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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다정 Jul 05. 2017

여성 디자이너 업적 아카이빙과 네트워킹의 필요성

90년대 숙명여대 광고를 통해 본 여성 디자이너 업적 아카이빙의 필요성






울어라! 암탉아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1997년 숙명 여대의 광고 이미지.


수수한 메이크업에 숏컷 헤어, 보통 선거 포스터 같은 데서 50대 남성 이미지와 함께 볼 수 있는 턱을 괸 자세.몸매가 드러난다든지 하는 소위 '여성성'은 거의 강조 되지 않은 이미지라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울어라! 암탉아."라는 카피인데 기존 관습에 반하는 파격적인 문구로 당시에 많은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는 말은 "여자가 큰 일에 나서면 안된다, 나라가 망한다." 라는 뜻이다. 실제로 작년 박ㄹ혜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때 이 말을 인터넷 상에서 정말 많이 볼 수 있었다. 대통령이라기엔 심히 의심되는 자질을 여러 번 보여서 닭ㄹ혜 라는 별명까지 있었기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이 더 찰떡같이 쓰였던 걸로 기억한다. 선출 당시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이 여기 저기에서 내세워졌기에이제 정말 '여자가 큰 일을 해도 되는, 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한 것처럼' (남성들 눈에) 보이는데도 일부 기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대한민국을 사는 여성으로서의 겪는 사회적 불합리함을 절대 마주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울어라! 암탉아."라는 광고 카피가 나온지 20년이 넘었고 '여성' 대통령도 배출한(...) 사회건만 어찌 여권의 현실은 과거와 크게 달라진 바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20년 전에 저런 카피가 나왔다는게 더욱 혁신적이다. 오히려 요새는 과거 숙대 광고처럼 여성을 당당한 능력, 의견 표출의 주체로 표현 하는 광고를 발견하기 더 어려운 것 같다.


또 재밌는 사실은 숙명 여자 대학교가 이 광고를 통해 97년도에 국내 최초로 대학생 홍보 모델을 내보였다는 점이다. 요새는 대학생 모델이 외모를 상품화 한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당시 숙대의 홍보 모델 선발은 이와는 분명 별개의 맥락이다. '외모(혹은 성)의 상품화'라고 하면, 이미지의 주 소비 대상과 반대의 성별을 내세우고 선정성을 덧씌우는게 보통인데 숙대의 광고는 이와는 전혀 다른 목적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국내 최초로 학교 홍보에 재학생을 내세울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신선하다.






국내 최초의 CI 디자이너는 여성이다


광고 이미지 아래의 텍스트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현대 무용계의 살아 있는 신화 홍신자

"디자인 불모지와도 같았던 시대에 CI 개념을 도입한 디자이너 구정순."

민항기 최초 여성 조종사 신수진...


디자이너인 내 시선을 사로 잡은 건 'CI 개념을 도입한 디자이너 구정순'이었다. 국내에 최초로 CI 개념을 도입한 사람은 숙명 여대를 졸업한 여성 디자이너였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디자이너는 늘 남성이었기에 저 문장이 주는 신선함이 컸다.


1983년 주식회사 금성의 CI, 당시 디자인을 의뢰했던 디자인 업체의 한국 지사장이 구정순 디자이너.


1984년 KBS의 CI.

구정순 디자이너가 설립했던 회사 'Design focus' 관련 아티클

<1> 디자인 정글 - "기업의 혈색 좋은 얼굴을 창조하는 CI 전문 회사"

<2> 한국경제 신문 - "디자인 포커스, 24년 내공의 국내 최초 CI전문회사"



내가 시각디자인 학부를 전공할 당시 같은 학번 여학생과 남학생의 성비는 9:1을 웃돌았고, 미대 전체 단과대를 생각해도 역시 여학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미대 학생 회장은 남자였고 교수진도 남자가 대부분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 내리는 '작업 잘 하는 디자이너'도 희한하리만큼 전부 남자였다. 그게 딱히 이상하게 생각 안했을 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6699press)> 라는 책을 보면 한국의 대학 시각 디자인과 재학생 성비는 여:남이 7:3으로 여학생이 역시 압도적이지만 주요 교육 기관 11개 시각 디자인과 전임 교수 중 여성 교수의 비율은 정확히 더 급진적으로 역전된다는 사실이 등장한다.


그래픽 디자인을 같이 공부한 대학 친구들 여러 명에게 국내에 최초로 CI 개념을 도입한 구정순 디자이너를 아냐고 물어 보았는데 예상대로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 역시 인터넷을 떠돌다 우연히 보게 된 한 광고 이미지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사실이다. 물론 구정순 디자이너 사례는 하나의 예시지만, 실제로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서 여성 디자이너의 업적을 남성 디자이너의 사례보다 떠올리기 힘들다. 여초 직군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디자이너들의 업적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는 알려질 업적을 남기기 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실에 우리가 의구심을 품는 것 자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이 오히려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성비 불균형과 여성 디자이너로서 겪는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글

<1> 여성 디자이너는 '미녀'일 필요가 없다.

구정순 디자이너의 근황 - 그녀가 설립한 경기도 양평의 뮤지엄에 관한 아티클

<1> 집 처럼 편안한 갤러리, '구하우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교류하기


여성의 직업적인 성취를 가로 막는 육아와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과 유리 천장 등은 여초 직군인 디자이너에게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문제 자체만 놓고 보면 워낙에 방대하고 복잡하며 고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지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의외로 간단한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우선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어 이거 아니지 않나?"하며 문제를 인식하는게 아주 중요한 첫 걸음이다.


그 다음엔 같은 문제 의식을 공유하는 '우리'엔 누가 있는지 찾아 나서자.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닌 만큼 같은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아주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믿는다. 나의 경우에는 이같은 문제에 대한 관심의 시발점은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책이었고, 책을 다 읽고 나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 후에 책 밖으로 나와 디자인, IT 등 나와 겹치는 업계의 '전문직 여성'들의 네트워킹 행사에 찾아가기 시작했다. 올 해 3월엔 'Women Techmakers 2017', 5월엔 '여성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 WOO'에서 연 네트워킹 파티 'WOOWHO' 에 다녀 왔다.


횟수로 따지면 네트워킹에 많이 참여한 편이 아니지만 단 두 번의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서도 나는 여성, 디자이너로서 앞으로 나아갈 길에 정말 많은 동기 부여을 받았다. 행사에 가서 내가 무언 갈 직접 Doing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가서 다른 사람들이 여성 디자이너로서 어떤게 불편했고, 그래서 지금은 어떤 마음 가짐인지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그냥 디자이너로서 어떤 작업을 하는지 눈으로 열심히 봤다. 그렇게 서로 공간을 통해 인사하고 우리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되는 걸 느꼈다.



사진 출처 : 여성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 WOO 페이스북 그룹


앞으로 이런 여성 디자이너 네트워킹이 더 활발해지길 바란다. 내가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디자이너 사례로 말했지만, 모든 직군에 이런 여성들만의 모임이 많이 생기길 바란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멋진 경험을 많은 여성 직업인들이 겪어 봤으면 한다.


우리는 자꾸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힘을 받고, 동시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직업인들의 업적을 탐구하고 퍼뜨려야 한다. 그렇게 알려진 과거의 업적은 결국 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개인이 나아가는 데 힘이 될 수 있다. 내가 국내 한 여성 디자이너의 업적을 알게 된 계기는 인터넷을 떠돌다가 과거 한 대학의 광고 이미지를 본 것 이었다. 이처럼 여성 전문 직업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멋진 행보가 어딘가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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