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열아홉 - 갈림길
나는 걸었다. 강가를 걷고 또 걸었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걷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는 걸 일찍이 아버지의 오른팔이었던 남상무가 가르쳐 주었다. 그룹의 신개발 투자 전략 및 각 계열사의 단계별 개발 기획 등 주간보고가 끝나고 별도의 기밀 사항을 내게 단독으로 보고할 때면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좀 걸으시죠.”
그러면 우린 회사 밖을 나와 마치 식당이나 근처 커피숍으로 가는 평범한 직장인들처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거리를 걸었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신경 쓰이는 걸 빼면 그와 함께 걷는 게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걸으면서 그는 아버지의 동선, 두 형들의 동태, 그들을 따르는 회사 내 임직원들의 날 선 움직임 등 회사 중심부 사람들의 동향들을 극비 사항 인양 내게 전달했고, 그에 상응하는 나의 처신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가 주로 말했고 나는 들었다. 해야 할 말을 모두 마치고 나면 그는 꼭 이렇게 물었다.
“계속 걸으시겠습니까?”
그러면 난 무슨 복잡한 대응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앞으로 계속 걸어가는 내게 반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때부터 난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이른 오후 거추장스러운 비옷을 벗어버리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물론 남상무가 들려준 보고 내용이나 대응 전략 따위로 ‘머릿속의 먼지들을 털어내는 즐거움’을 허비할 순 없었다. 알 수 없는 답답함을 풀어버리고자 그냥 걷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텅 비었다. 그 느낌이 찾아들면 머리를 무겁게 했던 문제들이 쉽게 정리되었다. 걷는 것이 익숙해지고 나선 생각할 것이 있을 때마다 회사를 나와 거리를 무작정 걷곤 했다.
어떤 사람은 책상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다른 어떤 이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골몰히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수련원에 가서 책상다리를 한 채, 또 다른 누군가는 산속 절에 들어가 만물이 고요한 새벽 정좌를 튼 채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할 것이다. 난 걷는다.
지난 며칠간 강가를 걷고 또 걸었다. 걸을 때 각종 생각이 떠오르고 잡념은 걸러내고 치워낸다. 걸을수록 머리가 맑아진다. 케이시와 나눈 대화에서 떠오른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고 대답해보았다.
‘당신은 지금까지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불행했습니까?’
‘아닙니다. 불행하지도 않았습니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면 그건 어떤 시간들이었습니까?’
‘그냥 되는대로 주어진대로 생활했던 그저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무의미한 시간이었나요?’
‘습관처럼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무의미할 것 까진 없겠지만 딱히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시간인가요, 당신에겐 행복한 시간이란?’
‘당시에는 행복하지 않았을지라도 지나고 나서 의미 있는 시간이라면 나중에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나중 이란 당신이 죽는 순간인가요?’
‘그렇습니다. 죽는 순간에 돌이켜 본다면, 힘들었어도 의미 있는 시간이라면 반올림하듯 행복한 시간에 끼워 넣어도 될 수 있을 데니까요.’
‘왜 죽는 순간엔 행복한 시간이 그 당시엔 행복한 시간이 되지 못했을까요?’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
‘행복합니다.’
‘왜 지금은 행복하죠?’
‘사랑하는 케이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당신을 행복하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항상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같이 있으면 평화롭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런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제는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무엇입니까,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케이시를 만나기 전까지 당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사랑했습니다. 사랑합니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지금도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이상하군요.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당신이 말했습니다. 케이시를 만나기 전까지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사랑하는 케이시와 함께 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무엇이 다른가요?’
‘사랑하는 대상의 차이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연인에 대한 사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연 대상의 차이일까요?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
여기서부터 말문이 막혀버렸다.
비자 연장을 위해 일주일간 델리로 올라가 있는 케이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가 떠날 때 가볍게 분통을 터뜨렸었다.
“왜 비자 따위 때문에 우리가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어야 하지?” “왜 델리까지 올라가 신원 확인을 받아야 하는 거지?” “왜 절차를 간소화시키지 못하느냔 말이야. 멍청한 놈들, 형식 절차만 번거롭게 만들어가지고…”
목소리를 높이며 누구랄 것 없이 마구 싸잡아 화를 내자, 케이시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슬픈 눈을 보고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 아름답지 못한 짧은 이별 뒤의 첫 전화라 반가운 나머지 투정을 부렸다.
“왜 빨리 안 와, 케이시? 보고 싶어 미치겠어.”
“금방 볼 텐데, 뭘.”
케이시의 힘없는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애써 명랑한 목소리를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로드 맵을 만들어 나가다 막다른 절벽이 나왔어. 어찌할 줄 모르겠는데.”
“다시 돌아서 나와요.”
케이시가 서슴없이 말했다.
“막다른 절벽으로 나있는 길 말고 다른 갈림길이 보이는 곳까지 되돌아가요.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언제나 대답이 막히거든 항상 처음으로 돌아가요. 로드맵의 첫 장이 무엇이죠?”
케이시 가물었다.
“죽음.”
이번에는 내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늘 죽는데 하루만 더 살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보일까요?”
수화기 너머에 있는 그녀와 왜 지금 죽음을 계속 생각해야 하느냐고 따지고 싶지 않았다. 못 견디게 보고 싶다고 얘기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 보았다. 알듯 모를 듯했다. 우선 케이시가 알려준 대로 오던 길을 더듬어 마지막 갈림길로 다시 되돌아 나왔다.
‘왜 지금은 행복하죠?’
‘사랑하는 케이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당신을 행복하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항상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같이 있으면 평화롭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이곳이었다. 갈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