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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Apr 14. 2021

(20) 가사조사, 그 무관용에 대하여

잠을 설쳤다. 가사조사 날짜가 다가옴을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마음은 마음일 뿐, 일주일, 5일, 3일로 이어지는 머릿속 카운트다운은 멈추질 않았다. 가사조사를 이틀 앞둔 날, 아이는 남편집에 다녀왔고 건물 1층에서 스치듯 남편을 만났다. 이 정도 만남은 별 타격이 없었다. 카톡이 울리고 전화가 오면 심장이 '두근'하고 반응은 하지만, 이제 이 정도 두근거림쯤은 버틸만했다. 약속시간 직전까지 치고 올라오는 긴장감도, 아이를 데리고 후다닥 집으로 올라오면 빠르게 안정되곤 했었다. 


그래서 경계를 게을리한 것이 문제였을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아이가 쓰는 패드의 충전 단자가 고장 나 있었고 아이의 악보집을 보험회사 로고가 적혀 있는 것으로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됐다. 남편 차에서 내린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올라가려 서두르고 있을 때 남편이 말을 했다. 

"패드는 가사조사하는 날에 갖다 줘. 악보집은 그런 건 좀 사용 안 했으면 좋겠어."

분명, 별 말 아니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말들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말이 귀로 흘러드는 순간 나는 남편의 짜증게이지를 본능적으로 감지해 버리고 말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하면서 순간 멍해졌다. "어"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계단을 올라오는 내내 머릿속에서 윙윙 소리가 났다. 짜증게이지에 반응하는 몸이라니, 짜증이 났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지만, 여전히 멍했다. 아이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동안 쪼그려 앉아 기분을 다스리려 애를 쓰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남편이었다. 


"설명이 좀 부족했던 것 같아서"로 이야기는 시작됐다. "왜 짜증 낸 건데" 묻지 않았다. 말이 길어지는 것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니까. 그저 들었다. 전자기기에 대해서 너는 잘 모르니 본인이 수리를 맡기겠다는 이야기, 아이가 한창 남 눈치를 볼 나이이니까 '번듯한' 물건들을 들고 다니게 하라는 이야기 등을 들었다. 다 옳은 말이었다. 내 생각과 같았다. 안타까운 건, 남편은 내가 '별생각 없이' 패드나 악보집을 방치하고 있다고 '넘겨짚고' 있다는 것이었고, 나는 남편을 '짜증내고 있는 상태'라 '넘겨짚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 안타까운 건, 넘겨짚든 사실이든 이 대화를 빨리 끝내는 것에 내 모든 마음이 쏠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겨우 뱉은 말은 "나도 생각은 있어"였다. 거 참 밑도끝도 없는 말을 하고는 "끊을게"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참, 병신 같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싸움이 일어나기 20km 전쯤에서 돌아 나와 버리는 걸까. 막상 20km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건데, 혼자 감지하고 혼자 겁먹다가 혼자 말을 삼킨다. 싸움에 말리면 너무나 힘들어지는 걸 수년간 겪은 후 생긴 습관들. 잔뜩 레이더를 세우고 작은 낌새라도 보이면 바로 후다닥 도망치기. 이 행동 패턴이, 스스로도 한심했다. 왜 눈치를 보니, 왜 아무 말을 못 하니. 바보 같았다. 


전화를 하는 동안 심장이 뇌에서 울리는 기분을 느꼈다. 두근두근 말고 어떤 단어로 심장소리를 표현해야 할까. 펄떡펄떡- 둥둥둥둥- 심장이 뇌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아, 이것이 Drop the beat. 둥둥둥둥.  

통화를 마친 후 부엌 바닥에 그대로 누워 습습후후 숨을 쉬려 애썼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잖아, 다독이려 애를 썼다. 숨을 쉴 뿐인데 눈물이 같이 흘렀다. 신기한 일이었다. 늘 이런 순간엔, 호흡이 잘 되지 않는 순간엔, 호흡을 찾는 과정에서 눈물이 나왔다. 호흡과 눈물은 무슨 상관일까. 뇌 안으로 들어온 심장이 뛰놀면서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숨을 쉬며 울었다. 가사조사는,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가기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뭘 입고 가지 고민했다. 늘 입고 다니는 후드티는 너무 격식이 없어 보여서 일단 제외. 치마냐 바지냐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원피스는 너~무 여성적이어서 제외, 치마는 너~무 기니까 제외, 바지는 너~무 불편하니까 제외. 이런저런 이유로 다 제외하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사실, 그냥 가기 싫은 것이었다. 입고 갈 옷이 없어요,를 이유로 빠질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뭐라도 입고 가야 하니 다시 채비를 시작했다. 원피스와 치마는 혹시 쓰러질 경우에 대비해 제외했다. 남들 눈을 지켜줘야지 생각하며 바지를 골랐다. 바지 위에 이것저것 하나씩 올려보다 '가사조사 참여 의상' 등을 검색해봤지만, 역시나 검색되는 것은 없었다. 가사조사관이 좋아할 드레스코드 따위 알 방법이 없었으므로 '눈에 띄지 않을' 의상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왠지 눈에 띄거나 기억에 남거나 하는 부분이 없기를 바라게 됐다. 작은 단서 하나가 나에 대한 오해를 만들 수도 있으므로,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을 무난한 의상을 골랐다. 청바지에 검은 재킷을 입었다. 


