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나라로 들어가는 두 번째 열쇠

정거장 열 - 탑승객

by 강바다

5월의 봄비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원주역에서 탑승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게 그가 반갑게 소리쳤다.

“강 선생, 여깁니다."

청량리에서 탑승했다는 그가 옆 좌석에 놔두었던 가방과 겉옷을 치우며 내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1열 4석이어서 앞 좌석을 뒤로 돌려 마주 보면서 가면 좋으련만, 금요일 오후 열차는 만석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북적였다.

"4호 객차의 이 자리에 주로 앉습니다, 항상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온 탓인지 이젠 뒷자리, 그것도 맨 뒷자리가 편하군요. 차창 밖 풍경도 느긋하게 즐길 수 있고."

창 밖 풍경보다 시급한 과제로 지난주 내내 고민한 내가 조바심 섞인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줄곧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강 선생의 아버님 말입니까?"

그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호기심을 보이며 말했다.

"네. 아버지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하실까 생각해봤습니다. 의림지에서 우리가 얘기를 나눴던 바로 그 화제죠."

"뭐라고 대답하실 것 같은가요?"

"거침없이 '난 어부이자 아버지'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평생 어부로 사셨고 그 일을 어떤 누구보다 잘하시고 좋아하셨어요. 바다를 쉼터라고 부르셨죠. 매일 새벽 그 쉼터로 나가시기 전에 달걀을 삶아서 제 도시락을 만드셨습니다. 언젠가 생활기록부를 적어야 했는데,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직업 란에 어부라고 쓰기가 뭐해서 선장이라고 썼죠. 그걸 물끄러미 보시더니 선장 옆에 작대기를 이렇게 하나 그으시더니 '선장/아버지'라고 적어 넣으며 마구 웃으시더군요. 그것이 아버지가 매일 고기를 잡기 위해 쉼터로 나가는 이유라고 하시면서."

내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지금껏 들은 어떤 대답보다 강렬한 자기 정의입니다. 강 선생도 답을 얻었습니까?”

굵은 소나기가 창문을 거세게 때리고 있다. 차창에 맺히는 빗방울에 시선을 두면서 지난주 골머리를 앓으면서 준비한 대답을 정리해보았다. 막상 자신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말하려니 쑥스러웠다. '나에 대해 당당하게 말하려면 아직 멀었군!'이란 차가운 상념이 가슴 한쪽을 꿰뚫고 지나갔다.

“누군가가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성공한 사진작가를 꿈꾸는 서진영의 남편입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한동안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미래의 희망과 현재의 자신에 대한 정의로군요.”

“맞습니다. 현재 제 생활에서 아내를 위한 일상을 뺀다면 남을 것이 별로 없다는 데 맨 먼저 생각이 미쳤습니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어리석게 느껴지는 답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천만에요."

그가 정색했다.

"강 선생의 마음 깊은 곳엔 아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아내를 빼곤 제가 존재하는 것 조차가 무의미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가 진지하면서 따뜻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 어깨를 친근하게 툭툭 다독거렸다.

"강 선생, 우리 모두가 찾아 나서는 행복이란 결국 사랑을 찾는 여행입니다. 두 개의 사랑을 쫓고 있는 당신이 하나의 사랑을 발견했으니, 이제부터는 잃어버린 나머지 다른 하나의 사랑을 되찾을 때입니다."

"그 다른 하나가 사진이란 말씀입니까?"

말을 멈춘 그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에 대한 강 선생의 정열입니다."
마치 감전된 것처럼 강한 전류가 찌릿거리며 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 정열이 강 선생의 꿈을 이루게 할 겁니다. 곧 ‘저는 사진작가이며 서진영의 남편인 강바다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울컥 콧등이 시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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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서의 밤을 늘 적막하다.
홍 교수 집 이층 방에 홀로 앉아 지난 생활을 냉정하게 되돌아보았다. '나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선 가슴속에 맴도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했고 그 밑바닥을 헤쳐야 했다.

아름답지 못했다. 아니,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가지고 싶었으나 가지지 못한 것, 이루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 되려고 했으나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의 진창에 푹 빠져 있었다. 그 불만과 분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의 한쪽 팔을 꽉 쥐고 놓지 않는 따뜻한 손이 있다. 아내 진영의 손이다. 버틸 수 있도록 나를 잡아주고 있는 아내 때문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진 않았다. 그녀의 손을 꽉 부여잡고 그곳에서 서둘러 벗어나야 했다. 아니면 아내마저 진창으로 끌어내리고 말 것이다.

한 손으론 아내를 잡고 다른 한 손을 내뻗어 단단한 뭔가를 움켜잡고 올라서야 한다. 그것이 사진에 대한 정열, 성공한 사진작가가 되고자 하는 나의 목표, 미래를 위해 현재를 견디게 만드는 희망이라는 힘이라고 그가 지금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강 선생이 원하는 성공한 사진작가란 과연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세요."

가히 당당한 요구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뭐……그러니까 그게…… 자신의 스튜디오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그런 프로가 아니겠습니까?"

"강 선생이 꿈꾸는 사진작가의 모습을 굳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필요는 없겠죠. 다만."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다만 뭡니까. 회장님."

급한 나머지 그에 대한 호칭이 붙어 나왔다. 무슨 회장인지도 모르면서.

"강 선생 스스로 자신의 꿈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꿈의 세밀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모두 묘사할 수 있는 청사진을 여기 그리고 이곳에 담고 있어야죠."

호칭 따위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차례로 가리키며 표민수 회장이 말했다. 내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그런 청사진이 있느냐?’고 물으면 ‘있다’고 대답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은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이내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가득 담았다.

"청사진을 얻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청사진을 만드세요. 성공한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서 강 선생이 원하는 것 30가지를 적은 꿈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겁니다."

‘꿈의 리스트 30가지?’
그가 얘기하는 리스트가 쉽사리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따지듯 물었다.

"그런 공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공상으로 과연"

그 답지 않게 내 말을 서슴없이 잘랐다.

"공상과 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공상은 그저 막연하게 바라는 상상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헛된 기대일 뿐이죠.

".........."

"반면 꿈이란 각자의 생을 불사르며 몰입하는 정열의 대상입니다. 시간과 노력, 에너지를 투입하면서 즐거움과 가치를 동시에 찾을 수 있는 목표입니다. 그런 목표가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펼치는 이야기의 논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겁니다. 그것도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꿈은 순식간에 공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는 것들만 생각하고 있죠."
"한 번 써 보겠습니다."

"우리 다음 주에 봅시다, 강 선생. 원하는 게 분명해지면 그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도 구체화될 겁니다. 그 꿈의 리스트를 만드는 작업, 그 사랑과 정열을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이 행복의 나라로 들어가는 두 번째 열쇠입니다. 새롭지만 즐거운 도전이 되길 바랍니다."

사북 역에서 표 회장이 내렸다.

하지만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귓전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원하는 걸 가질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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