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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Yoon Oct 01. 2021

나의 자서전 - 4

뉴질랜드 이민 30년을 글로  씁니다 -  딸들을 위해 

고마운 사람들 


Clara  클라라 

우리 렌트 집 바로 앞집 ,   나무 펜스로  경계되어있는 ,  그 집에   혼자 사는  노처녀인 Clara는   

바로 이웃집 사람으로   뉴질랜드에서 우리가  처음 만나는  현지인이었다.  

그녀에게도  우리는  처음 만나는   한국인. 

Clara는   펜스 위로   까치다리를 하고   “ 헬로 “라고 인사를 하는데   펜스 높이상  상대 눈, 코 만  보인다.  아내도  필사적으로  “ 헬로”라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었다.  그렇게  매일 마다   펜스 영어를 하다가  

답답한지  어느날   Clara  가 우리 집으로   갑자기  찾아왔다.   

손님이 찾아오고  집안 영어이니  약속대로   아내 담당이다.

대충 웃으면서  서로  이름 이야기하고   인사성 이야기만 하다가   손님은  일찍 돌아간 후 

아내는...  

 “ 도대체  재 발음  어렵네    입안에서  어영부영하게 굴리니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

 얼마 전  내가 했던 말   그대로   아내가  말하고 있다.    

 “  못 알아듣는 게 아니고   자기  영어실력이  달리는 건데….. 나처럼”

“ 그래도  자주 놀러  오라고 해야지.    한마디라도   듣고 말하는 게  어디야. 공짜로.”

“ 우리나라  커피 타 주면 좋아할까.?”  

아내  혼자서  뭔가 계획을  세우는 냄새가 났다. 


그 후  나는 출근하고 나면   집에는  하루 종일  아내 랑 딸 뿐이라   Clara는   오전 시간마다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아내와  대화를 했다.   아마  아내가  의도적으로   잘 꼬신 것 같다. 

옆집 새로 온 이웃이  아시안이라   뭔가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우리가 영어가 너무 안되니  

설명만 많이 하면서도  그녀도   답답해한  장면이 기억난다. 

렌트 집에서 2년 후   새로운 집으로  이사 나가면서  더 이상  자주는  못 보게 되었지만  

우리에겐   고마운 이웃이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에는  본인이  손으로  만든  카드를  

들고  왔었다.  해외생활 시  현지인으로부터  받는  크리스마스 카드의  숫자가  이민생활의  

성공 여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우리는 겨우 이제  카드 한 장.        





Auntie &   Grand Ma 

우연하게  어떤  한국 교민으로부터  소개받았는데   뉴질랜드인으로   엄마 와 딸  둘만 사는 집이었다.   

진저 고양이랑  함께.

이두 분과는   이민 정착할 때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까운  친척 저럼  지낸다. 

아이들은   그 딸을   Aunite라고 부르고  그 딸의  엄마를  Grandma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몇 년 전 노환으로  돌아가셨지만   우리 가족의  공식적인  Next of  Kin  이셨다.    

나의 두 딸들을   어릴 때부터  안아서 돌봐주었고   우리가 바쁠 때..

( 얼마 후  우리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정말 바쁨)  아무런 조건 없이   아이들을  돌봐주신  고마운 분.

영국에서 오신 분답게   아이들의   모든 언행, 행동에 대해서  매우 엄격하게 보수적으로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정을  보여준 분.    딸들에게   일주일 한 번씩  본인들 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며    식탁 에티켓부터  식탁의자에  앉는 법,  포크 나이프 잡는 법 , 음식 집는 법,  식탁에서  이야기하는 법- 모든 것을  

오리지널  영국식으로  가리키고 , 뉴질랜드 음식 만드는 법,   Oxford  사전  사용법 , 학교 숙제 까지.. 

전부 다  돌봐주신 분이다.   어떨 때는 상냥하고  어떨 때는 무섭게  아이들을 가르쳤고..

이곳에  친인척 없는  우리에게는  천사 같은 분으로   이민자이던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리킬 수는 일들을 모조리  맡아서  대신해주셨다.    

우리가  이곳 생활 경험이 없으니   모르는 부분도 있기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Auntie , Grandma 에게  

물어보면서  정답을 찾는다.   이곳에 완전한   “우리 편” 있다는 것만으로   많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된 것 사실이다.     아이들 학교  비상연락처로    Grandma를  등록시킬 정도로.   

