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생을 위한 로드 맵

정거장 열여덟 - 종착역에서 쳐다보기

by 강바다

짜이를 들이켜며 케이시가 황갈색 수첩을 내밀었다.

“당신의 로드 맵이에요.”

케이시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나비처럼 활짝 펴졌다 천천히 내려앉았다.

“로드 맵?”

“어젯밤 생각 많았죠? 하루 종일 말도 별로 안 하고 종이에다 이것저것 끄적거리고 밤엔 많이 뒤척이던데.”
일몰을 기다리며 나눈 대화 이후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보려 했다. 케이시가 던져놓은 질문, 몇 겹의 기름덩어리로 뒤덮인 채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진 나의 잠자던 이성을 단박에 후벼 파듯 찔러대던 그 질문, ‘생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할 때였다. 그 물음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늘을 더 치열하게 살 수 있는 현실적인 열쇠였다.

지금까지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았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일어난 모든 일, 나와 아버지, 나와 어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첫사랑 혜진, 이혼한 아내, 이복형제들과의 관계들, 아버지가 평생 동안 일으켜 세운 회사와 그룹의 몰락, 사회적 지위의 추락과 주위의 손가락질, 재산과 명예, 그 조직 내에서 함께 일하고 대했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뜬 구름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밤이 되어선 낮엔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생각과 사건들이 무차별적으로 꼬리를 물기 시작해 온갖 상념들로 뒤죽박죽 되었다. 잠은 잠대로 못 자고 머리만 무거웠다.

아침에 케이시의 맑은 얼굴을 보고 나서야 피곤함이 한결 덜해졌다.

“행복하고 싶다고 했죠? 이 수첩에 ‘수의 행복한 인생을 위한 지도’를 하나씩 적어 나가요. 길을 잃을 때마다 이 수첩을 펼치고 지금 어떤 길로 어디까지 와 있는지, 목표에 가기 위해선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계속 찾아봐요.”

케이시가 건네주는 황갈색 수첩을 받아 열어 보았다.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진 가죽 촉감이 부드럽다. 첫 장엔 낯익은 케이시의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Chapter 1 죽음

Chapter 2 생의 의미

Chapter 3 행복

Chapter 4 사랑

“죽음이 행복한 인생을 위한 로드 맵 1장이라니 모순적이네.”

케이시가 배시시 웃었다.

“우디 알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다음 생을 다시 산다면 그땐 시간을 거꾸로 살고 싶다고. 늙은이로 시작해서 갓난아이로 죽고 싶다고요.”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좀 달라요. 단순히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외모만 바뀌는 것이 아니에요. 지난 생에서 죽기 전까지 배우고 쌓아왔던 모든 경험과 지혜, 통찰력을 고스란히 지닌 채 다음 생을 시작하는 거죠. 시간이 흐를수록 젊어지면서 생을 노련하게 산다는 발상의 전환이죠.”

“과연 우디 알렌답네. 재치가 넘쳐.”

“죽음을 먼저 이해한다면 다가오는 생의 의미를 깨닫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는 얘기니까요.”
“생의 의미 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 앞에서 허물어지고 싶지 않아.”

아버지의 모습에 겹쳐 떠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애써 지워버리며 내가 말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잊고 살죠. 아니, 잊으려고 애쓰면서 살죠. 결국엔 죽음이 올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저만치 멀리 있다고 편하게 망각해버려요.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선 또렷이 기억하고 있죠. 죽음은 언제든 우리의 의사 따윈 상관없이 쉽게 다가올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온다는 걸.”
케이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정계와 재계의 거인이라던 아버지, 거대한 산과 같던 아버지도 갑자기 허무하게 가셨어. 당신은 물론 나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내가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유명인의 부고 소식을 매스컴을 통해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올라요?”
케이시가 부드러운 미소를 되찾으며 물었다.

“우선 안타깝겠지. 아, 그 사람이 결국 갔구나. 참 슬프다. 뭐 그런 감정.”

“하지만 아직 나는 이렇게 살아있어서 좋다. 뭐 이런 감정도?”

케이시의 뼈 있는 농담에 ‘하하하’ 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씩 잔인한 취미가 있어 불편한 진실을 낱낱이 까발리는.”

