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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Dec 31. 2020

(16) '척'을 줄였더니, 살기가 편해졌다

결혼식을 앞두고 청첩장을 주문할 때가 생각난다. 문제는 혼주의 이름이었다. 돌아가신 분은 빼고 살아계신 분의 이름만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라 했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넣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고(故) 자를 앞에 넣어서 청첩장을 주문하려 했지만, 보통은 넣지 않는다며 다들 말렸다. 망설였다. 그러다 내 돈 내고 주문하는데 뭔 상관이야 하며 고집을 부렸고, 고(故)자도 빼 버렸다. 어머니 아버지의 이름 둘 다를 넣어 청첩장을 주문했다. 

청첩장을 받아든 아버지가 몹시도 화를 내셨다. 이렇게 만들어 주변에 나누어주면, 이 청첩장을 받은 아버지 지인들은 아버지가 새 부인을 맞은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던 나였지만, 아버지의 입장만은 이해가 됐다. 내 고집 때문에 없는 '새 부인'이 생길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위해 고집을 꺾었다. 어머니 이름을 빼고 아버지 이름만을 넣어 100부 정도를 추가 제작했다. 당연히 청첩장은 엄청나게 남았다.


왜 그랬을까. 당시에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의 이름을 넣고 싶다고 '있어 보이게' 주장했었지만, 솔직히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티 내기' 싫었었다. 친한 지인들은 모든 사정을 알고 있으니 상관이 없었지만, 회사에 청첩장을 나눠줄 생각을 하니 문득 걱정이 됐다. 어머니의 빈 자리를 감추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같은 사적인 문제들을 티 내지 않고, '밝고' '화사하게' 넘어가고 싶었다. '별 문제 없는' 가정에서 자란 '별 문제없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어서 아등바등 용을 썼다. 지금 돌아보면 스스로가 잘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당시의 나는 몹시도 진지했다. 중요하지도 않은 청첩장 이름에 목숨을 걸 만큼, 스스로를 '괜찮은 척' 꾸며내느라 바빴다.




결혼생활이 한창 힘들 무렵에도 연기하려 애를 썼다.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살다보니 연기의 영역이 점차 넓어졌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괜찮은 척', '쿨한 척' 연기를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다들 잘 사는데 나는 이게 뭐야'라는 문장에 빠져 열심히도 비교를 해댔고, 그 비교를 들키지 않으려 '괜찮은 척' 노력했다. 현실은 시궁창이었어도 열연을 펼쳤다. 힘들다고 말은 하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뭐 그렇지", "결혼생활이 다 그렇지", "워킹맘이 다 바쁘지 뭐" 하는 문장들 속에 나 자신을 구겨 넣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들 잘 사는데 나는 이게 뭐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발설하는 순간, 내가 서 있는 무대가 무너지고 나도 무너진다고 믿었다. 죽는 게 낫지 않냐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날들에도 '나 괜찮은데', 'I'm OK'를 남발하고 다녔다.

다른 이들의 눈에 내가 딱하게 보이는 게 싫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낫잖아, 저 사람보다 내가 괜찮은 상황이잖아' 라고 누군가가 생각할까봐, 문장 속 딱한 '저 사람'이 내가 될까봐 두려웠다. 비교의 저울 위에 끊임없이 나 자신을 올려놓고 내려가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다. 삶의 모든 순간이, 저울 위에 서 있는 듯했다. 내가 딛고 있는 이 자리가 남들보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싫어 아등바등 용을 썼다. 스스로가 만들어 낸 '비교'와 '평판'의 말들이 주변을 숨막히게 감싸고 있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연기 뒤에 쪼그라들어 있는 나 자신을, 한밤중에 꺼내보곤 했다. 아무도 몰래 나한테 말을 걸었다. 

"너 괜찮니?"

괜찮은 척 하는 껍질 뒤에 웅크리고 숨어있던 나는 늘 지쳐있었다. 너무 힘들다고 눈물을 흘리다가도 돌변해 스스로를 다그쳤다. 왜 그렇게 예민해, 다들 이렇게 사는 거야, 울지마, 울면 괜찮은 척도 할 수 없게 되잖아, 다들 불쌍하게 볼 뿐이라고, 강해져, 약해지지마- 자아가 쪼개진 듯, 울다 다그치다를 반복했다. 그 내면의 싸움에 지칠 때쯤엔 술을 찾았다. 술에 취해 잠이 든 것인지, 피곤해 잠이 든 것인지 스스로도 모를 정도의 상태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또 벌떡 일어나 열연을 펼쳤다. '이 정도면 괜찮아 보이겠지? 괜찮아' 하며 사람들을 대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너지는 건 혼자서 하면 될 일이었다.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울부짖으며 망가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내가 슬픈 건 어차피 다 알테고 굳이 눈으로 확인시켜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시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아버지가 오래 병원에 계셔서 각오는 하고 있었어요" 따위의 말을 뱉어댔다. 진심으로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각오가 현실이 되었을 때의 느낌은 또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부분은 숨겼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눈물이 터질까봐, 숨기고 또 숨겼다. 남들이 '어우, 쟤는 어떻게 살아', '쟤보단 내가 낫지' 할까봐 버티고 또 버텼다.




