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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Yoon Sep 17. 2021

나의 자서전 - 2

뉴질랜드 이민 30년을  글로 씁니다.- 딸들을 위해

한국  떠나기 전   탈탈 털어  총  재산 정리해보니    뉴질랜드 달러로  약  $ 40,000  정도.      

전세금부터  적금 주식   퇴직금  다 합쳐서   말 그대로   탈탈 털었다.    

다 털어서 계산한 날  그날 밤  아이를  재우고  나오던  아내가  나 들으라며   혼잣말을 한다.   

“ 이제  정말  우리 한국 떠나는구나.   우리  앞으로  괜찬읗까…?     괜찮겠지?”

나는 태연한 척한다.  

” 앞으로  더  더   좋은 일만  생길 거야..”이라고   더를  두 번씩 넣으며  말을 했지만  

사실  나도  펼쳐질  앞으로의  미래가  어떨지  걱정에   두려움과  그 두근거림에   

아내처럼  나 혼자   자문자답을   계속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 출발 비행기표부터 구입한다.  어른 2 표에 유아 1표 

갓난아이가  너무 어린 탓도 있지만   현지  초기 정착은  여러모로  힘드니깐   

내가 한달 먼저 가서  집부터  준비해놓기로.

 “  먼저 가게 되면    그냥  대충대충  준비하세요   워낙  잘하겠지만 …”  라던   아내는 

나의  출발일 다가오면서  약간  구체적으로  말이  바뀐다.   

“  차부터 하고 나서    우리 세 식구가  살  렌트 집 찾고     그다음에  꼭  필요한 가전제품 준비해요”

“ 100일도  안된   우리 딸아이를  위해  카펫 냄새  전혀  안나는  아무도 살지 않은  정말 새집이면 좋겠어”.. 등등  주문  아닌  지시 (가)   많아졌다.       


하튼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주문대로   움직였다. 

우선  당장  내가 움직일  차는   중고차  $ 9000에  구입.  HONDA  Prelude  

문 두 짝에    뒤에  보조 시트 설치하면   아이가   클 때가지는   괜찮아 보였다.

렌트 집은   방 두 개에   주당  $170인데   완전 새집.   우리가  첫 손님.

그다음 날   주방에 들어갈   냉장고 위치를   줄자로  재고 나서   

가전제품들은   그냥   하루 만에  한방에  다 사버렸다.     

한국서  들고 온  전재산  현금은   거의 다 쓰고,   겁도 없이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온 건지.    

새로 출발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나의 짧은  영어로  괜찮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희한한 것은   

“  내가 돈을  내고  물건을  살 때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영어가 잘 통하는데   

물건 교환이나   환불 요청 시에는   영어가  전혀 안된다는 것 “     


한 달 후   뉴질랜드에   딸과 함께   도착한  아내는    중고차는  좀 못마땅했지만   

다행히   렌트 집은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당연하지.    새집인데. 

"  아이가 좀 크면    완전 큰집으로  이사 가고   그때   차도  당연히 큰 차로 바꾸자고..”

내가 호기 넘치게  하는  말에    아내도   조용히  수긍하는 듯하다.

어차피   ZERO에서  새로  출발하자고  같이  약속했으니...

-         그런데   당시  이 호기 어린   나의  약속은  10년이  안되어  지켜지게 된다.


정착 초기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비장한 각오를  했고 

-        어느 정도까지만  여기 살다가  가족만 남겨놓고  남자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들이 많았었다.      소위  기러기 아빠라고 들었다.      

혹시나  마음이 변할까 봐   나는   한국 여권도  찢어서  없애 버리려고  했다.

눈에 보이면   가고 싶을 테니.    해서  이곳 새로운   생활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기로 했고     

나부터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      글자 그대로   우리는  “ 이민”이었으니깐.


렌트 집에서.

밤에는  온  동네가  조용했다.   휘황찬란한   밤문화는  여기엔  없다.

쥐 죽은 듯이 사방이  너무  조용해  무서웠다    우리만  놔두고 다들 도망간 도시처럼.  

낮에는   푸르른  하늘색이  너무나  선명하게  청명하더니   밤에는  어릴 때보던   별이란  별은  전부다  선명하게  다 보인다.  그중에   남십자성은  가장 멋지다.   그러다가 동트는  새벽이 오면  그놈의  수많은  새소리 때문에  잠을  깨야한다.  푸른 깨끗한 하늘색과  밤하늘  수많은  선명한  별.  그리고   씨끄러울정도로   울어대는  수많은  새들..    이곳  첫인상은  그랬었다.   


내가 먼저 도착한  며칠 후    동네에서   크리스마스  산타  퍼레이드가 열렸다.    

더운 한여름 날씨에    산타 퍼레이드라고 하니    나에겐  매우  어색했지만.   

리카톤로드에    구경삼아 나가보니   양방향  큰 도로를  다 막아버리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오로지   아이들을 위한   이벤트였다.    이벤트  퍼레이드에 참가한   모든 봉사자 , 어른들이  모두 다  산타클로스처럼    아이들을 웃게 해 주려고   온갖  복장에   얼굴 화장까지 했다.

