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을 모르니 헤맬 수밖에

정거장 아홉 - 나침반

by 강바다

"왜 인도였습니까?"

대답 대신 그가 빙긋이 웃었다. 잠시 차장 밖을 지긋하게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다음 역이 제천입니다. 우리 의림지를 돌아보며 시원한 저수지 바람이나 쐴까요?”

기차 밖 세상엔 늦봄 햇살이 서산 너머 걸린 채 금요일 오후를 물들이며 스멀거리고 있다. 역 앞에서 기다리던 택시에 올랐다. 의림지는 제천 시가지를 지나 북쪽으로 잠시 달리니 용두산 남쪽 기슭에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중의 하나로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처음 방죽을 쌓았다'는 택시 기사의 설명을 들었다.
의림지에 들어서니 우거진 노송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저만치 앞에 이층 누각도 보였다. 노송과 정자가 운치 있게 조화를 이루며 과거의 풍광을 재현해내고 있다. 경호루라는 누각의 맞은편 노송 아래 빛바랜 나무 벤치가 보였다. 오갈 데 없는 나그네의 지친 마음을 잠시 뉘이듯 그 한적한 공간을 잠시 빌리기로 했다.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낸 그가 커피 두 잔을 따르며 조용히 입을 뗐다.
"왜 인도였냐고요? 허허허……망고 라씨가 먹고 싶었거든요."

그 엉뚱한 대답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향의 맛이죠. 전 갑자기 짜이가 마시고 싶은 데요. 하하하."

"출장으로 델리엘 여러 번 갔었는데, 인도 사람들의 낙천적이고 욕심 없는 삶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라씨와 짜이를 마음껏 들이키면서요."

인도를 여행한 후 꼭 다시 되돌아 가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말에 공감할 것이다. 인도를 흔히 사색의 땅이라고 한다. 그곳에 가면 누구나 성자가 되기 마련이라고도 한다. 처음 그 땅에 들어서면 사색과는 전혀 거리가 먼, 혼돈과 더러움, 소란스러움과 무질서함에 질려버리고 만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그곳의 사람들의 불결함과 아수라장인 거리, 길거리 상인과 그들이 내다 파는 먹을거리를 보면서 속으로 쉴 새 없이 비명을 지른다. 제멋대로 말을 붙이고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속여대는 그들의 뻔뻔스러움과 누런 이빨들, 그 고약한 구취에 취해 버릴 즈음엔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아니더라도 서너 번쯤은 진절머리를 치면서 '이건 내가 꿈꾸고 동경하던 사색의 땅이 아닌데?’라고 되묻게 된다.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한동안 짙은 당혹감에 휩싸이지만 낯선 곳에서의 떠돎이 낯익어지는 여행자의 자리를 되찾을 즈음이면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골목들, 그 사이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낡은 건물들, 정신 산란한 머리 위의 전깃줄과 무질서한 교통법규마저 익숙해지면서 이것 또한 새로운 방랑을 위한 통과의례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고 나서 여행이 가져다주는 본격적인 배움이 시작된다.


"우린 항시 떠남을 꿈꿉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강 선생?”
“변화를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기대와 바람이죠.”

나는 어떤 행위에 굳이 이유를 찾고 명확한 결과를 예측하는 그런 치밀한 성격이 아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느낌에 따른다. 논리보다는 감성에 좌우된다. 그래서 이 사람이 풀어가는 이야기에 매혹된다. 나의 방식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속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얘기를 이어간다.