가사조사실은 생각보다 좀 더 좁았다. 일반적으로 개인 사무실을 상상할 때 떠오르는 딱 그 정도 크기. 가로 세로 2~3m쯤 될까. 한 층에 여러 개의 가사조사실이 있었고, 조사날짜와 함께 장소까지 정해져 통보받았기에, 미리 지정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 한가운데에는 1.3m 정도 될 법한 길쭉한 하얀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중간으로는 코로나 19 때문에 설치한 듯 보이는 투명 가림막이 길게 올려져 있었고, 그 가림막 한쪽에는 컴퓨터 앞에 조사관이, 반대편으로 의자가 셋 놓여 있었다. 입구 쪽 의자에 남편이 앉아 있었기에, 가운데 의자는 비우고 창가 쪽 의자에 다가가 착석했다. 창문 쪽으로 최대한 붙어 테이블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머리를 풀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편 쪽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앉은 후, 머리카락으로 커튼을 치고 고개를 숙였다. 조사관의 얼굴은 모니터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조사관이 날 바라볼 때 모니터 위로 올라오는 두 눈만 보였다. 


조사관은 길고 길게 "왜 가사조사를 두 분이 함께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각자의 진술서는 이미 다 받았으므로, 각자 따로 불러 가사조사를 진행하면 그 진술서 내용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함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서로 기억의 차이를 짚어야 한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변호사님께 들은 내용과 달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2~3회 진행되는 가사조사는 '모두' 둘이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첫 조사만 어떻게든 버티면, 두 번째부터는 따로 진행이 될 것이라 '100%' 믿고 있었기에 맥이 빠졌다. 첫 조사는 2시간여 가량 진행됐다. 나머지 2~3회 조사 역시 3시간 정도를 예상하면 될 것이라 말씀하셨고, 이 가사조사 후에는 '조정 과정'이 수차례 진행된다고 알려주셨다. 와 정말, 지리멸렬. 싫고 싫었다. 그 모든 과정을 함께 라니. 

"저는 따로 조사받고 싶습니다"하고 뾰족하게 말도 해봤지만 또 길고 긴 설득이 이어졌다. "모든 분들이 다 불편해하시지만, 어쩔 수가 없고, 대부분 받아들인다"까지 이야기하시는 데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요지는, '함께 받으셔야 합니다'였고, 뭐라고 더 덧붙이기엔 '예민하네'하고 판단해 버릴까 봐 망설여졌다. 저 사람이 쓰는 조사서가 판사에게 전달된다, 100% 객관적인 입장이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고 만에 하나 내 이미지가 예민하고 까칠하게 보여져서 앞으로의 진행이 '불리'해지는 것이 걱정됐다. 그래. 참아보자, 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게 됐다. 


앞으로 진행될 가사조사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스크가 축축해질 만큼 눈물이 났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이 눈물은 대체. 하나에 들이마시고 둘에 내쉬고. 눈물은 참으면서, 숨은 잘 쉬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않고 질질 울면서 습습후후 거렸더니 "쓰러질 것 같으면 말씀해 주세요"하고 다정하게 말을 해주셨다. 세상에, 이런 스윗함이라니. 쓰러질 사람이 "지금입니다. 지금 제가 쓰러질 것 같습니다"하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정말?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부족한 거겠지 생각하려 애썼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아직 괜찮아. 들이마시고 내쉬고. 시간은 간다. 나는 조사를 받으러 온 것일까, 숨을 쉬러 온 것일까. 남편과 조사관님이 대화를 나눴지만, 귀에 잘 들어오진 않았다. 들숨날숨을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아 내 마스카라. 검은 눈물이 염려돼 할까 말까 망설이다, 좀 더 '생기 있어' 보이려 발라버렸던 스스로가 후회됐다. '다음엔 안 발라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음을 대비하는 스스로가 놀라웠다. 앉아서 질질 울면서도 '다음에 또 와야 함'을 받아들이고 있다니. 조사관님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키셨고, 나름은 애써서 말을 했지만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나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꾸준한 질문들은 양육권은, 위자료는, 양육비는 등으로 이어졌다. 이혼소송 전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글들을 보다가 "양육비도 필요 없으니 빨리 끝내고 싶어요"하는 사람들 글을 보면 안타까웠었다. "이런 바보!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아야지. 더 버텨야지!" 하며 낯 모르는 그들에게 훈수를 두곤 했었다. 하지만 조사실 안에서 나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조사가 빨리 끝날 수만 있다면, 모든 사항들에 다 협조하겠습니다."

