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최고를 이끌어내는 사랑

정거장 스물 - 기차표

by 강바다

잠시 길가에서 한 걸음 벗어나 쉬기로 했다. 황갈색 수첩에 적혀 있는 세 가지 질문들을 되뇌며 그 대답을 내놓았다.

'언제 행복합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합니다.’

'무엇을 하면 행복합니까?'
'사랑을 하면 행복합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합니까?’
'............ '


이 세 번째 질문은 잘못되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이란 ‘항상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같이 있으면 평화롭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이상의 무엇이었다. 막다른 절벽에 다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세 번째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져야 했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케이시의 말을 상기했다.

“오늘 죽는데 하루만 더 살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보일까요?”

오늘 죽기로 되어 있는 내가 하루만 더 살 수 있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이미 해 버린 것들에 대한 후회를 하기엔 시간이 터무니없이 아깝다. 오히려 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를 돌이키려 하지 않을까. 24시간이란 한정된 시간 속에서 해야 할 일들이 속속 떠올랐다. 두 사람의 얼굴이 빈번히 떠올랐다 사라졌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어머니 그리고 케이시였다.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실로 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인도에 와서 한 두 번 간략한 안부 전화를 했지만 이렇게 글로 나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써 본 적이 언제 인지 모르겠다. 아니,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떠나 온 인도 여행이 어느덧 다섯 달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그것이 최고는 아닐지는 몰라도 당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이곳 인도에서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당신이 이곳에 오셔서 지금까지 당신이 마주한 영욕, 좌절과 비애를 이 갠지스 강물에 훌훌 털어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도 제 안에 깊숙이 쌓여 있던 분노, 괴로움, 허탈감을 한줄기 강물 속으로 흘려보냅니다.

저만치선 너 댓 개의 타다 남은 장작 불꽃들이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검은 강물 위를 밝히고 있습니다. 강물과 닿아 있는 강변 가는 화장터입니다. 오늘 밤 화장터에서 타고 있는 사람의 형체가 장작불 속으로 어렴풋이 보입니다. 이곳에서 시신을 태운 재를 강물에 흘려보내면 지긋지긋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현생에서 마주하는 운명은 모두 전생에서 지은 업보의 결과이니, 이승에서 쏟아지는 고통, 가난, 슬픔을 저승에서는 벗어 버릴 수 있다는 믿는 겁니다.

저도 믿고 싶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발치에서만 머물렀던 제가 이곳에 와 세상과 맨 낯으로 만납니다. 이 넓고 커다란 바깥세상 안에서 그 큰 세상 못지않게 복잡하고 흐릿한 저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비로소 날 서고 거친 세계를 받아들이면서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란 싱싱한 의문에 가슴 저립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더 빨리 더 멀리 앞으로 가기 위해 달렸던 과거의 집착을 우선 벗어던지려 합니다. 비우려 합니다.

지금 먹물처럼 짙은 저 강물 위로 아침엔 붉은 해가 뜹니다. 붉게 물든 아침 강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지런히 형형색색의 다른 빛을 만들어 냅니다. 무색의 강물은 물줄기 위로 쏟아지는 삼라만상의 온갖 색상을 고스란히 받아 그 현란한 색깔을 비추어 냅니다.

제 마음도 이 강물처럼 무색이어서 제가 아닌 다른 색을 비추면 좋겠습니다. 마음속을 덜어내고 비워내는 것이 쉽지 않지만 계속 내려놓고 비워 놓으려 애를 씁니다. 그 작은 빈자리에 새록새록 차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어서 저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사랑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마음의 작은 여유와 평화가 피어납니다.

어머니! 당신이 선택한 그 최선의 방법이 저를 위한 것이란 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사랑합니다.

갠지스강가에서

아들 민수 올림


델리에서 저녁 버스로 돌아온 케이시는 피곤함 때문인지 형편없이 마르고 창백해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녀가 한동안 내 품에 안겼다. 미처 뭘 묻기도 전에 케이시가 먼저 폭탄을 터뜨렸다.

“비자 연장이 취소됐어. 나 이제 캐나다로 돌아가야 해요.”

