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하나 - 승객
2006 겨울 동해
월요일 새벽 5시.
첫 출근을 하기 위해 원주 행 새벽 열차를 기다리고 서 있다.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까만 어둠이 아직 겨울잠에 빠진 검붉은 역사를 휘감고 있다. 싸늘한 추위보다 회색빛 외로움에 질려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새벽안개에 흠뻑 젖은 탓에 플랫폼 앞 전등 빛이 화선지 위에 먹물 번지듯 뿌옇게 아른거린다. 을씨년스러움을 넘어 왠지 모를 황량함과 까닭 모를 쓸쓸함이 몰려들었다. 이때 정동진에서 출발한 기차가 시커먼 몸체를 드러낸다. 기차 안은 썰렁했다. 빈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차창 밖의 어둠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래전부터 내가 누리고자 정의 내린 ‘행복한 삶’은 ‘힘과 부를 가진 강자의 삶’이었다. 가진 자 힘센 자들에게 굽실거리고 사탕발림이나 해야 하는 무수한 다수 중 하나로서 살기에 생이란 너무 짧고 안타까운 것이란 성급함이 있었고, 한 번 세상에 던져져 나왔으니 뛰어난 자들의 들러리에 불과한 변두리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강자가 되기 위한 최우선 필요조건은 돈이었다. ‘돈으로 행복을 사지 못한다!'는 소리 따위엔 코웃음 쳤다. 가난뱅이 보다 부자가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연스레 그걸 취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일찌감치 '목표'를 정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 때문이다. 이북에서 홀로 남하해 평생을 어부로 사신 아버지는 선주와 선장의 등쌀에 평생을 시달렸다. 내가 여섯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이란 것 빼곤 동해에 아무런 기반도 없이 홀로 뿌리를 내려가면서 불평등과 텃세를 묵묵히 견디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고, 나를 위해서였다. 어릴 적부터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돈 많고 힘 있는 강자가 되어 우리가 당해온 분풀이를 꼭 되갚아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혈혈단신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위 오빠인 외삼촌에게 많이 의지했다.
외삼촌과 숙모에겐 내 또래의 사촌 형제가 있었다. 그들에게 나랑 잘 놀라고 하면서 꼬박꼬박 용돈을 주고, 물 좋은 생선이나 값 비싼 전복 따위를 제일 먼저 외삼촌댁에 가져다주시는 걸 난 알고 있었다. 그 사촌 형제는 아버지를 무슨 머슴 취급하곤 해서 그들을 불러다가 패주기가 일쑤였다. 사촌 형의 중고 똑따기 카메라를 빼앗다시피 가져온 것도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그 카메라는 곧 나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분신이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항상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난 아버지만으로 충분했다. 아버지는 내겐 어머니였고, 형이자 커다란 산같이 듬직한 친구였다. 우리 두 남자는 묵묵히 서로에게 의지했다. 아버지의 이북 고향인 신포와 흡사하다는 동해는 바다를 품고 있는 항구이자, 마흔을 훌쩍 넘긴 아버지가 아홉 살 아래의 어머니와 혼례를 올리고 정착한 곳이다. 내 이름을 '바다'라고 지은 것도 그곳이 당신의 삶터이자 영원한 쉼터이기 때문이다.
내가 커 가면서 주위에서 재혼을 권하면 “일 업습네다" 하고 두말없이 끊곤 하시던 아버진 가끔씩 어머니를 마음껏 그리워했다. 매년 9월 어머니의 제삿날이나 만선이 되어 돌아오는 날 밤이면 경월 소주에 고등어 회를 쳐서 당신의 연가인 '해변의 여인'을 구성지게 부르시곤 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황혼 빛에 물든 여인의 눈동자~
조용히 들려오는 조개들의 옛이야기 말없이 바라보는 해변의 여인아
해변의 여인은 어머니였다. 아버지와 상대를 하다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술을 배웠다.
"바다야, 이 간나 세이끼 날레 날레 들이키라우."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지면 언제나 날 '간나 세이끼'라고 불렀다. 투박한 성격의 아버지가 보이는 최대의 애정표현이었다. 그런 날엔 '어머니의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밤바다의 철썩거리는 파도소리 위로 부자의 시끄러운, 그러나 서글픈 노래 가락이 실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래 오마니 없이 외롭게 컸으니 좋은 에미나이 만나서 따뜻하게 살라우."
아버지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갖가지 수모를 마다하지 않고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 메워야 했던 것이 힘들었음이 틀림없다. 물론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지만.
어릴 때 커다란 산이었던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친근한 뒷동산의 부드러운 언덕으로 바뀌었다. 그리곤 훌쩍 내 곁을 떠나갔다. 아버지가 탄 고깃배가 '당신의 영원한 쉼터'에서 돌아오지 못하던 날, 생전 처음 난 혼자가 되었다.
월간 여성지 'T'는 첫 직장이었다. 수습 사진 기자로 시작했다. 연예인, 작가, 모델, 운동선수들의 사진을 찍었다. 패션 사진부터 가방과 시계 등 온갖 명품 및 오디오 기기, 책 등 생활 잡화, 계란찜으로 만드는 8가지 왕실 요리와 아파트 화장실의 보수 전과 후 사진까지 닥치는 대로 찍었다. 데스크에서 요구하는 대로 선명하고 예쁘게 찍는 흔히 말하는 '사진사'가 되었다. 4년 넘게 사진 기자로 경력을 쌓아가며 돈과 명예를 갈구했지만 쉽지 않았다. 쉽지도 않았거니와 10년 뒤의 모습이 손바닥 눈금 새겨보듯 빤히 그려졌다.