몇 년 후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나 와  집사람이 공동으로 만든   유서 WILL  에는    아이들이  커서 성년이 될 때까지   혹시 우리 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  우리의    모든 재산 관리자로   Auntie를   

지명 명시할 정도이었다.  Auntie  랑  한국에  같이 가서   한국 구경을 시켜준 적 있는데  지금도  아내는  

힘들 일 있으면   Auntie에게  아주 만만하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정도이다.  

어지간한  친척 혈육보다  훨씬 낫다고   아내는  항상  이야기한다.  고마운 분들.      

우리가  복이 많은 것은  틀림없다.   특히 인복.


해외 이민생활을  할 때에    어린 자녀들에게  Next of  Kin으로    현지인 친인척을  만들어주는 것..   

매우 좋은 방법이었다.    나의 경험으로는.. 





맥주 한 병과   가계부  

딸아이가  조금 크면서   이젠 엄마와 떨어져   집 근처   유아원 Kindergarden에  보내게 되고

처음 떨어지게 된  두 여자는  크게 울었었다.   한 사람은  집에서   한 사람은  유아원에서.

첫째 아이이기에   엄마도  처음이라   서로 힘들었던 것 같은데.

큰딸아이는  갓난아기 때부터  매우 예민했다.  특히 소리에.   엄마손에서  내려놓기만 하면  아이는  울었고  잘 자다가도  아주 조그만 소리에도 깨어나 울었고   그래서 아이가 잘 때에는  아내의 요청으로  

나는 고양이처럼  집안을  걸어 다녀야 했다.  (큰딸.. 잘 기억해서 메모하거라)   

소리에 극히 예민하고  잘 울던  아이는  그 후  크면서  피아노를  시작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바이올린  장난감을 사다 주니  너무나 좋아했다.   해서  5살에  시작한  진짜바이올린.    

지금 독일에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각 나라를 순회하면서 들고  다니는  바이올린 프로가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딸은   “청음”  이  아주  좋다고 하던데    아마도  소리에 예민하고  크게  많이 우는 바람에 

귀가  확  열린게 아닐까...  나  혼자 생각한다.   아내는  음악천재라고  했지만.


오늘도   아이의  유아원 간   그 시간을 이용해    멍청하게 집안에서  울고 짜고 있는  아내에게  

잔화로  한마디  했더니 …………………………………….. 

며칠간 조용하더니   얼마 후   아내는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녹용 공장에  일자리를   찾아내고   

식당 종업원처럼   하얀 모자를  푹  덮어쓰고  고약한 냄새로 그  유명한  사슴녹용 털을  뽑는 일을  

시작했다. (딸들아..  너네 엄마.. 독한 여자 란다..)


첫 직장에서 월급이 나오지만   아내는 가계부를  썼고   그 가계부에서  절약하기에  가장 만만한 항목은   

나의 “맥주”이었다.   해서  한 달에  한병의 원칙….  은  몇 년간   계속 지켜야 했다.

또   자의 반 타의 반 ( 여기서  타 는 아내이다)  나는  부수입을 생각했고   결국 쓰리잡 까지 하게 된다.  

밤마다  교민 자녀들  집에 가서  일본어를  가리키다가  희망자가 많아져서  대학교 강의실을 

렌트하여  한국의 학원처럼  운영하기도 했고   학생 한 사람당 @$ 10을 받았는데 

강의실 렌트비를 내고 나면  그런대로  수익성이 좋았다. 

김치 깍두기를   집에서 만들어서   10조각 정도 넣고  조그만 비닐에 담아서 @$ 5에  팔았다.  

직장의 일본인 동료들의 요청으로 시작했는데   주문이 밀려들어 오고  꽤나  인기기 좋았다

시내  일본 영사관까지  배달했었으니   깍두기 장사는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세배 장사.      

큰돈을 번 건 아니지만   사업(?) 하는  방법을  연습해본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도이었다.       

해서  결국  우리 집은   포쟙 벌이( 정확히  내가 3  +   아내 1 )가  된다.      


“  그렇게  고생하며  돈 벌려면   한국이 더  나은데 …  “    걱정해주시던    교민 분도 계셨다. 

그분은  여유 있게  매일매일  골프를 하시는 분이다.   본인 스스로  풀타임 골퍼라고 했다.

