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시각화하다

정거장 열 하나 - 로드맵

by 강바다

고한 역을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기차가 갑자기 정거했다. 뒤숭숭하던 기차 안은 ‘기관 고장으로 잠시 정차하겠다’는 안내방송이 흐르자 곧 잠잠해졌다. 월요일 새벽 동트기 시작한 젖은 들판에 시선을 놓고 있다가 머리를 식힐 겸 객차 밖으로 나갔다. 주말 내내 리스트에 대한 생각이 언뜻 스치듯 지나갔지만 애써 떨쳐내었다. 공상에 사로잡혀 아내와 함께 하는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잔뜩 찌푸린 회색 빛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리스트를 쓴다면 과연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비로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철로 변을 거닐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부슬거리던 빗살이 굵은 방울이 되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객차로 돌아와 앉자마자, 정리되지 않은 채 겉돌고 있는 ‘꿈의 리스트’를 단번에 써보기로 했다.


"강 선생. 리스트를 쓸 때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표회장의 말이 생각났다.
"첫 번째, 마음껏 꿈을 꾸십시오. 꿈에는 아무런 제한도 형식도 없습니다. 현재 내 상황을 고려하면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인데, 이런 식으로 스스로 제약을 만들지 말고 마음껏 자유롭게 꿈꾸세요. 둘째는 그 꿈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하십시오. 예를 들면,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 대신 은행 계좌에 현금은 얼마, 집은 어느 동네 몇 평짜리에 방은 몇 개, 구조는 어떻고 정원은 어떤 모양, 심지어는 벽지 색깔까지 머릿속에 실제 이미지를 연상하며 자세하게 적어야 합니다."

그의 조언을 상기한 후, 노트를 꺼내 우선 제목부터 써넣었다.

'리스트: 성공한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30가지'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리스트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생각나는 대로 순서 없이 아무것이나 마구 써댔다. 서술형으로 자세히 묘사하다 보니 철자니 이음 구 따위가 거추장스러웠고, 구구절절 잔 설명들이 따라붙으며 복잡해졌다. 쓰다가 막히면 쓴 것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읽을 때마다 고칠 것이 보이고 그걸 고치다 보니 형식이 내용을 우선하여 주객이 전도된다. 낙서의 수준에 불과한 애매모호한 것들은 '이것이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인가?'란 질문을 던져보고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지워버렸다. 그런 다음 서로 연관되는 것을 합치고 리스트답게 한눈에 들어오도록 간단명료하게 압축했다.

동해 역을 떠난 기차가 도계를 지나 어느새 태백 역에 이르렀다. 금방 그 30개의 리스트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원하는 것을 다섯 개도 써넣지 못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 축에 속하다니.'

어이없기도 하고 인정하기도 싫었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고작 4개를 끝마쳤다. 묵묵히 그 리스트를 몇 번씩 다시 읽어보았다. 더 이상 눈이 번쩍 뜨이는 새로운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비록 4개뿐이지만 리스트를 정리 요약하니 다음과 같다.

1. 내 소유의 포토 스튜디오 오픈

● 건물 명: 강바다 포토 스튜디오

● 위치: 서울 목동

● 규모 및 크기: 지상 3층, 건물 100평

● 외관: 벽돌 색

● 구조: 1층 리셉션 및 직원들의 사무 공간, 2층 촬영 스튜디오, 3층 집

2. 정기 사진 여행 다녀오기

● 여행지: 테마 별, 국가 별 사진 여행

● 회수: 1년에 2회

● 기간: 4주~6주


3. 정기 사진전 및 사진집 출간

● 강바다 사진전: 연 2회 (4월과 11월)

● 갤러리: 강바다 포토 스튜디오

● 강바다 사진집: 이야기와 사진이 담긴 여행 에세이집

● 회수: 2년마다 최소 1권씩 출간


4. 한국 사진대학 전임 교수되기

● 대학: 한국 사진대학

● 직위: 정교수


쓰고 고치다 보니 원하는 것이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머릿속에만 들어 있던 강바다 포토 스튜디오란 막연한 허상이 하얀 캔버스 위에서 거친 밑그림으로 그려지더니 하나둘씩 세부 묘사가 되었다. 각종 색깔이 칠해지고 덧칠되면서 뚜렷한 형상으로 실체화되었다. 스튜디오를 몇 층으로 할까 하다가 맨 위 3층은 진영과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1층과 2층은 사진 스튜디오로 짜보았다. 장소는 실패를 딛고 재기한다는 의미에서 목동으로 선택했다. 건물 크기는 건평 100평, 1층은 주로 스튜디오 직원들을 위한 작업 및 휴식 공간, 2층은 촬영 스튜디오다. 촬영 스튜디오를 꾸미려니, 필요한 사진 장비들과 조명, 촬영 보조 품 등 별도의 목록이 필요하다.
층수가 정해지니 각 층마다 공간을 모던하게 쓸 수 있는 디자인이 떠오른다. 전체적인 통일감을 주는 일관된 톤으로 가고 싶다. 우선 강바다 포토 스튜디오란 브랜드를 특성화하는 게 우선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브랜드 구축을 위해선 스튜디오가 추구하는 목표 및 방향, 이를 성취하기 위한 실질적인 전략이 먼저 세워져야 한다. 해당 브랜드를 특성화하는 소규모 전문 조직의 구비는 그다음 수순이다. 스케치로 대강의 윤곽을 잡은 다음,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색감을 입히고 지우는 반복 과정을 거치면서 강바다 포토 스튜디오는 단순히 건물이란 공간을 뛰어넘어 하나의 특정 브랜드로 탄생되었다.

그저 내 포토 스튜디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공상'이 바야흐로 성공한 사진작가를 대표하는 하나의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 즉 '꿈'으로 시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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