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형 문장을 생각한다

한때는 딱딱이였던 이의 취향에 관하여

by 이림

연예인의 얼굴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 일, 여태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대단한 공주병이 아닌 다음에야, TV 속 연예인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다니. 심지어 상대는 남자 연예인이었다. 그 남자 연예인의 사진들을 찾아보며,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했다. 닮았나? 아니. 얼굴도 생김도 전혀 닮지 않았다. 다만, 그 사진 속 눈빛이 너무나 익숙했다. 감정이입을 심하게 해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눈을 보며 그 속에서 한때의 내 모습을 만났다. 주변의 불편함을 딱딱하게 모르쇠로 일관하면서도 못내 좌불안석인 마음, 그럼에도 무표정을 택한, 그 선택을 지켜내겠다는 의지, 그 괴리 사이에서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어색함. 그 모든 것을 사진 속 눈빛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는 건, 공감이라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나도 한 때는, 그런 눈빛으로 매일을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이 문장이 '있었다'라는 과거형이라는 사실이, 지금의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사람들은 알까.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과거종결형으로 끝맺음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남들은 알까. 남들이 아는 게 무슨 소용이랴. 지금 내 삶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건, 그 모든 일들이 과거로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과거. 지나간 일. 현재의 나로서는 꺼내어 보고 싶지도 않은 그 때의 나를, 연예인을 통해 만났다.

"니가 그렇게 웃고 다니면, 다 너를 우습게 볼 거야."

"왜 만날 너를 낮춰? 그러면 만만하게 보이는 거야."

"헤퍼보이는 거 몰라? 그렇게 보이는 게 좋아?"

"회사 사람이랑 왜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 니가 잘 몰라서 그런 거야."

"너를 사랑하니까 이런 걱정도 해 주는 거지."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니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잘 알만큼 친해? 뭘 했길래 친한데?"

이런저런 시간들 속에서, 나는 무표정을 택했었다. 누가 말을 걸어도 냉랭히 대했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으며, 차갑게 굴려 노력했었다. 내 원래의 성격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별 생각없이 친절한 모든 순간이 타인에게 '여지'를 주는 것이라는 그 주장에, 나는 나를 접어 넣었다. 스스로를 깎아내고 바꾸고 고치려 애를 썼다. 하루에 8시간은 머물러야 하는 회사에서, 나는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 시간들을 보냈다. 연애와 결혼을 거치며, 달라진 일상이었다. 회사 입구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밝았던 표정을 지우고, 아무 와도 어떤 관계도 맺지 않으려 애쓰며 지냈던 시간들. 지금도 문득 생각나는 그때의 나.






시작은, 사랑이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한때의 그 감정은 분명 사랑이었으리라. 서로 사랑하니 함께 즐거우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사람 마음이 다 비슷하다 여겼다. 그리고, 그가 다정한 순간순간들을 벅차게 즐기곤 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신경쓰는 모습들을 보며, 나의 부족함을 깨닫기도 했었다. 그리고 돌변. 온기가 따뜻했던 만큼, 혹은 따뜻했던 그 이상으로 돌변은 혹독한 경험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사람을 눈 앞에서 보는 충격은, 나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꾸준히 반복되는 온기와 혹독함의 급변은, 마치 냉탕과 온탕을 강제로 옮겨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곤 했다. 나는 그저 살아온 대로 살아갈 뿐인데,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내 세상의 온도가 급격하게 변했다. 혹독함이 싫었다. 싸움이 싫었다. 여전히 사랑에 빠진 상태였기에, 선택은 하나였다. 그의 기분을 맞출 것. 그렇게 하면, 따뜻한 내 세상도 지켜질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내가 원래 이렇게 화내는 사람이 아니야. 니가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거야.”

