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후회 없이 살만한 가치란 무엇입니까

정거장 열둘 - 여행을 떠난 이유

by 강바다

표 회장이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객차가 떠나가도록 껄껄 웃었다.

"개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제 첫 시작입니다. 4개가 1개보다 낫고 1개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리스트의 30개 중 고작 4개밖에 쓰지 못했다고 잔뜩 풀이 죽은 내게 그가 활기찬 목소리로 힘을 북돋아주었다.

"강 선생, 하나를 바꾸면 전체가 바뀔 겁니다. 한꺼번에 전부를 바꾸려 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바꿔보세요. 하나하나씩 그러면 모든 것이 변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긴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이 구체화되고 손에 잡힐 듯 가시화된 느낌이었죠. 다만 제 꿈을 만들어가는 작업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는 선뜻 확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설령 길을 잘못 들었더라도 낙심할 건 없습니다. 닦이지 않은 길을 간다고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갈대밭을 지나면 거친 자갈이 깔린 황무지가 나오고 낭떠러지와 마주칠지도 모릅니다. 억새풀과 돌무더기를 자꾸 밟고 디디면 없던 길이 반듯하게 생겨나는 겁니다. 새 길은 새 지도를 만들고 그 지도가 강 선생의 인생 항로를 이끌어 줄 나침반이 되어 줄 겁니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어서."

"자신을 믿으세요. 스스로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데 다른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과 행동, 자신의 가능성 모두를 당당하게 믿어보세요!"

폭포수처럼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의 말을 듣자 용기가 솟아올랐다.

원주 역에서 내가 사서 내놓은 김밥 하나를 집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정확한 답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질문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애당초 리스트를 만들게 된 첫 질문이 무엇이었죠?"

"성공한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원하는 30가지,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리 그 질문을 단순화시켜 봅시다. “

”.......... “

“'성공한 사진작가'란 전제를 빼 버립시다. 자, 강 선생이 원하는 30가지는 무엇입니까?"

낯익은 화제가 아닌가.

‘내가 나의 삶에서 원하는 30가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30가지라.’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행복의 나라로 들어가는 열쇠, 세 가지 소원과 이어지는 질문이로군요?"

그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 대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먼저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시각을 바꾸면 됩니다. 나의 시각에서 벗어나 철저한 제삼자, 구경꾼이 되어서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겁니다. 뭐가 보입니까?"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이끄는 길로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이미 행복의 나라로 가는 완행열차에 올라탄 뒤였고 기차는 느리지만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30대 중반의 사내가 보입니다."

“그 사내는 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합니까?”

그 질문에 욱 하고 짜증이 올라왔다. 아픈 상처를 소금으로 문질러대는 듯했다.

대답도 격하게 나왔다.

"성공한 사진작가로 보란 듯이 폼 나게 살고 싶은데, 찌질이 3류 시간강사로 여전히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

“흠. 그렇군요. 경제적으로 여유는 없을지라도 그는 아직 젊고 건강합니다. 무엇보다 그가 몹시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꾸며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옆에 있기 때문에 그 사내에겐 사회적 야망과 그에 따른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가 울분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젊음, 건강, 행복한 가정보다 사회적 성공이 더 중요합니까?”

“모두 중요합니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욕심이 많은 사내로군요. 모든 걸 다 가지려 하다니."

"원하는 걸 모두 소유한 사람도 많습니다."

"아니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누구나 부족하고 아쉬운 것들이 하나 둘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알지 못합니다. 몇 조각의 겉면만 스치듯 보고 그 사람을 쉽게 판단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의 인생에는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희로애락의 치열한 파노라마가 감춰져 있게 마련이거든요."

"많이 가질수록 부족한 것도 상대적으로 적어집니다."

내가 되받아 쳤다.

"근본적인 문제는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과연 그것을 가졌느냐입니다."

뭔가 알 것도 싶었다. 내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가장 절실한 것을 쟁취해 소유하고, 그다음 두 번째 절실히 원하는 것을 찾고, 나머지 부족한 것들을 차례로 채우면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로군요."

