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30년을 글로 씁니다 - 딸들을 위해
하루아침에 벌어졌다 모든 것이.
아내가 다니던 직장이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게 되었고 새로운 인수자를 찾아야 할 급한 상황이 되었는데 아내가 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유로 가장 최적임자로 거론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인수자금이 없어
포기. 그러자 갑자기 그 인수자금을 빌려주겠다는 분이 나타났고
(- 이유는 우리가 반드시 성공할 거라 확신하고무조건 투자한다고.. )
그렇게 해서 월급쟁이가 하루아침에 그 직장의 사장님이 되어버렸다.
평소 아내가 그렇게 해보고 싶다던 그 사업의 꿈은 정말 하루아침에 현실이 되었다.
인생에서 아주 우연하게 찾아온다는 딱 세 번의 기회 중 그 첫 번째 기회를 잡은 걸까.
나도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랑 같이 사업에 올인하기로 한다. 빌려주신 인수자금 돈을 3년 이내에
다 갚아야 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약속은 지켜졌다.
힘든 일 1
Chris “ 앤드류.. 미안하지만 너의 Cheque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네. 현금으로 준비해달라”
나 “ 뭔 갑자기 이런 경우 가 있나..?” 나한테 너무 심한 것 아냐..? “
Chris는 우리가 거래하던 도매상 , Wholesaler 매니저이다.
모든 거래가 체크 Chqeque로 통용되던 시기에 거래처로부터 갑자기 이런 요청을 받으면
정말 기분도 나쁘고 속상하다. 내가 서명한 체크 chqeque를 못 받겠다는 것은 나에게 신용이 없다는 것.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신용이 없다는 자체는 사형선고.
그럼에도 꼭 그들과 거래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들이 원하는대로.
그다음 날부터 꼬박꼬박 매일매일 아침 9시마다 큰 돈가방에 수만불 현금을 들고 결제하러 다녔다.
(- 전날 밤 아내랑 현금을 일일이 다 세어서 미리 맞추어야 하는데 우리가 같이 "돈 세는 소리"…
.... 이 세상 소리 중에서 가장 듣기 아름다운 소리는 바로 "돈 세는 소리"이었다....)
그렇게 1년이 넘고 나서야 나는 신용을 얻었고 Cheque로 결재하게 되는데
하기야 그들도 그 많은 현금을 일일이 세어보고 은행가 야한 일이 번거로운 일이 되었을 터.
그런데 이렇게 체크 Cheque로 마음고생했음에도 결국 얼마 후 내가 크게 당하게 된다.
아는 손님으로 받은 체크 Cheque 가 부도나는 바람에 만불 이상을 사기당하고
그리고 크레디트 카드 사기까지 겹쳐 몇만 불의 손해가 났다. 세상에는 심성이 나쁜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IMF까지 덮쳐서 이 손해를 메꾸기 위해 몇 년을 밤잠을 설치며 고민고민에 힘든 나날을 보내는데
아내는 계속 울고만 있었고.... 글쎄 .. 근데 운다고 해결할 게 없었다.
빨리 잊어버리고 울 수 있는 그 시간에 더 많이 벌면 되는 것...이라고 위로할 수 밖에는.
힘든 일 – 2
뉴질랜드 현지인으로 직원 한 명을 고용했는데 우리가 이곳 물정도 잘 모르고 영어도
잘 못하니깐 정말 우습게 보고 장난처럼 계속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나라 고용법이 무조건 일하는 사람에게만 유리하도록 되어있다고 해서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는데도
그 직원과의 계속되는 싸움 때문에 변호사 상담비만 생돈으로 만불 가까이 나갔다.
돈도 돈이지만 계속 싸우기 위해 허비되는 내 시간이 더 아까운데.
( - 근데 정말 아까운 돈이다. 안 나가도 되는 )
결국 그 직원은 그만두었지만 이나라 고용법, 아주 확실하게 공부했다.
레슨비를 크게 내고 배운 셈.