부업을 뛰기 시작했다. 유명 인사들의 소개를 받아 틈틈이 프리랜서로 뛰다 보니 그 바닥에서 제법 얼굴이 알려졌다. 결혼식, 환갑잔치, 백일, 돌, 가족사진, 기업 홍보사진, 급기야는 신참내기 연예인들의 프로필 사진 의뢰까지 들어왔다. 부업이 본업의 수입을 순식간에 앞질렀다.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삑삑 댔고, 고객들이 원하는 '물건'들을 물불 가리지 않고 마구 찍어 냈다. 이 길로 계속 뛰면 승부가 날 듯싶었다.
형이라고 따르던 연예인 매니저가 동업을 제의했다. 소속 기획사 건물로 들어와 스튜디오를 싸게 사용하는 대신 공동 명의로 이름만 올려달라는 제안이었다. 희망사항으로 꿈꾸던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두 번 생각 없이 월급쟁이 기자직을 내던져 버리고 '강바다 포토 스튜디오'란 간판을 목동 건물 한쪽에 걸었다.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던 질만큼 30대 초반의 나는 젊었고 무모했다.
저만치 먼저 앞으로 내달았지만 세상은 내 손을 붙잡고 함께 뒤쫓아와 주지 않았다. 아니, 그 반대였다.
사진작가를 자처하고 나섰지만 부업을 뛰던 잡지사 사진 기자가 자그만 스튜디오를 오픈했다고 해서 사진작가로 자동 승격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도취에 빠져 꾸던 나의 꿈과 내가 서 있는 현 위치에 생겨난 여백을 메우기 위해 쉼 없이 현실과 타협했다.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타협이 스튜디오를 지탱하기 위한 것으로 변해갔다. 저렴한 임대료는 시세보다 쌌을 뿐이었다. 한때 5명까지 두었던 직원을 단 한 명으로 줄였다. 결국 운영 경비와 직원 월급을 5개가 넘는 카드로 돌려 막기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버렸을 즈음 도망칠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1년 반 만에 완전히 백기를 들었다. 명의 변경이니 밀린 임대료와 운영 경비, 신용 불량자 등 지저분한 일들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저 멀리 앞을 보니 가야 할 목적지가 홀연 사라져 버렸다. 아니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풀썩 주저앉은 채 가끔씩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꿈이 사라져 버린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날아갈 자유를 빼앗겨 버린 새장 속의 새가 되었다. 잃어버린 목적지, 쥘 듯했으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꿈이 허망하기만 했다.
동해역의 새벽 기차는 헛간의 늙은 암소처럼 널브러져 진 채 꼼짝하지 않는다. 빙벽처럼 언 차창을 손으로 겨우 문질러 밖을 내다보았다. 저 너머의 까만 어둠 속으로 숨고 싶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스타더스트 메모리즈' (1980)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기차 안에 앉아 있다. 그의 뒤에 앉은 중년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두운 옷을 입은 승객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다.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의 주인공이 옆 기차를 바라본다. 맞은편 객차에선 파티가 한창이다. 흰 옷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승리의 트로피와 샴페인 술잔을 흔들며 왁자지껄 마냥 즐거워하고 있다. 파티를 즐기던 한 아리따운 여자가 주인공에게 차장 너머로 키스를 보낸다. 주인공이 차장을 부른다. 자신의 차표를 보여주더니 옆 기차를 가리키며 마구 따지기 시작한다. 이때 두 대의 기차가 동시에 출발한다. 주인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객차에서 내리려고 한다. 문을 열려고 안간힘 쓰는 그를 다른 승객들이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흰 옷 입은 승객들이 흥겹게 파티를 즐기고 있는 행복의 기차로 옮겨 타야 했다. 기차에 타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자유로이 꿈을 꾸며 다시 훨훨 날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기차의 종착역은 한 곳이다.
어디로 가면 말라비틀어져 사그라진 자유혼을 되살릴 수 있을까 번민하다 인도로 떠났다. 더 늦으면 정형화된 카메라 시선을 바꿀 수 있는 창작 의욕마저 새까맣게 태워 버릴 것 같았다. 입사 후 첫 해외 출장지였던 뭄바이를 시작으로 11개월 동안 인도의 오지를 돌았다. 내게 남아 있던 모두를 4천 장이 넘는 사진과 맞바꾸었다. 그 1년간의 삶을 분신처럼 기억시켜 주는 267점을 추려 엮어 ‘인도의 꿈: 자유를 찾아서’란 사진 에세이를 어렵게 출간했다. 여기서 '어렵게'는 터무니없이 간단한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이 책으로 유명해지면 찍고 싶은 사진을 마음껏 찍으며 사회적 지위와 명성, 돈까지 모두 얻을 수 있는 프로 작가의 길로 들어서리라 기대했다. 실험정신과, 자유, 정열, 혼이 깃든 작품을 만드는 프로, 공항 출국 카드의 직업란에 누구나 인정하는 '사진작가'라고 당당히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발바닥의 숨구멍들이 닳아 문드러지도록 뛰었다.
초판 2천 부 중 3백 부도 채 팔리지 않았다. 영혼 뒤에 잠들어 있던 열정의 터럭 하나까지 남김없이 쏟아부었던 마지막 승부처에서마저 산산이 박살 나 버리자 그다음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일만 기다리고 있었다.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객차로 옮겨 타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영화의 주인공처럼 내가 갇혀 있는 불행이란 이름의 객차 문을 끝내 열고 나가지 못한 것이다. 객차의 내 자리에서 탈진한 채 정신을 반쯤 놓아 버렸다. 다시 꿈을 꾸기엔 심신이 너무 지쳐버렸다.
그때 알았다. 꿈이 없는 사람, 목적지를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