표 회장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곧 웃음을 얼굴 가득 채우더니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전, 아니 그 사내는 사회적 성공과 성취를 1순위 목표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표 회장이 내뱉듯 툭 하니 말을 던졌다.

“올 크리스마스가 그 사내에게 마지막이라도 말입니까?”

그 말을 이해하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의미를 깨닫자 갑자기 숨이 콱 막혀왔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1년이란 뜻입니까?”

“1년이 채 안될지도 모릅니다. 불과 한 달 후 길어야 6개월이란 시한부 선고를 받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요새 평균 수명이 80세쯤 되는데.”
내가 말꼬리를 흐렸다.

“많은 이들의 인생이 불과 몇 초만에 순식간에 바뀌는 걸 우리는 매일 봅니다. 오늘이 내일로 계속될 것이란 가능성을 우린 절대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변함없는 규칙과도 같은 반복적인 일상에 지루해하며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도 그 당연함이 갑작스레 끊기면 누구나 아연실색하죠. 마치 전혀 몰랐던 놀랄만한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 것처럼.”

“오늘이 내일로 이어질 것이란 가능성은 항상 높지 않습니까?”

“그 가능성 때문에 인간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심한 배반감과 후회를 느끼게 되죠. 좋습니다. 그 사내에게 주어진 운명이 평균 수명의 절반에 불과한 40년이라는 것을 우리 두 사람만 알고 있습니다.”

억지라고 심통을 부리고 싶었지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머니는 마흔을 넘기지 못했고 아버진 아무런 예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40년. 고작 마흔이 끝이라면 그 사내에겐 2년밖에 남지 않았군요."

내가 혼잣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자. 그 사내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의 삶 1순위엔 변화가 없습니까?”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여전히 그는 사회적 야망을 성취하는데 앞뒤 없이 매진할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아내 게다가 곧 어린 자식이 생긴다면 어떨까요?"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진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각을 바꾸고 생각을 바꿔야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속뜻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길어야 80년 정도인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하고 싶죠. 나는 아니라고 나는 불사조처럼 오래 살 것이라고. 이런 막연하고 어리석은 믿음을 가지고 과거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진정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정작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헛된 명성, 사회적 성공, 부질없는 돈과 권력을 탐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삶의 끝인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요, 아니면 후회 없이 만끽하다가 죽기 위해서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죽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누구나 천국엘 가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죽고 싶어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가 보일 듯 말듯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 남자에게 남은 시간이 2년이란 명확한 숫자로 정해진다면 남은 시간 동안 후회 없이 치열하게 살만한 가치란 무엇일까요?”

".............."

“많은 돈을 버는 것일까요, 대저택에서 살며 고급 승용차를 타는 것일까요, 과연 이름을 대면 알만한 저명한 사회 명사가 되는 것입니까? 강 선생은 그런 것들을 위해 남은 2년을 남김없이 전력투구하겠습니까? 2년보다 긴 20년, 30년이라도 결국엔 마찬가지입니다.”

“..............”

"혹시 뜨겁게 마음껏 사랑하는 것, 이것은 아닐까요? 강 선생이 자신보다 훨씬 더 사랑하는 강 선생의 아내를,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강 선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그 아내를 더 많이 더 오랫동안 사랑하는 것이 후회 없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건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가장 절실하고 커다란 소원이 되진 않겠습니까?"

이번엔 내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인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표 회장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마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헤매는 절실한 눈빛으로, 그것이 아니라면 잠시 잊었던 기억이 터진 봇물처럼 밀려 들어와 감당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눈빛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허공에 시선을 둔 그의 표정이 어둡게 바뀌면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갑작스레 그가 처음 보는 사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들릴 듯 말 듯 허탈한 웃음이 잔기침처럼 흘러나왔다. 한동안 초점 없이 헤매던 그의 눈동자가 내게서 멈추더니, 작심한 듯 천천히 입을 뗐다.

"인도에서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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