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문(回文)의 시절을 보내며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자존감을 바닥까지 짓이기는 누군가에게 나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속상한 경험을 하며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아물고 딱지가 내려앉은 마음으로 몇 자 적습니다.
복수를 해보기로 할까요. 나를 아프게 했으니 나도 똑같이 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에서 잘 드러나듯이 복수란 피해자가 제 분노를 마구잡이로 분출하는 일이 아닙니다. '복수의 서사'는 "고통의 등가교환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서사이며, 거의 실현 불가능한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사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실패하는가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정리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의 복수는 '같은 경험'을 인위적으로 생산해내는 기획입니다. 피해자는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를 그 양과 질 그대로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가해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해자 본인의 자발적 역량만으로는 그런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가해자의 성품과 노력의 차이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 즉 '타인의 슬픔을 똑같이 느낄 수 없음'이라고 요약될 그것과 관계하는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고통스럽게 절감할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교육하여 그로 하여금 제 무능력을 뛰어넘게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교육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교육으로서의 복수'라는 측면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고 수술을 하다 의료사고를 내지만 업무상의 과실치사라는 편리한 제도덕에 한 소년의 아버지와 한 여인의 남편을 죽이고도 의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찾아오는 한 소년이 있습니다. 소년은 하루아침에 아비를 잃은 소년과, 남편을 잃은 여인의 고통을 그 남자 또한 겪어보아야 마땅하다고 요구하며 묻습니다. "당신은 하루아침에 남편과 아비를 잃은 모자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에서 말입니다. 당신이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것이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있다면, 당신이 하지 못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남자가 소년만큼이나 슬프다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남자는 소년이 원하는 바로 그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 터무니없는 말로 들린다면 우리는 은연중에 소년이 아니라 남자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도 그만하면 노력했으며 소년의 요구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남자를 너무 빨리 용서한 것입니다.
소년은 물을 권리가 있습니다. 남자의 노력은 왜 그 정도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그것도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 앞에서 말입니다. 소년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 물음을 뒤집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이라서 더 냉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천하의 무자비한 폭군도 극장에서는 타인의 불행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태생적 동정심을 긍정했습니다. 그런데 한 저자는 저 대목을 거꾸로 읽습니다. 극장에서는 태연한 눈물을 흘리는 인간도 자신이 직접 행하는 악덕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 (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합니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 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것입니다.
소년의 첫 번째 질문은 예상대로 남자로부터 어떠한 반응도 얻어내지 못합니다. 누군들 다를 수 있을까요. 게다가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이니까 더욱 그렇게 됐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소년은 다른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나의 슬픔을 상상하는 데 한계가 있는가? (너는 슬프지만 나는 지겹다) 심지어 어느 지점에 이르면 동정심이 거꾸로 적대감으로 바뀌는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나한테 이러나) 그렇다면 정확히 동일한 상실을 경험함으로써 그 슬픔을 배워보라. 그래서 결국 남자는 소년에 의해 자신에게서 제 아들을 빼앗는 행위를 완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복수라는 수업의 성공 여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교육이 성공했다면 남자는 소년과 유사한 감정 상태와 존재 형식에 도달해야 합니다. 너무 큰 고통 때문에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을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아들을 죽인 대가로 살아남은 세 가족이 소년을 다시 만났을 때 남자가 내보이는 표정은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 찬 표정도 아니었고, 자식을 잃은 자의 슬픔이 배어 나오는 얼굴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소년의 교육이 실패했다고 느꼈으며, 그 처절한 실패야말로 희망의 반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에 일하기 싫냐고 묻던 직장 상사의 말에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을까요.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상대를 '악'으로 규정해야만, 자신을 '선'이라 믿고 자족할 수 있는 이들의 근본 감정은 "원한"이고, 그것은 언제나 반작용에 불과한, 반동적인 행위만을 낳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 타인을 부정해야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삶은 비극적입니다.
세상에는 참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참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역할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불공평한 일이죠. 참지 않는 사람들은 늘 참지 않고, 참는 사람들은 늘 참습니다. 참지 않는 사람들은 못 참겠다고 말하면서 안 참습니다. 그들에게는 늘 '참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는 사람들은 그냥 참습니다. 그들이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봐 주고 염려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입니다. 늘 참지 않는 사람은 늘 참는 사람이 참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합니다. 이 억울함이 이미 슬픔의 불균형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관계 안에서는 권력의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덜 사랑하는 사람이 강자,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됩니다. 게다가 사랑은 사회적 진공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권력관계가 사랑의 권력관계 속으로 삽입되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 경우 '덜 사랑해도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자명할 것입니다. 덜 사랑해도 좋은 사람은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상처와 고통의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네가 아픈 건 알겠지만 내 처지도 생각 좀 해줘, 라는 부탁에 오래 옹슬했습니다. 그 말이 무척이나 잔인하고 무신경하여 오래 곱씹어 보았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부정하여 버리고 나 원래 그런 사람인 줄 몰랐냐며 틀어져버린 관계의 책무를 오롯이 상대에게 떠 안겨 버리는 그 순전한 이기. 그러면서도 상심의 시간마저 허락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슬픔이 본인에게 헤살이 될까 근심하여 겉으로 힘든 티는 내지 말라며 지청구를 대던 그 압도적인 외상적 장면이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았습니다. 그러고선 고심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까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해질 수 있나, 하면서.
