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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Park Jun 19. 2023

나아진다는 착각

짐종국 유튜브 채널에 배우 전소민 씨가 나와서 했던 말에 오래 마음에 감돕니다.

"어른이 된다고 다들 철드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요즘 느끼는 게 생각하는 것도 예전이 훨씬 더 어른스러운 것 같고 성숙했던 것 같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우리는 줄곧 과거보다 지금이 더 낫고, 또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기술의 발달이나, 그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로 우리의 삶의 질과 행복도가 높아질 거라는 셈입니다. 미국의 사회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이를 다르게 바라봅니다. 그는 저서 <엔트로피>에서 "역사는 진보한다"라는 전제를 통렬히 꼬집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유럽인들과는 달리 현대인들은 역사를 쇠퇴와 몰락이 아닌 창조와 발전으로 바라봅니다. 문명화와 현대화가 진행될수록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 안정되고 발전될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저자는 이를 열역학 제2법칙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과거보다 발전된 형태의 문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내야만 한다고. 결국 과학과 기술이 질서 있는 세계를 창조할 것이라는 가설을 반문합니다.


심리학자인 크리스토퍼 라이언도 <문명의 역습>에서 이 주장에 힘을 보탭니다. "문명이 막아준다고 하는 대다수 위험은 사실 문명 자체가 만들어내고 키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항생제와 관상동맥우회술을 업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우리 조상에게는 교통사고의 위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안전벨트와 에어백의 혜택을 내세우는 것과 같다. 우리 집에 불을 지른 사람이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왔다고 해서 고마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제러미 리스킨은 우리가 만들어내 버린 모든 것들이 과연 전보다 질서 있고 유용한 방향으로 흐르는지 질문하며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곁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이다. 시간은 한 방향, 즉, 앞으로만 흘러간다. 왜냐하면 에너지는 항상 쓸모 있는 상태에서 쓸모없는 상태로 움직여가기 때문이다. 이 방향은 또한 엔트로피 변화의 함수이기도 하다.

 - 제러미 리프킨, <엔트로피> p.74


그의 말마따나 시간은 비가역적(irreversible)인 것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요. 한 번 지나친 시간은 더 이상 다시 한번 더 마주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미처 지나간 줄도 몰랐던 시간들의 빈자리가 문득 체감될 때, 허비한 시간들을 되돌려보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속절없다는 깨달음에 체념합니다. 그 무력감에 가슴께가 얼얼해집니다.




최근 오래전 좋아했다가 한참 동안 듣지 못했던 노래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듣고 꽤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그때보다 더 어른스러워졌을까 하고 자문하면 대답이 망설여집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더 성숙한 사람이 되겠거니 하고 지레 믿었던 것은 제 착각이 아닐까 합니다.


어떤 것이든 깨우치기까지 채워야 할 분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응당 감내하고 견뎌내야 할 것들을 미뤄둔 채로 시간이 지났으니 삶에게 뭐라도 맡겨둔 것처럼 마땅히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치기 어린 마음이 또 있을까요. 시간을 들이고, 품을 들여야 깨우쳐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늘 조급한 마음이 듭니다. 시간의 흐름과 내면의 성숙이 비례하지 않는 것 같아 보여, 괜스레 초조하고 조마스러운 마음입니다. 자꾸만 요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쯤이면 어른이 되었겠거니, 성숙한 사람이 되었겠거니 하며 섣불리 믿어버리는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입니다.


듣다 보면 힘 빠지는 넋두리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렇든 저렇든 어떻게든 지나갈 시간이라면, 조금이나마 더 잘 써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계획한 대로,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타륜을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말자는 겁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더라도 살아지는 대로 생각해버리지는 않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가 '젊다'라는 말의 동사적 사용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수동적으로 적용되는 형용사 '젊다'가 아닌, '젊은' 일들의 성취를 통해 능동적으로 적용되는 형태로서의 '젊음' 말입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젊은것이 아니라, 젊은 일을 해야 젊다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만일 능동적으로 삶을 개선하고 완성시키고자 하는 분투 없이, 그저 남들보다 젊은 나이만 보고선 나중에 다 해결되겠지 하고 삶의 무게를 경시하는 이들은 라디오헤드의 노래에서처럼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겠지요. 




돈을 아끼려면 돈을 쓰지 말아야 하지만, 반대로 시간을 아끼려면 시간을 써야 합니다. 밥에 붙들려 꽃 지는 줄도 몰랐다던 김기택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자주 삶의 우선순위를 어지릅니다. 생계를 유지하려 삶을 쉬이 소비해 버리고선, 삶을 유익한 것들로 채워 넣는 일에는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돈을 위해 시간을 쓰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할 테지만 적어도 돈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 다르니까요. 남들보다 더 잘 사는 일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당연스레 성숙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수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p.214




참조: 제러미 리프킨, <엔트로피>. 크리스토퍼 라이언, <문명의 역습>. 김기택,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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