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묻은 나의 흰색 운동화

기차 여행 - 열셋

by 강바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정화시킬 수 있었던 초기 오클랜드에서의 이민생활은 1년이 넘어가면서 지금까지 맞닥뜨리지 못했던 커다란 현실의 벽과 마주쳐야 됐다.

profile brunch.jpg 이민 후 처음 정착했던 뉴질랜드 최대 도시 오클랜드 <사진 = 강바다>

그것은 생활의 기본 욕구, 가장으로서 가족의 의식주를 충족시켜야 하는 의무감인 동시에 이국 땅에서 나의 새로운 커리어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는 절박감이었다. 정착 초기엔 교민 회사에서 잠시 일했다가 관뒀다. 개미 코딱지만큼 작은 데다 말만 많은 교민 커뮤니티 안에서 복작거리고 싶지 않았다. 외국에서 살려고 이민 왔는데 한인 사회란 울타리 안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뉴질랜드의 LA' 오클랜드를 떠나 무작정 차를 몰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해밀턴, 캠브리지, 로토루아, 타우포, 네이피어를 두루 살폈다. 아는 사람 없는 이국땅에서 마음에 드는 곳, 나와 우리 가족이 살 곳을 내 손으로 직접 고르고 싶었다. 그래서 정착한 곳이 수도 웰링턴!

태어난 서울, 처음 고향이란 느낌을 준 유진, 그렇게 웰링턴은 나와 아내의 세 번째 고향이 되었다.

웰링턴, 이곳에서 생활의 질과 물질적 성공 -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 뛰었다 <사진=강바다>

과거엔 공항 출입국 카드 직업란에 '기자'라고 간단명료하게 적었지만, 불과 3~4년 새 여행사 대표, 수입 대행사 컨설턴트 등 애매모호하고 설명이 필요한 긴 제목의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했다. 한국에서 보다 서너 단계 낮아진 사회적 지위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형편없이 작아진 월수입으론 계속 지탱해 나갈 수 없었다.

삶의 전환점을 맞아 커다란 모험을 감행한다는 심정으로 내 사업을 시작했다. 스포츠 웨어, 즉 옷 장사였다. 경험도 전무하고 자본금도 충분치 않았다. 웰링턴 현지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야망과 정열 그리고 꿈이 있었다. 내 꿈의 깊이가 나란 사람의 미래 가치를 만든다고 믿었다. 두려움도 컸지만 성취하려는 의지가 더 컸다.

독일에 있는 한 친구는 내 옷장사를 ‘걸레 장사’라고 불렀다. 흔해 빠진 얘기지만, 믿었던 또 다른 친구에게 보기 좋게 사기를 당했다. 지나고 보니 '친구란 어려울 때 함께 울며 응원해 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기쁠 때 즐거울 때 옆에서 함께 웃어 주는 사람들은 길바닥에 돌멩이만큼 흔하다. 내가 울 때 그들은 온데간데 보이질 않았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덤볐지만 의욕만 가지고 해결되는 것 아니라는 걸 처절하리만큼 깨우쳐 준 값진 경험이었다. 잘 아는 선배의 소개로 구로공단을 드나들면서 뉴질랜드에서 디자인한 옷을 주문 생산했다. 바이어의 입장이지만 옷 공정의 수순도 제대로 모르고 공장 사람들의 체질도 전혀 알지 못한 채 덤벼든 무모한 도전이었다. 업계에서 일상화되어 쓰는 일본 용어들 조차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니 금세 초보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조롱거리가 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물건을 뉴질랜드에 가져다가 당시 막 시작이 됐던 온라인 쇼핑 망을 구축하는 한편, 오프라인으로 기존 소매망 체인에 납품할 수 있는 활로를 뚫어 나갔다. 그 외 시간이 날 때마다 각 회사를 찾아다니면서 시제품을 전시하고 물건도 팔았다.

가장 중요한 소매망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형 소매점들부터 찾아다녔다. 먼저 전화 약속을 했지만, 대부분 이 핑계 저 핑계로 피하자 무작정 샘플을 들고 쳐들어갔다. 절반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거절했고, 여기까지 왔으니 어디 한 번 해보라는 곳들이 1/3, 그 나머지는 주인이 부재중이었다.

몇 마디 하기도 전에 면전에서 “관심 없으니 나가라”라는 문전박대를 몇 차례 받고 나니 팽팽했던 처음의 긴장감과 부끄러움도 사라지고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운이 좋아 설명의 기회가 주어진 곳에선 그대로 매장 바닥에 물건을 풀고 제품 홍보에 들어갔다. 처음엔 버벅거리던 영어도 30군데쯤 다니니까 술술 흘러나왔고 50군데를 다녀보니 주인의 눈치도 대강 감 잡을 수 있었다. 백 군데쯤 다니면 시제품을 한 번 들여보겠다는 곳이 대 여섯 군데밖에 되지 않았다.