내가 조금 달라진 건, 저울 위에서 뛰어 내려야겠다 생각한 건, 참으로 안타깝게도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었다. 모든 상황들이 솔직할 수밖에 없도록 나를 몰아갔다. 이혼을 결심하고 나니, 모든 상황들을 지인들에게 가감없이 말해야 했다. '이러저러해서 너무 힘들었어', '이런저런 상황들에 죽을 것만 같았어'. 조금씩 조금씩 말을 하다 보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높게 쌓아 물을 막아놓은 둑에서 돌 몇 개를 끄집어 내자, 한 순간에 와르르 높은 둑이 무너져 버렸다. '에라, 숨기긴 뭘 숨겨! 나 힘들어! 다 알아버려라!' 하는 마음이 들었달까. '사실은 그때 말이야' 하며 과거를 소환하고 또 소환할 만큼, 쌓이고 쌓인 것들을 하나씩 털어놓았다. 그리곤 깨달았다. 비교가 참 부질 없구나. 나를 다독이며 같이 울어주는 지인들을 보며, 저울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쓰며 질질 거렸던 것도 많은 도움이 됐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친한 친구들에게 알렸다. 혼자 조용히 해도 될 걸 왜 알렸을까. '나 이런 거 한다' 뿜뿜 자랑하고 싶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저 말로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달라고 괴롭히고 싶었던 것 같다. 오프라인에서 질질 거리는 것으로도 미안한데, 온라인에서의 질질거림도 좀 봐달라고 그들을 불러댔다. 한밤중 감정과잉 상태로 엉엉 울며 글을 쓰고 '발행' 버튼을 눌렀고 다음날 아침에 보면서 이불 킥을 하며 부끄러워했다. 그럼에도 친구들이 괜찮다 다 털어놔봐라 오프라인으로 응원을 전해왔다. 온라인에서도 응원을 받았다. 그래서 더 밑으로 더 밑으로 내려갔다. '숨기지마', '다 털어놔버려' 하고 스스로를 긁어댔다. 나름은 공개된 장소에서,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던 일들을 문장으로 옮겼다. 글빨의 부족함으로 실제의 감정보다 '더' 진지하고 '더' 심각한 상태의 글들이 계속 발행되고 있지만, '어쩌겠나, 이게 나인 걸' 하며 떠오르는 것들을 마구 써댔다. 


그런 시간들이 흐르고 나니 좀 편해졌다. 공개된 장소에서 '돈 없어요'를 외치고 나니, 더이상 있는 척 하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저 부모님 다 돌아가셔서 되게 슬퍼요' 외치고 나니,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즐거운 일을 좀 써봐" 친구가 말을 하면, "삶에 즐거운 일이 없는데 어쩌냐" 하고 웃으며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안 즐거운 오늘이라도, 과거 회상에 빠져 감정폭발로 슬퍼져도, '오늘은 내가 이렇구나' 하며 조금은 지켜볼 수 있게 됐다. '다들 잘 사는데 나는 이게 뭐야' 하다가, "이게 내 삶인 걸 어쩔 건데. 받아들여" 하게 됐다.  


그 모든 '비교'와 그 모든 '척'들을 한 번에 내려 놓을 수 없다는 것도 많이 느낀다. 어제는 '괜찮네, 편하네' 하다가 오늘은 또 '아직 멀었어' 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세상 천지 부러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그럼에도 '아, 부럽구나' 하고 말아버리려 애쓴다. '저건 저 사람의 삶, 나는 내 몫의 삶을 살자'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아무도 관심 없는 무대 위에서 혼자 열연을 펼쳤던 나. 관객도 없는데 연기자만 혼자 방긋방긋 웃는 '무서운' 무대를 이제는 벗어나려 한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어차피 비교 자체를 안 할 수는 없을 거라고. 나도 남들도 마음 속에 비교 저울은 모두 가지고 있다. 끝없이 비교는 하겠지만, 남들의 비교 저울에서 내가 어디에 있든 신경쓰지 않고 싶어졌다. 내 마음의 저울에서 '나 이 정도면 괜찮은데 뭘' 할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엄마, 오늘 7살 친구가 왔는데 걔는 쉬지도 않고 일단 뛰기를 할 수 있어. 나는 못하는데. 3학년 형아는 사부님이 이렇게이렇게 줄을 돌려서 넘는 거라고 가르쳐 주니까 한 번에 쉭쉭 넘어버렸어. 나는 못하는데."

태권도 학원에서 줄넘기를 배우기 시작한 8살 아이가 매일 "나는 못하는데" 노래를 불렀다. 나를 그대로 빼닮아서 운동 신경이 없는 걸 어쩌겠나 싶지만, 아이에게 '포기해버려. 줄넘기 못한다고 사는 데 지장없어' 할 수는 없었다. 

"왜 남이랑 비교를 해. 너 처음 학원 갔을 때 줄넘기 하나도 못했잖아. 지금은 20개나 할 수 있잖아. 그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는 건, 니가 잘하고 있다는거야. 알겠어?"

말하고 나니 좀 멋있게 말한 것 같았다. 얼. 

그래. 과거의 나보다 점점 더 좋아지면 되는 거지. '현재의 남들과 비교해서 뭘 어쩌겠다고' 생각하려 애쓴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나한테만 집중하려 애를 쓰니, 많은 것들에서 편안해짐을 느낀다. 


혼자 생각하면 될 걸 왜 이리 '발행'하고 난리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주절주절 글로 써두면, '제'가 기분이 좋그든요. 흐흣"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과거의 나는 못 그랬지만, 미래의 나는 그럴 수 있길. 흐흣. 


끝났다! 2020! 꺼져라! 2020! ............. 그럼에도, 올 한해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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