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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Yoon Sep 09. 2021

나의  자서전 -1

뉴질랜드 이민 30년을  적어봅니다.


뉴질랜드 이민 30년.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나의  30년 이민생활에  대해    글로  써보기로 했다.

갑자기는  아니고   항상 계속  생각해오던  일.

나의  자서전처럼 만들어서   두 딸에게   선물로  주기로  약속했다.     

첫째 딸은    6개월 때   한국에서  같이 데려왔고   둘째 딸은    8년 후  뉴질랜드에서 태어났으니 

본인들 의사를  묻지 않고  뉴질랜드에  데려온  셈이라.

이제 성인이 다된  딸들은,  아빠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한국에서  왜  이곳에서 와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약간은  궁금한 모양이다.        

해서  내가  한국어로   먼저 들면    영어 번역은   영어 잘하는   딸들이 하기로 하고

각자 한 권씩 보관하며   나의 장례식 때에  한 권은   관속에  같이 넣어주기로 약속. 



자서전..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만   쓰는 게 아니라    보통사람도  누구든지  쓸 수 있다… 라는  

딸의 이야기는    일리가 있었다.     또 조건을 단다.

아빠 마음에  있는   생각 그대로를    솔직하게  적어보는 것이   딸의  조건이다.    

누군가를  의식하지도 말고    Like 도  기대하지 말고

현재 코로나 상황으로  모든 게 다 막혀 있어  지금이  그나마  여유도 있고  30년을  기억해가며  

글쓰기에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는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다.  

한국에 살던  해외에 살던   인생 그 자체가  큰 도박이고 도전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기에   당사자도 힘들지만   이민은  모두에게  아픔을 주는 형벌이다.   

30년을  살아보니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많이  많이  힘들고  아프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인생이 단 한 번뿐이라면  한번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학연, 인맥, 부모님, 친지, 친구 …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한국에서의  계급장을 다 내려놓고    

ZERO에서 출발해서  맨땅에  헤딩하면서   나 홀로 일어서기를   시도, 도전해볼 수 있다는  것에  

아주 큰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생각한다,  

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나는  30년 전의  이민 결정에   아직까지는  후회한 적   없다.    



30년 전  어느 날.

뉴질랜드에서   젊은 이민자를  받기 위해   이민문을  열었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그날 밤  바로  결정했다    합격 조건을  대충 계산해보니 모든 게  충분했고   

이 광고는  뉴질랜드라는  나라가   나개인에게 보내는  초청장 같았다.

임산부 아내와   지하철 1호선 같이  손잡고 탔는데, 당시  지옥철,  구로역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집사람 혼자 강제 하차되는 것을 보고 …   나에게  한국은  아니구나라고  확신했다.

당시  회사 출장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일본을  다니면서  느낀  한국과  일본의  다른 점들은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고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한번 살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라고  

점점 생각하게 된다.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  

한국에서는   난  뭔가  잘 안될 것 같았고  나의  미래는   전혀 안보였다.

그  답답한  현실에  차라리  해외생활을   동경했는지  모른다.    

그때  마침   뉴질랜드라는  새로운 출구로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날 기회가  나에게  찾아왔다. 

그래 한번 해보자  과연  바깥세상은   어떤지 가보자.  




영주권 신청.

 10개월 임산부인   아내도  적극 동의했으니  일사천리로

서류 준비를 시작했다. 임산부는  피검사 면제라는  조항에  아내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주공사를  거치치 않더라도   뉴질랜드 대사관에  본인이  직접  접수해도 된다고  들었기에

나는 직접 대사관 접수로  결정    

어차피  모든 구비서류들은   내가  일일이  준비해야 하는데   

그리고   솔직하게  이주공사/이주업체가   하는  역할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가늠이 안 갔다.

내가  스스로 선택하면    나에게  모든  책임은 따르는 것이고.

이렇게   나 홀로서기  이민은  시작되었다.

영주권은  금방 나왔고    나는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 은  없었다.    

엄마배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즉시 떠나기로

빨리가서   다시시작하자.   어치피  고생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맞을 매는  먼저 맞고.  

그때 내  나이 29이었다.


내가 먼저  사전답사를 가서  렌트할 집들을  시작으로 기본적인  현장점검을   하기로 했다.

오클랜드  2박    크라이스트처치 2박 하면서   두 도시 중에서  선택하기로 했는데.

도시 전체가   영국 같은   분위기에  아담하고   이름도  예쁜   크라이스트처치로  결정.   

그  탁월한 결정으로   정확히 13년 후    나는   크라이스트처치의   지역구  구의원으로 선출되어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한국인 출신 정치인이 된다.    만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Avon river Punting , Christchurch  


공항 마중.

이민 첫날   현지 공항 도착 시    아무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다른 분들은   이주업체나  유학원,  여행사 등을   등을  통해서   현지 한국 교민과    

연락하여  미리 준비하시는 것 같았는데    나는  혼자서  직접  부딪혀 보기로 했다.   

당시 도착 공항에  누가 마중 나오느냐에 따라  성공 실패가 좌우된다고 하는 말도 있었다. 

내가 정답이 될수는 없지만   이민은   어차피   홀로서기이라 생각했고   

가장  큰 걸림돌은   현지 언어소통 , 영어인데   안 그래도  지극히  나의 짧은 영어로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가 피하지 말고   무조건  자꾸 해야만   늘지 않을까 라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놈의 영어... 

그 후부터  지난  30년 동안  지금까지  계속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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