저는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말에 회의적입니다. 우리는 결코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합니다. 다만 가슴속에 품어 넣어두고 살아갈 뿐입니다. 박철관 감독의 영화 <달마야 놀자>의 한 장면이 문득 가슴을 잡아끕니다.
사고 치고 도망 다니다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산중 절까지 찾아온 깡패 일행과 그들을 몰아내려는 스님들이 큰스님의 주도 아래 대결을 합니다. 종목은 밑 빠진 독에 물 채우기.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고무신으로 구멍을 막아보려고도 하고 자기 몸으로 구멍을 메워보려고도 합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도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해 그만두려는 그때 깡패 두목이 꾀를 냅니다. 바로 항아리를 연못 속으로 던져버리는 겁니다. 항아리를 연못 수면 아래까지 누르자 마침내 밑 빠진 독에 물이 가득 차오릅니다. 며칠 더 머무를 수 있게 된 깡패들은 기뻐합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깡패 두목(재규)은 큰스님에게 묻습니다. "저희를 이렇게 감싸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 질문을 받은 큰스님의 대답이 죽비처럼 뒤에서 제 어깨를 내리쳤습니다.
재규: 저희를 이렇게 감싸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큰스님: 누가 누굴 감싸줘?
재규: 아니 스님께서...
큰스님: 아 그거야, 내가 낸 문제를 풀었으니까 더 있으라 그런 건데 누가 누굴 감싸줬다고 그래?
재규: 그래도 착하게 살라든지... 뭐 남들 괴롭히지 말라든지... 아무튼 원하시는 게 있으시니까 이렇게 감싸주시는 거 아닙니까?
큰스님: 그게 그렇게 궁금하냐? 그럼 너, 밑 빠진 독에 물을 퍼부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채웠어?
재규: 그건 그냥... 그냥 항아리를 물속에다가 던졌습니다.
큰스님: 나도 밑 빠진 너희들을 그냥 내 마음속에 던졌을 뿐이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저 정도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밑 빠진 독 한두 개쯤은 마음 한편에 던져두고 살아갈 수 있는, 그 정도의 깊이를 가진 사람.
그렇듯 언제까지고 내 마음속 한편에 밑 빠진 독으로 남아있을 그대에게 진언합니다.
변명하려고 쓴 글은 아닙니다. 나는 일절 잘못이 없고, 당신이 모두 잘못했으니 정죄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잘잘못을 따지며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판단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슬픔의 불균형에 맞서 약자의 진실에도 좀 더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해보았습니다.
단풍같이 작은 그 손으로, 새끼곰의 눈처럼 말간 그 눈으로 나를 그렇게까지 미워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 그 여리고 천진한 마음으로 부단히도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만 같아 짐짓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으려 입술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그 서툰 미움이 문득 서늘고 서운하여 손 끝에서부터 저릿하게 힘이 빠집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처 정리되지 못한 채 마음 뒤편에 남아있는 애증을 포함한 여러 감정들이 격렬한 미움의 형태로 표출되는 건 아닐까 한다고. 증오에서 무관심을 향하던 도중 어딘가에 서 있는 심정으로 돌이켜보자니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커져갑니다.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려는 당신의 마음가짐이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것은, 역시나 아무리 애를 써도 내면에 아름다움을 품고 사는 사람은 숨길 수 없는 태가 난다고,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에 못된 잡감을 불어넣은 게 꼭 나의 책임인 것만 같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사랑할만한 대상이 아니라면 그만 잊고 놓아주시길 부탁합니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오해합니다. 남들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그러곤 깨닫게 됩니다. 남들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제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다란 걸 깨닫게 된 순간, 역설적으로 우린 아주 조금 좋은 사람이 됩니다.
생각의 병목현상입니다. 떠오르는 단상들을 모두 꺼내 적으려니 글이 두서가 없고 뒤죽박죽이네요. 당신은 읽지도 않을 글인걸 알기에 마음이 가는 대로 써내리기로 합니다. 언젠가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부디 넓은 아량으로 제 과오를 용서해주길 바라요.
참조: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정확한 슬픔의 실험>. 김애란, <바깥은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