“호호. 그런가요.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평범한 보통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잔인하다는 말은 심했어요”

“미안해. 케이시.”
“이건 어때요? 가까운 사람이 병이나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죠. 전화 한 통, 문자 한 줄이면 충분하겠죠. 처음엔 안 됐다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뒤범벅된 심정, 그런 다음엔 내가 아니어서 감사하다는 단발의 행복감, 그다음엔 언젠가 나도 저렇게 불치병을 선고받거나 사고 또는 투병하다 죽었다는 부고 소식이 문자로 전해지겠구나 하는 씁쓸한 비통함. 이런 시나리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과연 그럴 것이다. 영원처럼 지속될 것이라 기대했던 나의 삶, 지금까지의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했던 일상, 오늘과 비슷할 것이라고 당연시했던 내일이 순식간에 끝나버리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상을 살아야 한다. 끝이 정해진 시한부 인생이라!

눈치 빠른 케이시가 내 머릿속에 지금 무슨 생각들이 스쳐가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끝나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죠. 그러기에 부단히 노력하나 봐요. 홈쇼핑으로 마구 물건들을 사들이고, 보톡스로 주름을 없애고 성형 수술을 하면서 늙고 있다는 것, 그래서 한발 한발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려 하죠. 재산을 불리고 쾌락을 탐하면서 하루하루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마치 먹잇감을 찾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부리를 피해 눈만 가린 채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는 가여운 병아리들처럼”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내가 말했다.

“왜 죽음이 내 로드 맵의 첫 장이어야 하는지 이제 알겠어.”

“왜죠?”

“죽음을 직시하면 삶이 보일 테니까.”

“바로 그거예요.”

케이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전에 잠깐만, 케이시. 당신의 로드 맵은 어쩌고 이 수첩을 내게 건네주는 거지?”

“원래 나의 로드 맵으로 준비해둔 것인데 이젠 필요가 없게 됐어요. 그러니 수, 당신이 부담 없이 써줘요.”

“당신은 행복한 인생을 위한 로드 맵을 이미 완성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그렇다면 케이시, 로드 맵을 이미 완성한 선배로서 막 로드 맵을 그리려는 이 풋내기의 길잡이가 되어 줘야 해.”

“기꺼이!”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돌계단 위로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케이시의 무릎을 베고 풀썩 누웠다. 그녀가 내 머리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자, 이제 죽음, 아니 삶의 의미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이런 평화로운 행복 속에서 죽음을 생각해야 하다니 뭔가 잘못됐어.”

투정에 가까운 불평을 토하자, 마치 붓칠 하듯 왼손으로 내 얼굴 여기저기를 쓰다듬었다. 한동안 케이시의 다정한 손길에 얼굴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어젯밤 단편적으로 정리한 생각을 얘기했다.

“생의 목적이 행복하기 위한 것임은 틀림없어. 삶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은 각자 다르겠지만 문제는 내 삶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 잘 모른다는 거야.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지.”

케이시가 내 손을 잡았다.

“단순화시켜봐요. 어렵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얘기하는 걸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죠. 단순함이란 비약이 아니에요. 단순함을 재발견해봐요. 문제의 핵심으로 곧바로 들어가서 그걸 정확히 꿰뚫고 그 문제를 이해하면 쉽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죠. 단순함, 그것이 열쇠예요. 예를 들면, 내가 지난번에 했던 행복에 대한 질문 생각나요?”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하룻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삶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었지. 난 행복이라고 대답했고.”

“원하는 걸 알았으면 그걸 찾는 방법을 터득하고 익혀야죠. 이제부터 간단하고 단순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요. 단, 그 대답들도 간단하고 단순하게 나오도록 해야 해요. 어때요, 질문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나요?”

“다음 세 가지 물음이 우선 떠오르네.”

‘언제 행복한가?’

‘무엇을 하면 행복한가?’
‘어떻게 하면 행복한가?’


케이시가 가볍게 손뼉을 세 번 쳤다.

“멋진 시작이에요, 수!”

내가 멋쩍어서 툭하니 내뱄었다.

“왜 모든 문제를 단순화해서 정의 내리고 답을 내놓아야 하죠?

“행복한 생을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 채 죽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겠죠. 곧 후회스러울 것이고.”

“어떤 후회죠?”

“이럴 줄 알았으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쉽고 안타까운 후회겠지.”

케이시의 얼굴에 서글픔의 그림자가 일순 비쳤다가 사라졌다.
“죽는 사람에겐 두 가지 후회가 생긴 대요. 하나는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후회, 그때 그렇게 해서 상처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지난 시절의 말과 행동에 대한 후회가 그것이고요. 두 번째는 이럴 줄 알았으면 부끄러움과 체면 따윈 다 내던져버리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 즉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후회가 그것이죠. 어떤 후회가 더 클까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죽는 순간에 정말이지 그런 바보 같은 후회는 하고 싶지 않다.
말없이 고개를 돌려 서서히 저물어가는 해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케이시가 황갈색 수첩을 내밀었다. 그 수첩을 받아 열고 그 세 가지 질문을 적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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