힘든 일 - 3
한국의 부모님을 나의 초청으로 집사람은 친언니 가족을 초청으로 이곳에서
같이 살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도 어리고 손이 가야 할 상황인데 우리가 너무 바쁘니 조금이나마 우리를
도와줄만한 인력이 필요했었는데 서로가 보는 눈높이 각도가 다 달라서 안타깝게도 그렇게 사이가 좋지
못했다. 초청받으신 분들은 우리가 이곳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판단해버리고 편한 마음으로
말 그대로 초청받았다는 개념으로 오신 것이었고 언어소통이 안되는데 대한 생활 불편함 등등이 점점
쌓여서… 서로에게 아쉬운 서운한 이야기만 나왔고 결국 그리 좋은 관계 정립은 불가능해졌다. 안타깝지만.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나의 판단 착오와 나의 잘못으로. 그렇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있었다.
한국에서 친인척을 초청하려는 경우 정말 정말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것도 배웠다.
사립학교
아이 둘 다 유치원부터 사립학교에 보냈다. 사립학교에서는 방과 후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도와주는 시스템이 있어서 우리처럼 바쁜 부모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선택이었다.
학비가 비싸지만 그만큼 아이들에게 혜택이 갈 것으로 아내는 생각했고 아내가 결정.
그래서 저금을 안 하는 대신 아이에 대한 투자라 생각하고 학비로 무조건 올인했다.
사립학교는 장단점이 있지만 다행히 딸들은 학교를 매우 좋아했고 “독립심” 과 “자부심”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하니 나름대로는 잘한 선택인데 근데 많이 비싸다.
한 놈당 일 년에 최소 3만 불이 드니깐 두 놈은 일 년에 총 6만 불.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 딸들아 잘 계산해보아라 총학비를…)
시장 확대
일본 직원, 중국인 직원을 고용하여 나라별로 시장 확대하며 적극적인 현지인 시장을 개척하여
15년쯤 후 우리의 사업은 년 매출 5백만 불을 찍고 뉴질랜드에서 전체 10등 안에 드는 규모가 된다.
한국 , 일본, 중국 아시안 시장을 꽤나 점유해나가고 있으니 소문을 듣고 관련한 모든 거래처 도매상 등에서 오클랜드에서부터 우리를 찾아와서 같이 사업을 해보자고 했다. 해서 우리는 시내에 중심가에 지점을
열고 본격적으로 현지인 시장을 공략하기로 한다.
다른 사업
부부가 같이 10년 넘게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장단점이 있었다. 집까지 포함하면 거의 24시간.
서로가 서로에게 잔소리하고 있는 상황이 계속된다. 해서 직원들도 여러 명 있으니 이제 나는 독립하여
나만의 사업을 시작하기로. 서로가 조금 떨어져 있어 보는 것도 서로에게 도움될 수도 있을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아내는 나의 이 제안에 아무런 말을 안 했었다. 그래서 밀어붙였다. 나의 독립을.
이민 컨썰팅,
당시 사업비자가 시작되면서 한국분들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나 개인 사무실을 차려놓고 이민법부터 펼쳐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의 영어가 딸리니 비서로 현지인 할머니 Marlene를
고용하고.(- 너무나 좋은 할머니이다. 전형적인 뉴질랜드인)( 나는 인복은 항상 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기…
내가 이민 심사관 입장이 되어서 신청자 케이스를 생각하는 방법으로 접근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내어보고 비서인 현지인 할머니의 생각을 더 추가하니깐 꽤 높은 비자 성공률을 가지게 되었다
(거의 90%)
더 좋은 사업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몇 날 밤을 고민 고민하며 사무실에서 지새우고
환경을 바꾸어본다고 갇힌 화장실, 건물 옥상에 가서 고민을 하여 아이디어를 냈다.
아마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불타는 황금의 열정의 시기이었을 듯.
몇 년 후 갑자기 영어시험이 추가되면서 손님은 다 없어지고 결국 문을 닫게 되지만
투자 대비 수익률이 매우 높은 업종이라 그동안 꽤나 많이 벌은 셈이다.
자신감이 점점 붙어 나랑 가장 잘 맞았던 업종이었는데.. 아쉽게도.
코로나 직전까지 한국 공무원 대상의 해외 현지 영어교육 사업도 괜찮았다.