소비자를 겨냥한 직판도 시도했다. 대형 은행, 회계 법인, IT회사 등 종업원의 규모가 비교적 큰 회사에 접촉하여 어렵게 회의실 한쪽을 예약해 물건을 진열한 뒤, 그들의 모닝 티와 점심시간에 맞춰 파는 것이었다. 웰링턴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뉴질랜드 대형은행으로 직판을 나간 날이었다.

마네킹까지 동원해 커다란 박스 안에 최소 5장씩 디자인별 색상별로 물건을 담아 날랐다. 아침시간에 마네킹과 29인치 브라운관 TV 크기의 박스 5~6개를 실어 나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출근하는 직원들이 꽉 찬 엘리베이터를 십여 차례 그냥 올려 보내고 난 뒤 겨우 남은 공간에 짐을 실었다. 15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누런 색깔의 TV 박스를 들고 있을라치면 땀이 비 오듯 흘려내렸다. 말끔한 정장 차림인 엘리베이터 내 다른 탑승객들에 비하면 청바지 점퍼 차림으로 야구모자를 쓴 내 모습이 약간 처량하기도 했다.

그때 30대쯤 보이는 아시안 남자가 쥐색 양복에 핑크색 실크 넥타이를 매고 서류가방을 든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모기라도 미끄러질 듯 매끈한 그의 구두 옆에 때와 먼지로 회색이 되어버린 내 운동화가 나란히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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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가 내리면서 “짐꾼용 엘리베이터는 복도 끝에 따로 있다”라고 던지듯 말하고 사라졌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7~8명의 말끔한 차림의 뉴질랜드 신사 숙녀들도 무언의 동조를 내 등 뒤로 꽂아내고 있었다. 18층까지는 거의 매층에 서다시피 했고, 그때마다 박스를 만지작거리며 공간을 틔워주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사내 식당이 있는 23층이 돼서야 나 혼자가 되었다.
‘자식들… 나도 서울에 있을 땐 저렇게 말끔하게 차려입고 회사에 출근하고 그랬었는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건 힘들게 올려놓은 물건들을 거의 팔지 못하고 되싸서 내려올 때의 패배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사가 잘 되는 좋은 날도 있었고, 극도의 허탈감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은 형편없는 날도 있었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반복되다가 언제 올랐는가 싶기가 아득해지고 한없이 내려가는 날이 태반이 되면서 끝이 보이고 있었다. 그 끝을 애써 외면하면서 나 자신을 뒤덮는 ‘이제는 어떡하면 좋은가’라는 불안감과 패배감을 수시로 떨쳐내면서 나 자신을 끝없이 채찍질했다. 앞으로 질주하려 했지만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박스 속의 물건들을 보면서도 헐값에 넘기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데…’

일산에서 구로공단으로 그리고 창동까지 하루에 서너 번씩 선 잠을 잔 채로 왕복해가며 사이즈는 제대로 나왔는지, 색상은, 안감은 수십 차례 확인하고 수정하면서 만들어낸 나의 분신들이었다. 안 먹히는 폭탄주를 삼켜가면서 접대하고 비위 맞추면서 그리고 싸우고 찢기면서 만든 내 꿈이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넘겨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재고는 재고대로 산더미처럼 쌓인 빚도 해결되지 않는 난제였다. 몸 안에 남은 한 방울의 땀과 에너지를 송두리째 바친 꿈이 거꾸러지고 나니, 왜 그 많은 중소기업 사장들이 망해서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마는지 그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가위에 눌린 듯한 압박감, 앞 뒤 위아래 양 옆을 아무리 둘러봐도 암흑에 갇힌듯한 숨 막힘, 밝은 빛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희망 없는 삶은 물을 잔뜩 먹은 솜 덩어리만큼이나 무겁고 지긋지긋했다. 장사 경험도 없이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들면서 몸이 망가져 갔고, 피지 못하는 꿈을 피우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건강도 사그라져갔다.

꿈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 버렸을 때, 내 몸의 기운도 썰물처럼 다 빠져나가버린 뒤였다. 정신적인 의지가 없으니 육체를 지탱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완전한 사업 실패와 함께 몸도 망가져 버린 것이다.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허옇게 뒤집어진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널브러져 누워버렸다.


그때는 알았다. 꿈이 없는 사람은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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