였기에 그렇게 행동해야 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도망쳐야 했다. 나에게 용기 따위는 사치였다.
하지만 그 찰나, 나는 보았다. 내 곁을 맴돌던 작고 노란 빛, 아이리스가 말했던 그 '새'를. 그렇게 심하게 맞고 있는 학교 화장실에서도 집 거실에서도, 작고 노란 빛이 나는 새가 내 곁에 있었음을 이제서야 볼 수 있었다. 왜 그 때는 이 새가 보이지 않았을까.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아니, 도망칠 곳이 없어서 차라리 폭풍 속으로 뛰어들기로 했다. 발뒤꿈치가 지면을 차는 순간, 그것은 스텝이 아니라 억눌렸던 존재의 파열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그 새를 따르기로 했다. 마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 왔다. 눈물이 멈췄다. 춤은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해 가슴 속에 고여 썩어가던 슬픔들이, 비로소 손끝과 발끝을 통해 황홀한 비명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음 속 뜨거운 것을 꺼냈을 때 나는 무대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서 있었다. 그들은 내게 박수를 쳐주고 있었고, 심사위원들은 내게 금메달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난 기쁘지 않았다. 나는 이 순간에도 생각에 빠졌다. 지금이 아이리스가 말했던 그 순간인 것일까? 이제 나를 진짜의 현실로 돌려보내주는 그 순간인 것일까?
발 뒤꿈치부터 닿아 발가락, 호흡, 팔 라인까지 조심스레 나는 걷기 시작했다. 분명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서 있던 무대는 어느새 호수로 변했고 그 물 위를 걷고 있었다. 관객들의 환소뢰도, 심사위원의 시선도 안개처럼 멀어졌다. 오직 음악의 심장 박동과 나의 호흡만이 우주에 유일하게 남은 소리였다.
학교 화장실과 집 거실의 잔상을 지나쳤다. 잊고 싶었던 생의 파편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화장실 바닥의 차가운 타일 촉감, 거실에서 들리던 비릿한 공포의 냄새, 그리고 무력하게 짓눌려 있던 나의 어린 날들.
걷다가도 이 잔상들이 뒤따라오는 것 같아 멀미와 공포로 멈출까 싶었다. 그러나 발바닥이 호수의 수면을 스칠 때마다 올라오는 것은, 내 안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 고통마저도 아름다운 춤사위로 바꿔버리는 영혼의 용기였다.
세상이 하얗게 번져가며 모든 소리가 하나로 섞여 들었다. 심장 소리는 드럼이 되었고, 눈물은 선율이 되었다. 나는 비로소 완전해졌다. 나는 춤추고 있었다. 아니, 나는 이미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나도 몰랐던 내가 원하던 나만의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16층, 문을 닫습니다."
(위이이잉)
"띵, 문이 열립니다."
나는 덤덤히 집에 돌아왔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꿈이 아님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지금 손안에 있는 노란 깃털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인지도 모른다...
– Andrew Hong, 『Yellow Bird』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