머리가 백발  완전 할아버지들이   산타 복장으로  다  모여서  군악대처럼   연주를 하는데 

그분들   진지한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이담에  나도 해봐야지. 이것.    

구경 나온  아이들을 일일이 다  찾아내어서   한명 한명  아이에게  사탕을  던져주고 

-어른에게는  안준다.  

사탕 받는  모든  아이들의   환하게 웃는  모습은   나에게  잔잔한 감동. 

“ 아이들을   웃게 하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어른들의  책임..”이라는  문구를 어디선가  봤는데

 언젠가  나의 딸도  이 자리에서  저 사탕을   받겠구나.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민 붐이  일어나면서   많은  한국분들이  들어왔고  서로가 외로운 마당에  자연스럽게  연락이 되어 

만나게 되고  특히 같은  종교 신앙을  가진 분들과  집을 돌아가면서  자주 모이게 된다.     

당연히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모여서  기도도 하고..

저녁식사도  모여서  같이하게 되고    먹고 마시고…. 등등   그리고  장어도 잡으러  같이  많이 다녔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 언제 도착하셨어요.?”    도착 날자순 서대로  기수처럼   선배 후배가 된다. 

“ 어느 지역에 사세요?..”   그 말은 방이 먗개짜리인지  새집인지  헌집인지 그러고 나서는

렌트인지  새집구입인지  이어지게 되고     

“ 학교는  어디가 좋은지,  새로운 동네는 어디인지. 등등 “

조금 더 친해지면..   

“  실례지만    한국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     했는지가  가장 큰  질문이고  큰   관심사. 

이제부터 진짜 핵심이다. 

“  앞으로   여기서  어떻게 사실  계획인지..?      

모두가  다 같이  고민해오던  내용이라  내가 아닌   다른 분들의  생각도 듣고 싶다

대부분의  대답은..

“정부가 주는  실업자 수당으로   버텨보면서  천천히 직장을   알아본다 “. 

“ 언젠가는 직장을 찾겠지만    당장 영어공부  나  현지 사회적응부터  해야 한다”이었다.

저녁식사도  모여서  자주 같이하게 되고   다들  한국서  이삿짐으로  가져온  소주와 함께

친하게 가깝게 지냈다.   또래 아이들은   한국 친구도 만들어주고.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현실적인 두려움에  남자끼리   소주와 함께  한숨도  많이 쉬었고  

서로 고민을 털어는데   대충  겉모양 고민들만  조금씩  풀어놓는다.

나 처럼 한국을  떠난 것만으로  그분들과는  같은 독립군 같은  동료, 동지의식이  생기고   

같은 가장으로서의  가족 책임감에  불안한 미래에 대한  같은 고민을 했을터.

서로 궁금한 것 묻고  답해주고  공유하고 그런다.  다들 이민은 처음이니. 

무엇을 위해  무엇을 이루기위해  이곳까지 와서  이 쉽지않은  도전들을  시작하려는 걸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도전장을  던지는 그들은  마치 전장에 나서려는 용사들 같았다.

-   30년이 지난 지금,  그분들  다들 원하던 그 꿈을 이루셨을까.     


이렇게  지속된   만남 속에   어느 날   ,

그날도   남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신나게  놀다가   잠든 아이를 안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당연히 운전대는  아내가 잡았고  -  나는  기분 좋게  소주를 마셨으니.  

딸아이는 내 품 안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허전함이  다가온다.     

독립군 동료와의   만남 자체에  내 마음속으로   점점 회의가   생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집사람 들으라고   나 혼잣말을   해본다.  의견도  들을 겸해서이다.

 “  야..  저녁마다   즐겁기는 한데…   당장  늘어야 할  영어보다도  나의  한국어 실력만   늘고… 

“  다들  현지 사회경험이  없으니   각자  추측만 하고 있고 “ 

“ 그들의  한국 이야기, 활약상까지   다  들어주어야 하고…  

“ 사실 우리 이러려고   비행기  14시간  타고   이곳까지  멀리   날라 온건  아닌데 말이야..” 

“  들의  최종 목표도   나처럼   현지에서  직장을  가지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은  서로서로가  

 경쟁자인 셈인데..   나랑   같은 출발선상에  서 있는 ”            

아내가  말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차가   신호대기에   걸리니깐   그때  휙  한마디 던진다. 

“ 안 그래도   자기한테  이야기 한번  하려고 했어.    너무 신나게 놀고 있어 지금. 

우리 은행 잔고가   얼마인지   알고나 있나 몰라 …   

말 나온 김에   우리 생각 좀 해 보자. “

역시나  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리 어렵지만    딸아이  돌잔치는  해주기로 했다.  

딸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주  아주 간소하게.

 약  50여 명  교민분이  우리 렌트 집에  다  오셨다. 

당시  이곳 한국 교민은   총 20여 세대.    이민 온 지     다들  10년 넘은 분들.    

식사하면서   나에게   질문이 온다.