“무엇인가 낯설고 새로운 것을 마주할 것이란 막연하지만 흥분되는 기대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뭔가 다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입니다. 제 경우엔 그곳에서 차분히 나 자신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표정을 바꿔 장난기 머금은 얼굴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언제 이런 표정을 짓는지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강 선생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즉답을 피하는 대신 고개를 돌린 채, 경호루 옆의 다리를 건너고 있는 젊은 연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둘지 않고 그 질문을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 그가 던지는 질문들에 점점 익숙해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인가?’
옛날 같으면 ‘사진 기자’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 직업에 대한 자긍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선뜻 그 대답을 할 수 없다. 얼마 전까지 손댔던 각종 프리랜서 일들은 그저 먹고살기 위한 생계의 수단일 뿐이었다. 돈이 생활의 목적인 셈이다. 지금 하고 있는 시간강사 노릇도 마찬가지다. 하나씩 짚어 보니 내 일상의 의미도 그다지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
내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당시 마흔의 나이가 되도록 나 자신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는 얘기가 되더군요. 아버지가 정해 놓은 목적지로 전후 좌우 없이 앞으로 무조건 달리기만 했었죠."
과연 정열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의 부재는 나란 존재의 의미를 쉽게 희석시켜 버린다. 그것이 내 삶의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여행의 목적지가 처음부터 뚜렷하다면 폭풍우가 몰아치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이를 악물고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으련만 여행의 목적지가 불분명하니 작은 고난이 스치기만 해도 이쪽을 기웃거렸다가 저쪽으로 되돌아갔다가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마치 행선지 없이 떠난 떠돌이처럼.

이번엔 내 차례다.

"제가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배우는 거죠?"

"사랑하는 법입니다."
"지난번 말씀하신 세 가지 소원과 이어지는군요.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하셨죠?"
"사색의 성지라는 인도에서 나 스스로에 대한 정의와 생의 의미를 깨닫고 싶었습니다. 머리를 비운 채 가슴을 열고 그 질문을 끊임없이 내게 던져보았습니다."

"쉽게 얻어지는 대답이 아니었을 듯싶습니다만."

그의 입가에 선한 미소가 번졌다.

"상처 난 마음은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가지려 하기보다 마음의 묵은 앙금들을 비워내려 애썼으니까요. 조금씩 나를 내려놓고 버리고 비워 가니, 다른 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사랑하는데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신 겁니까?"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려니 용기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다시 피하고 숨게 되니까요."

"누가 그 빈자리로 들어오던가요?"

"돌아가신 아버지, 버림받으신 어머니, 이혼한 아내, 나의 두 형님들. 계모와 두 여동생,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첫사랑 혜진이 등 내가 사라질수록 그들이 조금씩 나의 빈자리로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그들도 잘못 꿰어진 과거의 앙금들이라고 여기고 떼어내려고 했었죠. 자꾸 떨쳐버리려고 해도 안되더군요. 어쩔 수 없이 그냥 물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들의 눈에 비추이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부족하고 미덥지 못한 자식으로 보였겠다' '과연 눈에 가시 이기도 했겠다'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들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니 그 사람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니 제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마음의 문이 열렸던 거로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는 줄곧 내가 가지고 있었다는 걸. 그 버림과 채움의 대 장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신을 비웠으면 완성형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밀물과 썰물입니다. 다 비운 줄 알았는데 또다시 옛날의 나로 순식간에 가득 채워지니 말입니다. 실패와 시도를 반복하니 현재 진행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허허허."

"지금 자신을 비우고 다른 사람들로 채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는 겁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걸 먼저 배워야 하죠. 그러면 새로운 것들로 채울 수 있습니다."

알듯 모를 듯한 그의 대답에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얘기를 나눌수록 궁금한 질문들이 샘처럼 솟아올라 왔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정의했습니다. 도대체 왜 사랑을 해야 하는 겁니까?"
그의 두 눈이 순간 번쩍거렸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힘, 명성, 사회적 지위 등등 전부 다 가져봤습니다. 그걸 다 가졌는데도 단 한 번도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면 행복해집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아이러니컬하군요.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 나를 버리고 비워야 한다니?"

손에 든 커피가 식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었다.

곧 어두워질 것이다. 제천 역으로 함께 돌아와 다음 기차를 기다리며 플랫폼에 앉았다. 저녁 바람이 왠지 썰렁하게 느껴졌다. 그가 대합실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시장기가 도는군요. 다음 기차가 오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역 앞에 국수를 아주 맛있게 말아 파는 포장마차를 알아요. 자. 갑시다. 강 선생."
그가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 나갔다. 거침없이 자신만만한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며 상대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까닭 모를 답답함이 검은 뭉게구름처럼 엄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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