글쎄 모르겠다. 

해외생활, 이민 와서    그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그  정답이   어디에  있을까.


포쟙 시작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렌트 집을 벗어나  드디어  우리 집을  사게 된다.    

둘째 딸은  이 새집, 우리 집에서 태어나게 된다.    

아내의   그 가계부 덕분이겠지만  (나의  한 달 한병 맥주 포함)  우리는  돈을 열심히 모았고  

두사람다   고정적인  일자리가 있는 것만으로   은행에서  돈을  쉽게 빌려줬다.     




나의  첫 직장에서   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가게 내  계산대(틸)가   일일이  손으로 찍던   수동식에서 

바코드식 컴퓨터로  변경되었다.  당시 직원들 중에   컴퓨터 영어 키보드에  경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서 단체손님 10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가게의  20여 대 가까운  계산대(틸)에서  나를  불렀고 

나는 해결사로  바빴다.  지금은  상식이지만   30년 전  당시엔   그랬었다.   

그땐    Key board  skill 이라고도  했으니.


1년 반 후   나는  이  Key Board skill 이  있다는  큰(?)  이유로   일본 여행사 , Japan Travel  Bxxxxx로  스카우트된다.  이력서를  내가  먼저  낸 적 없었고  찾아간 적도 없었는데   그쪽 매니저가 

나를  먼저  찾아왔다.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여행사로   내가  맡은 일은  Tour operator.   일본 관광객을 위한   남섬 여행  tour 일정표를   만드는 일.   

시간당 10불이었으니   월급도  $2이나  올랐지만   기념품 가게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던  내가  이젠  사무실내에서   내 책상과  내 의자가 있다는 점이  나를  기쁘게  만든다.

일정표를  만들고 나면   모든  Supplier ( 최고급 호텔,   최고급 식당 ,  activity 등)  전화해서  예약하고 

또 전화해서  재확인하고   또  하고   또  최종 확인하고..…

하루에   수십번 이상 해야 하는   전화 덕분에    손님을  최고의  왕으로  모셔야 한다는  그  치밀한 회사 

시스템 덕분에   엉뚱하게도   내가 그렇게 무서워하던   그  전화영어의  공포는   점점 없어지게 된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위해   전화영어 공부하면서   돈 까지  받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2년 후  나는   새로운 직장을  가지게 된다.    이번엔  항공사이다.   

크라이스트츠처치 공항에   첫 취항하는  항공사가   취항 준비한다는 소문에   

항공사 경력이 있는   아내가  이력서를 제출하고  인터뷰를  봤는데.

공항에서 힘든 일이 많으니   가능하면  남자를  찾는다고  했다. 

아내는   나 이야기를 했고   그쪽에서 당장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엉겁결에 취직이 되었다.    

내가  현지 여행업계에  근무하고 있고   영어, 일본어, 한국어 가  가능하다는 게   이유이었다.    

직급은   공항에서   Assist Manager.   월급은  이젠  시급이 아닌   연봉 $ 30,000이다.   

(  나는  직급 타이틀이  맘에 들었는데    아내가 제일 좋아한 부분은  “연봉”이었다.)          

합격한 그날밤  나랑  아내 둘다  같이 울었다.   

또  기쁜 소식은  이제부터  맥주가  한주에 한병으로   업그레이드 됬다는 사실.     


한국에서의  항공사 경력으로   아내는  이곳  교민이  운영하는  “A”  여행사에서  취직된다.

교민을 대상으로한   한국행 항공권 예약판매.. 전문이었는데   매번 일 끝나고  저녁에 오면은

다니는  이  여행사가  좋고  마음에 든다며  계속 주절 주절 한다.


 “ … 이  여행사는   잘만 하면  돈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다고.   여기  사장님이 부럽다고 “

“ 근데   나도  정말  해보고 싶은데    이런 사업 “

“여행사  사무실도  예쁘고    이게   내 껏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노래를  계속 불렀는데….