캐나다, 호주, 영국까지 옮겨 다니며 각 나라별 문화 차이, 사업 환경 등도 배우게 되었고.
나라별 프로젝트가 계속 있었고 비행기를 장시간 오래 타는 것도 나름대로 노하우도 생겼는데
코로나 상황이 나의 모든 것을 강제로 스톱시켜버렸으니… 이것 또한 내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
딱 여기까지로. 여러모로 투자한 게 많았는데 손해는 많지만..
사실 나는 너무 달려왔고 이번 기회에 쉬어야 할 때로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하다.
과감하게 은퇴하자.
아직 빛은 많이 남아 있지만. 언젠가는 정리되어야하는 것들.
자서전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본 지난 이민 30년.
나는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쫓으면서 뭘 그리 고민하고 열심히 살아왔는지.
지금 이게 30년 전 한국을 떠날 때 당시 내가 애초 원하던 것인지.
나는 과연 무엇을 이룬 것일까.
지금부터 4년 전쯤
영국 런던에 신규사업 프로젝트가 있어서 가있는데 독일에 있는 큰딸이 런던에 연주회가
갑자기 생겼다고 해서 런던 시내에서 만나기로.
길거리 카페에서 만나서 둘이서 점심도 먹고 시원하게 생맥주도 한잔 할 기회가 생겼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딸아이가 Staff에게 메뉴 주문을 하는데
외모는 한국 아가씨처럼 생겼는데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 뉴질랜드 액센트 vs 영국 액쎈트 )
한참 웃었다 ㅎㅎ
그날 밤 뮤지컬 “ 라이온 킹 “을 같이 보러 갔다.
딸아이 3~4살 때쯤 라이온 킹 비디오를 자주 보면서 모든 대사도 다 외울 정도로 좋아했었고
나오는 모든 동물들 목소리도 기가 막히게 흉내를 잘 내던 아이이었는데
지금 다 큰 아가씨가 되어 나 옆에 앉아서 뮤지컬 “ 라이온 킹” 보면서 그 감동에 눈물을 보이고 있다.
6개월짜리 갓난아이를 뉴질랜드로 데려온 30년 전 그 옛날 생각이 나고
100 여 군데 내가 이력서를 보내던 그때 ,
인터뷰에 매번 내가 탈락하던 그때,
나의 모든 어려운 시점마다 이 딸이 나를 웃으며 쳐다보던 게 기억났다.
런던 Charing Cross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지며 급하게 뛰어가는 딸을 보면서
“이젠 너도 날개를 달았으니 더 큰 곳에서 후회 없는 멋있는 인생을 살았으면..”
“아빠처럼 너 인생에도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하게 오는 그 기회를 잘 잡아야 해 “
혼자 기도해 봤다.
자서전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본 지난 이민 30년.
나는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쫓으면서 뭘 그리 고민하고 열심히 살아왔는지.
지금 이게 30년 전 한국을 떠날 때 당시 내가 애초 원하던 것인지.
나는 과연 무엇을 이룬 것일까.
내가 혼자서 어떤 것들을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봤다.
영화를 한글자막, 더빙 없이 겨우 볼 수 있는 것.
번역 한글로 읽었던 영어책을 원본 영어로 다시 읽는 것.
세계 어디든지 혼자 갈 수 있다는 것 ( 영어권일 경우 ㅎ)
나라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조금의 여유.
끝.
딸아,
모두가 이야기하는 “이민의 성공, 해외생활의 성공 ” 은 과연 무엇일까.
사업으로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번 것.
집이 궁궐처럼 크고 으리으리한 것.
자식들이 엄청나게 잘되어 자리를 잡은 것.
글쎄다….
아빠 생각은 이렇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가 “남의 나라” 가 아니고 “우리나라” 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얼마 전 동경올림픽 TV 중계에서 뉴질랜드와 한국 경기가 있었는데 ( 럭비?)
옆자리에 있던 뉴질랜드 친구 Divid 가 나에 물어본다.
“ 너는 지금 어느 나라를 응원하고 있니 …? ”
아빠의 대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