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여섯 - 교차로
한참 만에 돌아온 그가 짧은 한숨을 쉬더니, 안주머니에서 작은 황갈색 수첩을 꺼내 뭔가를 메모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겉가죽이 닳아 너덜너덜해진 수첩을 덮은 그가 잠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예기치 않은 화두를 느닷없이 던져 왔다.
"선생은 행복합니까?"
나에 대한 호칭이 '젊은이'에서 '선생'으로 바뀐 것도 눈치재지 못한 난 이것도 '삶은 달걀’처럼 무슨 썰렁한 유머가 아닌가 싶어 멍해졌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입을 뗐다.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나도 선생도 이 기차 안에 탄 승객들 모두, 안 그런가요? 불행해지기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니, 그전에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 먼저 생각해 봐야겠지요?"
그다음 질문이 분명했고 그 대답을 쉽게 할 수 없다는 걸 방금 깨달았기에 순간 당황했다. 예상했던 질문이 꽂히듯 바로 날아왔다.
"선생은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인도에서 그걸 찾았나요?"
"..........."
대답 대신 지난 주말 아내의 모습이 물안개 피어오르듯 떠올랐다.
"오빠 행복해요?"
지난 일요일 진영이 팔짱을 끼며 조용히 물었다. 동해식당에서 오징어 회를 안주로 가볍게 소주 한 잔씩 마시고 노을 지는 제방 위를 거닐 때였다.
"물론이지. 내 보물이 내 옆에 이렇게 있는데, 난 너무 행복해."
아무런 주저 없이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다음 똑같은 질문을 하려 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나 보다 훨씬 더 많이 행복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지 선뜻 자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낭패감을 과연 홍 교수의 말대로 분노와 좌절로 대신 풀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단지 나만을 위해서.
갑자기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여러 생각들로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었다.
"하하. 괜찮아요. 낙담할 필요까진 없죠. 지금까지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박에 그 대답을 명쾌하게 해 준 사람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제게 행복이란."
뒤늦게 행복의 정의를 서둘러 내놓았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도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이제 선생의 얘기를 듣고 싶군요. 무슨 얘기든 맘 편하게 하고 싶은 얘길 해주겠어요?"
평소의 나 답지 않게 이 노신사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내 이름과 원주 모 대학 시간강사 2년 차로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 결혼 후 동해에 살면서 매주 월요일 동해에서 원주로 통근한다는 것, 원주에선 가까운 선배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매주 금요일 오후 원주에서 동해로 돌아가는 이 기차를 타고 주말은 아내와 함께 보낸다는 것, 커다란 욕심은 없고 찍고 싶은 사진을 마음껏 찍으면서 성공한 사진작가로 한눈팔지 않고 생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등등 개인적인 얘기를 털어놓았다.
한동안 내 얘기를 듣고 난 후, 그가 물었다.
"성공한 사진작가, 그것이 강 선생이 타고 있는 기차의 최종 목적지입니까?"
그 질문의 속뜻을 가만히 음미하면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얘기를 나눌수록 흥미로운 사람이다. 사고의 폭이 유연해 자유분방한 듯하고, 술술 이 얘기 저 얘기를 쉽게 털어놓고 싶은 대화 상대였다가 어느 순간 이야기의 핵심을 단박에 찔러오곤 한다. 인도에 대한 정의가 그랬고, 기타 소녀 사건 직후 불쑥 던진 질문, 방금 나의 폐부를 건드리는 ‘당신 삶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도 다 같은 맥락이었다.
도대체 행복이니 인생이니 이런 추상적인 질문을 기차 안에서 낯 모르는 이에게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거침없다는 얘기는 자신이 던진 명제에 대한 답들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건 삶에 대한, 행복의 참 의미를 꿰뚫고 있다는 자신감이 아닌가. 객차의 실내등에 반사된 그의 얼굴 위 주름들이 온갖 역경을 헤쳐 온 승리의 화환처럼 빛나 보였다. 그의 뻔뻔스러우리만큼 강한 자신감과는 정반대로 난 계속 버벅거렸다.
"글쎄요."
맥없는 표정의 나를 한동안 뚫어지게 보더니, 황갈색 수첩을 다시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짤막하게 몇 자를 쓰더니 그 페이지를 수첩에서 찢어 두 번 접었다. 바로 그때 기차가 사북 역으로 들어섰다. 역을 확인한 그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손을 내밀었다.
"여기가 내 정거장입니다. 난 표민수라고 합니다. 매주 금요일 이 기차를 탄다고 하니, 다음 주 금요일 이 기차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죠, 강 선생?"
나도 엉겁결에 일어나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모직 재킷과 자주색 목도리를 한 손에 쥐고 녹색 배낭을 둘러맨 그가 웃으며 아까의 쪽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성큼성큼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잠시 무슨 꿈을 꾼 듯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가 준 쪽지를 받아 펴보았다. 힘 있는 필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행복의 나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열쇠
많이 웃으세요.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겨야 하니까
그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