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진 여행

혼자 발리, 넘어진 날 이야기

by 유다정

“잘 쉬고 오겠습니다.” 휴가를 알리며 회사 메신저에 인사를 남겼다. 열흘간 여행으로 혼자 발리에 갈 예정이었는데, 사실은 이 여행이 휴식일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휴가의 설렘과 별개로 집을 떠나는 건 수고스러운 일이라 충전보단 소모에 가까울 걸 알았다.


역시나 발리에 도착한 순간부터 휴식과는 먼, 동적인 하루가 이어졌다. 우선 한국에선 겨우 떠나보낸 여름이 돌아왔으므로 몸의 모드도 그에 맞게 돌려놨다. 매일 새로 먹는 고민과 이동하는 고민을 번갈아 했다. 아는 맛과 모르는 맛 사이에 고민하며 주문하고, 오토바이 같은 낯선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지금껏 자동으로 해왔던 일상의 방식을 깨부수고 다시 익히며 성취와 효능감도 느꼈다. 처음엔 ‘혼자서도 잘해요’ 컨셉인 줄 알았지만, 돌아보면 수많은 이들을 거치며 '키워진' 날들이다.


Canggu, Bali ©️유다정


발리에 온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작은 사고가 있었다. 여행의 수고스러움에 익숙해지며 긴장도 함께 풀렸나 보다. 우붓이라는 동네에서 한 번은 크게 넘어졌다. 발리는 인도 상태가 좋지 않아 여기저기 턱이나 구멍이 많다. 항상 주의해서 가야 하는데, 그랩 오토바이를 부르려고 핸드폰을 하며 걸은 게 원흉이었다. 말 그대로 자빠지면서 턱이 까졌다(와중에 핸드폰을 사수하려 팔을 번쩍 든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몸을 어질어질 일으키는데 허벅지 위로 피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뒤에서 걷던 외국인 부부가 놀라 달려와 부축했다. “알유오케이?” “암오케이..(낫오케이)” “유아블리딩…” 부부가 휴지를 꺼내 얼굴을 닦아주고 남은 휴지는 가지라며 손에 쥐어주었다. “땡큐 땡큐... “ 고통과 놀람, 당황스러움이 뒤섞이는 와중에 그 부부가 정말 고마웠다.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피가 쉽게 멈추지 않아 결국 관광 도중 병원에 갔다. 여행 카페에 누군가 올린 병원 정보를 찾았는데, 있었던 곳과 가까워 왓츠앱으로 연락하니 바로 답이 왔다. 대기 환자가 있어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만 답장을 빨리해 준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병원은 내가 알던 병원보다는 좀 더 우리나라 주민센터 같은 아담한 느낌이었는데 깨끗하고 환했다. 간호사가 간단한 처치를 해주고, 곧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주렁주렁 두른 젊은 남자가 “암어닥터”하며 들어왔다(가운을 입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으면 의사일 줄 몰랐을 거다). 상처가 깊어 꿰매든지 붙이든지 하라 하는데, 느낌상 꿰맬 것까진 아닌 듯했고 그도 동의하는 것 같아서(?) 의료용 테이프를 부착하는 치료를 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의사일 거라 믿는 사람에게 구멍 난 턱을 맡기고 누워있는 경험이 생경했다. 아무리 돈을 주고받는 의료 서비스라지만, 낫게 해 줄 거라는 믿음만으로 타지의 낯선 이들에게 이렇게 한 번에 몸을 맡겨 버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병원이 너무 시원하고 쾌적해서 여기 그냥 계속 누워있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병원을 나설 땐 사용했던 약품을 챙겨주는데 묘하게 기념품 같기도 했다.


Canggu, Bali ©️유다정


너무 수고스러웠던 이 경험의 끝은, 아이러니하게도 '평화'였다. 낯선 동네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나의 상황이 받아들여지고 도움을 받는 과정 속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돌아보면 이전에도 해외에서 가끔씩 꼭 사건사고가 있었다. 독일에선 핸드폰을 도둑맞아 경찰서에 갔었고, 필리핀에선 ATM이 돈을 먹어 은행에 간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결국은 어떻게든 해결이 됐고 도와줄 거라는 믿음만으로 낯선 이들에게 의지했다.


할 수 있다는 자기 신뢰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몸을 실었던 수많은 오토바이, 방 열쇠가 없을 때 도와주던 도미토리 룸메이트, 떨어뜨린 에어팟을 주워준 사람, 가방을 열려던 원숭이(…)를 쫓아준 관광객들… 스쳐 간 이들이 열흘 동안 나를 키워준 것만 같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낯선 곳과 사람의 온 도움이 없었다면 마무리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신뢰로 완성된다. 낯선 이가 건네는 커피에 독이 없고, 길을 건널 때 저 차가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당연한 신뢰를 지구 다른 편에서도 확인한다.


탄 얼굴과 수많은 모기 자국, 멍들고 까진 턱과 함께 여행이 끝났다. 여러 날 중에 아름다운 수영장에서의 맥주 한 잔이나 눈부신 일출, 황홀한 일몰은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었다. 하지만 그보다 마음에 새겨지는 건 여행의 수고로움과 긴장으로 확인한, 타인과 세상에 기댈 수 있다는 안도감이다. 그렇게 앞으로도 나를 키울 사람이 있음에 안도한다.


2025년 10월 발리 여행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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