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을 현실로 만날 때

기차 여행 - 하나

by 강바다
Thorndon, Wellington <사진=강바다>

오래된 목조주택들이 즐비한 뉴질랜드 웰링턴 시내 주택가인 쏜돈 (Thorndon)에는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내가 들르는 작고 조용한 카페 모조 (Mojo)가 있다.

주말의 한가함이 서서히 드리기 시작하는 오후 2시, 모조에 앉아 롱 블랙의 짙은 커피 향에 한껏 취해서 카페의 창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가로수가 덩그러니 줄지어 늘어선 한가로운 거리를 드문드문 지나가는 자동차들, 카페 밖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과 마주하며 누가 누구를 구경하는지 모르게 빤히 쳐다보다가 서로 싱긋 웃고 마는 권태 아닌 사치스러운 여유가 물씬 배어드는 시간이다. 그리 쓸쓸하지도 그리 무겁지도 않은 존재의 넉넉함을 한가로이 즐기는 이 토요일 의식을 통해서 난 지난 한 주동안 일상의 헐거워진 틈새로 빠져나가 버린 행복의 편린들을 더듬거리며 주어 담는다. 대개 그 편린들은 이런저런 단상으로 노트에 남거나 결코 지워지는 짙은 추억거리로 영혼의 안쪽 깊숙한 어딘가로 숨어 버린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모든 일엔 때와 이유가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언제인지 왜 그런지 그때와 그 이유를 모를 뿐이다. (17/2/09E.B.)

Days Cafe, East Borne <사진=강바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아니라면 어디서 본 글귀를 낙서처럼 옮겨다 놓았을 것이다. 2009년 2월 17일이면 꽤나 시간이 흘렀다. E.B. 라면 웰링턴 동쪽 동네의 이스트본일 텐데... 아마도 데이즈 베이 카페에서였을 것이다.

화창한 한여름의 넘칠듯한 웰링턴 만의 바다를 바라다보며 그 생기발랄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지막’에 대해서 끄적거려 놓았음이 틀림없다.


마지막을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우중충한 겨울밤이나 빗줄기가 줄줄 흐르는 처연한 늦은 가을 오후가 아닌, 생명이 역동하는 여름 한낮에 마지막이 실감 나게 떠오르는 것은 새로이 자리 잡은 빼놓을 수 없는 습관 탓일 것이다.

언제인지 그때를 모른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이는 어리석다. 차라리 까맣게 망각해버리는 것, 그래서 마치 그때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태연자약한 이들도 형편없이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부류는 -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이 이 부류에 속하긴 하지만, 막상 그때가 닥치면 허겁지겁 그동안의 준비 없음에 망연자실하거나 가슴 끝까지 꺼지는 허무와 허탈감속에서 맥없이 스러져가고 만다. 후회투성이의 자괴감으로 가슴을 치며 코앞에 다가온 그때를 직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때가 미처 왔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순간 속으로 사라지는 편이 어쩌면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

Wellington Harbour <사진=강바다>


‘그때’ – 생의 저편에서 이루어지는 빛으로의 복귀, 영혼만으로의 완전한 자유, 또는 새로운 윤회의 시작,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끝 우리가 흔히 ‘죽음’이라고 부르는 이 추상적인 단어 또는 개념은 가까운 친구, 사랑하는 가족의 '새로운 시작'을 목격함으로써 일순 손에 잡히는 생생한 현실의 한 줄기가 되고, 우리가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생의 커다란 뿌리임을 인정하게 된다.

존재의 사라짐으로 인한 휑한 공허감으로부터 얻어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통해서 불현듯 일상의 허무를 인식하게 되면 망각의 늪속에 깊이 묻어둔, 그래서 까맣게 잊었던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매일을 살아가는 일상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죽음 뒤의 나는 과연 어떻게 되는가


고소한 커피내음을 코끝으로 음미하면서 벼랑 끝까지 몰렸던 지난 몇 년을 되짚는다.

보란 듯 위의 질문들을 불쑥 내게로 던져 놓고는 돌아서 그 의미를 되짚으며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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