나는   “ 우리가  사업할  돈이 어디 있냐.. 미쳤구나 “ 

그런데  그런데..   2년도  안되어   아내의  이꿈은  기적처럼  현실이 된다.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우리는  그  “A” 여행사를   갑자기   인수하게 되고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 




자원봉사 

항공사 직원으로  공항 내 제한구역에서   패찰을  목에 걸고   근무하다 보니    그중에는   이민관,  경찰 , 짐 검사  세관직원 등과  자주 만나게 되고   그들과  친한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한국에서 수많은 관광객과 새로운 이민자들이   도착했었고  이미 정착한  이민자의  가족분들이  친지 방문 형식으로  많이 들어오셨다.    정확한 언어소통이 필요할 경우 

통역으로  나는  계속  불려 다녔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한국어 통역시스템이 없어서    

밤낮 시간을  가리지 않고    내가 공항 근무 없는 날에는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그러다가   언젠부터간   시내에 있는  경찰서 본부에서도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 여기 건물 지하에는    Eye Watch라는   임시 감금 유치장이  있었다 ) 

이경우는   뭔가의 이유로   경찰서까지  동행한   한국분의   진술조서 작성을 위해서이다. 

특히 새벽 1시 ~  3시경   걸려오는  전화는   다 이런 경우이다. 

경찰서에서  전화 오면  무조건  뛰어나갔다.   특히 주말 밤에는   백발백중  전화가 온다.  

하루는  밤에 나가기 싫어서   술을 마셔서  운전을 못 한다고  핑계를 대니깐  경찰 순찰차가  우리 집까지 

나를 모시러? 왔었다.    

언어소통에  불편한   양쪽 모두를 위해   한국인으로서   통역 봉사한다는   단순한 생각만  했지만   

새벽마다 불려 나갈수록 …  오히려 나는  영어를  더 잘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그러다   시내 경찰서 내에   시민 자원 봉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경찰서에 나가서  Reception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이번은   한국어 통역이 아니라    경찰서를   방문하는 모든 일반시민을   위한  일이다.   

같은 근무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고    내가 가장 최연소로   당시 30대.  

그분들과  같이  일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영어공부가  더 될 것으로   자원했는데 

사실  기대치  10배 이상으로   나에게   공부가 되었다.   

경찰서 Reception에   아무도 없는 경우    틈을 타서   이야기를 계속  걸어오고   질문을 한다. 

어찌나  많은 질문들을  한꺼번에  하시는지…..  ㅎ ㅎ    

약간 친해지고 나니깐   그날 신문을  펼쳐놓고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신다.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는   그날 밤  집에 와서   저녁 TV 뉴스를 보면   그대로  다시  나왔고

그제야  나는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분들 덕분에   전혀 몰랐던   현지 사회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읽고 있는   Book List 도   넘겨받아서   나도  책을   읽어보는데   그중에  가장 좋았던  책이   “ Mao’s last dancer “이었다.    중국인 소년의  꿈과 야망에 대한  자서전인데  내가  처음으로  끝까지  

다 읽어본  영어책이었다.  


“ 아빠는  매주 토요일 오전에   도대체  어딜  혼자 나가서  오후에 오는 거야? “ 

 큰딸이 물어서    “ 경찰서에   남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원봉사하러  간단다 “라고 말하지만 

“ 경찰서에   아빠가  왜 가?   …..  뭐 잘못했어…?  “  

당시  어린 딸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남을  도와준다며  나갔지만  사실은  오히려  내가  더 큰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이 말은   딸아이가  한참 더 크고 나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매주 토요일마다  지역사회 Community 를 위한  무보수 자원봉사 했다는  뜻으로 

그분들  할머니 할아버지 들의 연대서명 추천으로  나는  평생 명예직인  Justice of the Peace (JP)로  선임되어   뉴질랜드 법무부로부터   임명장을  받는다. 

뉴질랜드정부가  검증하고  인증한  사람이 된셈인데  내 영문이름 끝에  JP  라는  공식적인 타이틀이  붙게된다.  당시  내 나이 43 세로  최연소 JP  ,   이민 온 지  13년째이었다.  

아내는  내가 죽고나면  묘지비석에 이름 과  함께 다 새겨준다고 약속했다. (딸.. 꼭 확인하거라)  


영어를 배울려고 우연하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내가  오히려  많은 분들로부터  큰 도움만 받았는데..

지역사회 Community 를 위한  자원봉사는  나처럼  영어 잘못 하는 사람도  언제든지 시작할수 있는  

정말 멋진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뉴질랜드에서  골프  못 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Sumner Beach  에서  사진연습중 ( Feb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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