“나랑 함께 가.”
마치 곧 떠난다는 케이시의 말을 기다린 사람처럼 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케이시가 천천히 내게서 떨어지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내 말이 단순히 농담이 아님을 알아차리는데 영리한 그녀에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 팔짱을 껴면서 말했다.

“우리 좀 걸어요.”

강가로 걸어 나가면서 우리 두 사람 아무런 말이 없다. 케이시는 지금의 상황과 자기의 생각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내 소매 위로 올린 그녀의 손을 잡아 나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꽉 꼈다. 깍지 낀 그녀의 오른손과 내 왼손을 위로 한껏 치켜 세운 채 웃음을 잔뜩 머금은 얼굴로 내가 소리쳤다.

“자물쇠 ~ ”

예전 같으면 이런 유치한 내 행동에 깔깔거리고 웃음을 터뜨렸을 케이시가 형편없이 풀린 눈동자로 나를 빤히 돌아본다. 그녀의 그늘진 얼굴이 무척 낯설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가까스로 참아내야 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아랑곳없이 내가 말했다.

“케이시, 우린 하나야. 당신이 가는 곳엔 어디든 내가 있을 것이고, 내 자리는 언제나 당신 옆이야.”

진심이었다. 바라나시에서의 체류가 길어지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일출과 일몰을 즐기며 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사색하는 여행자로 남아 있을 순 없었다. 케이시가 비자 연장을 위해 델리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결단의 시간이 가까워 왔음을 직감했다. 그녀와 처음으로 떨어진 지난 며칠 동안은 생각을 정리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첫 만남부터 하나씩 돌이켜 보았다. 이른 새벽 버스 정거장서 내게로 달려오며 급히 소리치던 그녀, 리시케시 새벽 명상 때 마주하던 깊고 청명한 눈, 그녀에게서 풍기는 짙은 라벤더 비누향, 독일 베이커리에서 다소곳이 와인을 마시며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가 어쩌다 눈을 마주치면 앞니를 드러내며 수줍은 듯 미소 짓던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초롱초롱 두 눈을 반짝이며 강가의 전설을 듣던 날 나를 도닥거려주던 그녀의 포근하고 따뜻한 품 속, 새벽녘 내 침상에 머리를 댄 채 잠들어 있던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와 지쳐 보였던 잠든 얼굴까지 지난 4개월의 꿈같은 시간들을 되새기며 그녀와의 관계를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바로 핵심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과연 내게 어떤 사람인가?”

대답은 금방 나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여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와 사랑을 안겨준 연인이자 친구, 앞으로 생의 동반자!’

케이시와 사랑에 빠진 것이 여행이라는 설렘과 혼란에서 생겨난 일시적인 흥분, 빠듯한 일상에 벗어나 맛본 자유로움과 그 여백에서 생겨난 충동적인 끌림이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해야 했다. 어렵지 않았다. 여행 후 한국에서의 일상으로 되돌아갔을 때, 비록 얼마 동안 여행의 후유증을 고려하더라도 예전의 일상을 무리 없이 이어갈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어떤 만남은 나의 자긍심에 상처를 내고, 내가 되고자 하는 나의 모습을 거부하고, 때론 그 용기를 무참히 꺾어 버린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대신 그들이 원하는 나로 만들기 위해 채찍질하고 비난하며 끊임없이 빈틈을 노린다. 그런 만남들에 쉼 없이 상처를 받아온 나로선 내 안에 숨겨진, 나 자신도 미처 몰랐던 나의 최고를 이끌어내는 그런 사람에게 빠져드는 건 당연하다. 케이시 없는 삶은 이제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다. 난생처음으로 초콜릿의 달콤함을 맛본 어린아이처럼 내 삶은 케이시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마흔을 갓 넘긴 내겐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의 시간, 아니 그보다는 짧은 시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남은 삶이 케이시로 인해 풍요로울 것임을 확신했다.


내 감정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알려줘야 했다. 지금 케이시의 반응을 봐서도 그녀 역시 비슷한 생각을 거쳐 어떤 결정을 내렸음에 틀림없다. 그녀가 무슨 엉뚱한 말을 꺼내기 전에 다급하게 먼저 말했다.
“케이시, 내일 찰리스 키친에서 저녁 먹으면서 차근차근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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