나의 이 말은 또 어떻게 조사관의 기록에 남겨질까. 멍청한 답변이었겠지. 잘 알면서도, 정말 진정으로 '모든 조사와 조정이 빨리 끝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하겠다'하는 마음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은 꾸준히 이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 말을 했다. 

"이 정도 사안으로 이혼 판결이 날 것이라 절대 생각하지 않기에, 양육비 양육권 등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조사와 조정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 짐작됐다. 


정말, 결혼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다양한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사회에서 '제도'는 필요한 것이라 평생 생각하고 살아왔었다. 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테고, 그런 '나쁜 놈'들이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당연히 '법'으로 처리를 해야지, 하며 법의 필요에 대해 공감해 왔었다. 공동선을 위해 지켜져야 하는 것. 그것이 여태 내가 생각해 온 제도와 법이었다. 법을 거스를 마음조차 품어본 적 없는, 나름은 준법시민이었다.

 

하지만, 이 조사실에서 '결혼 제도' 그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됐다. 결혼을 왜 하는가. 사람마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이었던 것 아닐까. 이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이 제도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나는 결혼 초에는 정말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개인적인 선택을 되돌리는데, 제3자의 판단이 필요한 것인가. 사회 공동선을 위해 법은 있어야지, 맞아, 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계속 반발심이 생겼다. 이 사적 영역을, 제도라는 공적 영역에 넣어두고 어떤 판단을 누가 내려줄 수 있다는 말일까. 


나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내가 불편해서, 내가 힘들어서, 정말 숨쉬기가 어려워서 등등의 '소소한' 이유들을 꾹꾹 참아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잘못해서 이것을 참아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품게 됐다. 법 제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개인'의 불편을 참아내야 하는 상황. 당연하다 생각했던 명제였다. 당연하지. 사회 공동체가 우선이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조사를 받는 내내 이 결혼이라는 제도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근원적 의문이 생겼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결심했을 때는 제3자 누구의 판단도 개입되지 않았는데, 결혼제도를 벗어나려 하니 온갖 과정을 다 거쳐야 했다. 이 제도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사회? 그럼 나 하나의 이혼이 공동선을 저해하나? 누군가의 결혼과 이혼이 공동선을 해칠 수 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을 어느 정도 통제하기 위해 법은 필요하다 생각해 온 나는, 이 법이 나를 침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다. 내 개인의 감정은, 이 제도 안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소송에 뛰어든 것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내 행복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침해받고 있음을 깊게 깊게 느꼈다. 진심으로 법 따위 무시하고 '악악' 거리며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냥,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 행복은 무슨. 그냥 고통받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런 것을 헌법에서는 '행복추구권'이라고 명명하지 않았었나.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의 권리는, 법 앞에서 상처 받고 있었다. 






조사관이 조사가 끝났다고 말을 했지만 나는 먼저 조사실을 나서지 않았다. 미적미적 거리며 남편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뒤늦게 일어섰다. 남편은 "집까지 태워줄게"하고 권했고, 나는 거절했다. 복도 왼쪽으로, 복도 오른쪽으로 잠깐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조사관이 문을 열고 나왔다. 조사관 뒤를 바싹 따라 걷는데 남편이 전화를 하는 듯 뒤로 처지는 것이 느껴졌다. 발걸음에 속도를 높이고 뒤의 상황을 살펴보곤, 냅다 계단을 향해 뛰었다. 엘리베이터 앞은 위험했다.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 여자 화장실로 숨어 20분을 있다 나왔다. 문밖을 빼꼼빼꼼 살피며 종종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의사들은 종종 이런 식의 질문을 내게 던졌었다. 

"통증의 최고치를 10이라 할 때 지금 통증은 어느 정도인가요?"

병원에서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가 언제였더라. 아무튼 참 신박한 방법이라 생각했었다. '아파요' '많이 아파요' '저려요' 쑤셔요' 등 언어가 가진 한계를 명확하게 숫자로 치환하는 놀라운 질문법이었다. 


조사관 역시 '의지'라는 추상적 항목을 수치화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이혼을 하려는 의지가 가득 찬 게 10이라면, 어느 정도 의지를 가지고 계신 건가요?"

"10이요. 무조건이요."

10 안에 들어있는 많고 많은 사연들은, 10이라는 숫자 아래로 묻어 버리고 10을 외쳤다. 

이혼이 판결 날 때쯤엔, 이 많고 많은 이야기 역시 끝이 날 테고 내 정신도 좀 차분해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숫자와 결과를 향해 가는 과정. 많고 많은 사연들과 고통과 눈물은 다 그 결과 아래로 묻히게 되는 거구나 생각하게 됐다. 그 결과를 얻기 위해 '소소한' 고통은 참아내야 하는 것. 가사조사가 내게 가르쳐 준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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