“ 이곳에서  이렇게  어린 갓난아이  돌잔치를 보니   참  신기하네..”

“ 근데   이  젊은 부부가   여기서 도대체   뭐하면서  먹고살려고  왔는가..?

“ 예..  제가    빨리 일자리를   찾아  취직하려고 합니다.”

나의 대답에   식사하시던    여러분들이  한 말씀씩 하신다.     그분들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 뉴질랜드 현지인도   일자리가 없는데   나같이  영어 잘 못하는  아시안 초보 이민자가   

이곳 현지에서  일자리를 가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   

“ 이  어린 갓난아이를  보니  …. 참 진짜   걱정이 된다..  “   


걱정이 된다는  대상이  우리가  아니고  갓난 딸아이가  걱정이 된다는  말씀들이다.

젊은 부부가  정말  답답해 보이셨는 거다.


이곳에서   오래 사신 분들이   이런 말씀 하시니  

뒷정리를   하면서  아내랑  이야기했다.

“  아  일자리..  정말  어려울려나 … 

“ 어렵기는   진짜  어려운가 봐..  어떡하나..

“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그래도   안되면   그땐   정말  할 수  없는 거지만” 

아내에게   일단  안심시키는   말을 해놓고도   그날 밤   걱정이  밀물처럼  크게  밀려온다. 

점점 떨어지는  은행잔고 숫자가  나의 목을  계속  죄어오고 있었다.  


돌잔치   그다음 날부터   애초 계획대로   나는   일자리를   찾기에 나서는데 

첫 번째  시도는  현지 신문  The  Press을  배달시키고  매일  억지로 읽어본다. 억지로.

수요일 , 토요일마다  나오는  구인 광고란은  이잡듯이  읽어보면서  조사하고 공부했다.

이나라  고용주들은  어떤 사람들을 찾고 있는지, 어떤 타입의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 .. 

   


은행 잔고 $ 3,500 

일정 수입이 없으니  렌트 집 값으로    무섭게  돈이  빠져나갔다. 

계산해보니   앞으로   3달 이내로   반드시  일자리를 찾고 취직이 되어야만 했다.

설거지를  끝낸 후   아내가   조심스레 묻는다.   

“우리 은행 잔고가   $ 3,500 인데   우리   어떡할까    우리도  복지수당 신청할까?? “

드디어  그 질문이  왔다.  

같이  살아보니  아내의  이런 식 표현은   신청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니..   안 받을래.   그것  한번  받기 시작하면   계속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딸아이 빵 값  우유값은    우리가  책임져야지”  

잠시 후   무슨 소리하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이 왔다.  

우리가  책임지자는  나의  말에   아내도  생각이 바뀐 건지   

 “ 아….   그래 ….   맞아     그래..     우리는.. 받지 말자 “

“ 대신   내가 빨리 직장을  찾아볼게”

아내는  “    큰  걱정하지 마요..   나 액쎄싸리랑   집에 있던   안쓰는 인형들도    선데이 마켓에   가지고  

나가서  팔면 된다고  ” 

해서  나는  웃었다.    

돌 지난  딸아이가  우리 이야기를   알아들었는지   웃는 얼굴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 말은  사실이 된다.  

아내는  몇가지 본인  액쎄싸리류  와  아이의 지난  인형 등을   가지고  나가서  현금으로  팔고 왔다.

어떻게  영어로  의사소통이 되었는지  알수가  없다.     

( 딸들아,  니네엄마  이렇게  한번씩  용감하단다.)  


현지 사회에  빨리 들어가려면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직업을  가지려면 ,  영어는  기본이니  일단  제쳐놓더라도  ,  뭔가 남다른  스킬이  있어야  할 텐데.   

나는 어떤  스킬이 있을까.    성격이 급한  것이나    밀어붙이는  추진력 등은    스킬이 아닐 테니  제쳐놓고 보니   나는 일본어가  최대의  무기이었다.  

한국에서  일본인 회사 근무 시  매일 또래  일본인 동료들과   부딪히고    써우고   싸우다 보니

느는 것은   일본어  었다.  그들의  정확한  발음 , 액쎈트   좋은  문장 표현은  잘 기억했다가   

그날 밤   집에 와서   자기 전에  이불속에서   복사기처럼  100 %    그대로   흉내 내어보고   

혼자  발음 연습하고   따라 해보고   계속 외웠다.  

해서  나는  일본사람처럼  말한다. ( 이건  자랑질이다. 딸들아)  


이제 그  비장의 무기를  이력서에  추가하여   본격적으로  일자리  찾기에  나선다.    

쥐 꼬랑지 처럼  은행잔고가  자꾸 금방 없어져버리니   점점  아내는 불안한 모습이 역력한데

나는  다 잘 돨꺼야 라는 말만  계속 하고 있다.  왜냐면 나는  정말  자신 있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아예 포기하면 할수록  오히려  나는  들어갈  빈틈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날밤  밝고 선명한 그 별,  남십자성을  바라보며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한 말이다.       


       

 카메라사진 찍기연습  중 - 얼마전  - Mt Cook   New Zea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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