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그릴라로 가는 완행열차

정거장 일곱 - 목적지

by 강바다

그는 등산복 차림이었다. 빙긋이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앞 좌석에 앉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한 주 내내 그의 과거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지난주 받은 쪽지에 얽힌 여러 가지 의문들이 가슴 한쪽에 흩뿌려진 채 남아 있다. 궁금한 걸 못 참는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지난번 써 주신 행복의 나라란 무슨 뜻입니까? 열쇠는 또 무엇이고요?”

"허허허. 그 얘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강 선생에게 하나 물어봅시다."

‘또 무슨 엉뚱한 얘기가 펼쳐지려나’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알라든 램프의 요정입니다. 세 가지 소원을 말해보세요."

다시 허를 찔린 느낌이다. 예상치 않은, 아니 쉽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만 금방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머뭇거리지 않으려고 생각이 떠오른 대로 주절거렸다.

"우선은… 무엇보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글쎄요… 10억 아니… 한 100억 아니… 뭐 그 정도쯤 있으면 충분할 것 같네요. 두 번째는… 일류 작가, 사진작가로 성공하는 겁니다. 내 사진 스튜디오도 있었으면 좋겠고. 그것이 그러니까 어릴 적부터 꿈이거든요… 에… 또… 세 번째는… 부자이면서 성공했으니… 뭐… 오래 살아야겠죠."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갑자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그런데 어쩌죠, 강 선생. 내가 힘 빠진 늙은 요정이라 단 한 가지 소원밖에 들어줄 수가 없는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소원만 말해 보세요.”
세 가지 소원을 주섬주섬 나열해 놓고 보니 가장 중요한 소원을 꼽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성공한 사진작가가 되는 겁니다.”

“돈보다 오래 사는 것보다 사회적인 성공을 더 바라는군요.”

“당연하죠.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별 볼일 없이 오래만 살면 뭐하겠습니까? 다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그가 말없이 지긋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어색함이 싫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가 빙긋이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힘과 감사할 수 있는 지혜,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제 소원 세 가지입니다. 그중에서 단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언제나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해 달라고 바랄 것입니다.”

‘갑자기 웬 사랑 타령’이라는 생각도 잠시 그의 소원을 곱씹어 보았다. ‘사랑할 수 있는 용기’라는 말이 우선 귀에 거슬렸다. 고상한 말장난 정도로 들렸을 뿐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내 느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죄송합니다만 제게는 무슨 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들립니다 현실성이 결여된 망상처럼. 우선 그것들이 어려운 것인지, 소원으로까지 갈구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허허허. 그렇군요.”

눈가의 잔주름들이 물결처럼 잡히면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 선생에게 행복의 나라는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돈과 힘을 마음껏 누리고 행사하는 그런 곳입니까?”

“강자의 삶이죠. 인생이란 무대의 주연이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동물의 왕국처럼 적자생존 아니겠습니까? 들러리나 변두리 인생이 아닌 힘과 부를 가진 성공한 인생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행복의 나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성공입니다.”

그가 보일 듯 들릴 듯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이 과연 생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요?"

대번에 그의 말을 받았다.

“성공만큼 확실한 목적이 또 있을까요?”

그가 똑바로 나를 쳐다보았다.

“'성공은 결과일 뿐 결코 목적은 될 수 없다' 19세기를 살았던 프랑스 작가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말입니다.”

말을 잠시 멈춘 그의 시선이 창 밖에 머물렀다.
"만일 그 성공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면 강 선생의 삶은 온통 불행한 것이 되고 말겠군요."


그 의문은 죽은 듯 숨을 삼키고 있다가 순식간에 나를 할퀴고 희롱하던 바로 그 물음이었다.

'혹시라도 성공이라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영영 행복해지지 못하는 건가?'
훌훌 벗어던지고 홀가분해지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 옥죄여 오는 굵은 올가미의 무게에 짓눌린 듯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 선생처럼 계절을 모르고 물기 없이 살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꽃이 피는지 지는지, 새소리가 나는지 마는지, 마냥 앞으로 줄달음만 치던 시절, 돌이켜보면 아쉽고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돈도 있었고 사회적 성공도 이뤘습니다. 반면 제 삶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얼마 뒤에 깨달았죠. 물기가 마르면 감성도 사랑도 말라 버린다는 것을. 사랑이 마르면 곧 생명도 마릅니다.”

엷은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엔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을 생의 끝이라고 하는데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입니다. 죽음 역시 삶의 또 다른 모습일 테니까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랑이 말라 없어지는 것, 그것이 생의 반대말입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껍데기에 불과한 시간의 허무한 낭비일 뿐이죠. 사랑이 없는 성공, 사회적 지위, 출세, 돈, 쾌락 이러한 것들 모두 결코 행복의 나라로 들어가는 열쇠도 목적도 되지 못합니다.”

그의 양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런 것들을 찾아 헤매며 샹그릴라를 꿈꿉니다만."

‘샹그릴라’란 내 말에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강 선생도 샹그릴라를 찾고 있습니까?"

샹그릴라! 학창 시절 읽었던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파라다이스의 대명사, 히말라야의 깊은 산맥 너머에 숨겨진, 사람이 쉽게 찾아갈 수 없는 오염되지 않은 낙원, 수백 년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평화의 땅, 미움과 다툼, 위선과 악행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의 나라, 바로'샹그릴라'가 아니던가.


고개를 숙인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예의 웃음 띤 얼굴을 되찾으며 내게 물었다.

"그 샹그릴라로 강 선생을 데려다 줄 열차가 있다면, 그 열차에 타고 싶습니까?"
“샹그릴라로 달리는 기차라. 기차표가 꽤 비싸겠는데요. 하하하.”

내가 농으로 받았다.

“비싸죠. 인내라는 비싼 기차 삯을 치러야 할 테니까요.”

그는 진지했다.
“강 선생이 생각하는 성공은 그곳엔 없을 겁니다. 대신 마음의 평화와 진정한 행복이 있지요.”

뒤 자석에 등을 기대앉아 있던 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마치 제 생의 목표인 사회적 성공을 마음의 평화와 바꾸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강 선생에겐 어느 것이 더 소중합니까? 역시 사회적 성공입니까?”
내가 머뭇거렸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던진 물음의 의미를 상기시켜주었다.

“사회적 성공을 이루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쌓으려는 이유가 혹시 마음의 평화를 얻고 행복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이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샹그릴라로 떠나는 열차! 마음의 평화와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 떠나는 기차 여행이라. 현실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런 여행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진정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열차에 오르고 싶습니다.”
그가 따뜻한 미소를 두 눈에 담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때의 결정이 남은 내 인생을 어떻게 송두리째 바꿔놓을지 당시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삶의 궤도와 방향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 속으로 옮겨졌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 현실과 매 순간 부닥치는 내가 변하자 밋밋한 흑백의 모노톤으로 다가왔던 평면적 상황들이 총천연색 입체 영화처럼 전개되기 시작했다. 변화의 실체는 격정적인 혁명이었으나 소리 없이 천천히 진행되었다. 변화가 시작됐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많은 인내가 필요할 겁니다, 강 선생. 샹그릴라로 가는 열차는 완행열차이거든요.”
“얼마나 많은 정거장을 지나쳐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떠날 만한 가치가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자,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나의 샹그릴라를 찾았는지 얘기할 차례로군요.”

낯설고 생소한, 커다란 문이 열리고 있었다. 맑게 빛나는 그의 두 눈 뒤로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