상대가 그렇게 말을 하면, 다 내 탓인것도 같았다. 내가 되먹지 않은 고집을 부려서 상대를 화나게 만들었구나. 내 주장과 감정이 100% 옳은 건 아니니까, 나도 주의해야겠다 생각했다. 본인의 주장에 100%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몇 %쯤 될까. 나는 꽤나 강하게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었으나, 그 주장 곳곳엔 허점들이 많았다. 내 삶에도 꼬투리 잡힐 만한 실수들이 잦았다. 내 상식, 내 사상, 그 모든 것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해? 니 상식이 법이야? 왜 니 주장만 내세워?"라는 질문을 마주하면, 바로 꼬리를 내리곤 했다. 그래, 지금 내 기분이 나쁜 만큼 상대의 기분도 나쁠 수 있잖아. 내가 또 내 주장만 펼쳤구나. 그렇게 내 주장에 대해 한 번 접기 시작하면 집중포화가 시작됐다. 기억의 오류, 생활 속에서 저질렀던 실수 등 모든 것들이 내 감정과 주장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어 날아왔다.


늘 문제는 나였다. 내가 그를 건드리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싸움을 줄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를 자극하지 말자. 모든 문제들에서 입을 닫으려 애를 썼다. 내 감정, 내 생각. 그것들이 문제라면 드러내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나 역시 언제나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니까, 주장을 줄이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살면 해결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래도 이어지는 꾸준한 싸움. 수년간 싸움을 반복하며 깨달은 것은, 사과를 해야 이 싸움이 빨리 끝난다는 사실이었다. 서로의 의견이 달라 시작된 싸움이었지만,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것을 빨리 시인해버리면, 2~3시간 싸움을 1시간쯤은 줄일 수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까지 생각 못했어. 미안해."

그가 기분이 나쁜 티를 내면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끝도 없이 검열했다. 상대의 기분이 상할 만할 일이 벌어지면, 그 한참 전부터 사과를 했다. 미안한데 뭐 좀 물어봐도 될까. 미안한데. 그날 야근을 하라는데, 정말 미안. 미안.

그저 사랑을 했을 뿐이었다. 싸움을 줄이고 싶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내 감정은 숨기고 습관처럼 사과를 뱉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흔한 노래가사처럼,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죽일 놈’ 같았다.


"사랑하니까 걱정돼서 그렇지."

"사랑하니까 이런 말을 해주는 거야."

"세상은 위험하잖아. 그 뉴스 봤어? 집에 있어."

"전에도 니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니가 잘못된 거야."

이 위험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사랑을 받는데, 나는 점점 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시간, 내 돈. 그 어떤 것도 내 것은 아닌 기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출퇴근길 음악 선곡 정도였다. 출근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일에 파묻혀 있을 때가 즐거웠다.

"어디야, 언제 와, 뭐해"

"사진 찍어 보내봐."

"옆에 앉은 사람 누구야."

"떳떳한데 왜 사진을 못 보내."

띠링. 폰이 울리면 심장이 울렸다. 화장실을 갈 때도, 무엇을 하든, 폰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됐다.

"뭐하느라 전화를 안 받아"

"카톡 보낸 지 한참됐는데 왜 확인을 안해"

"뭐하는데, 회사 맞아?"

"사진 찍어 보내봐."


그와 싸움인지 대화인지 모를 시간들을 보내려 마주 앉게 되면, 고개부터 숙이고 시작하게 됐다. 고개를 숙이고 그의 말을 들으며 검지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 손가락 위 피부를 긁어댔다. 그렇게 긁어대면 껍질이 벗겨졌고, 그 위를 손톱으로 누르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따가웠다. 그 따가움 위를 계속 긁으며 생각했다.

'반응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그저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손가락을 긁어대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마음도 누를 수 있었다. 그래도 끝나지 않으면 욱해서 내뱉곤 했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 대화를 좀 멈출 순 없을까? 어떻게 하면 이 대화가 끝날 수 있는거야?”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뭐가 그렇게 피곤한데?”

그가 화가 나 문을 닫고 나가면 진심으로 안도했다.

‘아, 끝났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점점 알 수 없어졌다. 뭘 그리 잘못했는지도 점점 알기 어려워졌다. 그저 상대를 피하게 됐다. 싸움만 피할 수 있다면, 정말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태로 사람이 변해갔다.






내게 별거와 이혼은, 나름은 혹독했던 자기 검열을 서서히 멈춰가는 과정이었다.

친구들과 흔히 했던 남편 얘기, 일로 만난 사람의 카톡, 회사 사람과의 대화 등 어디서 그의 레이더가 작동할 지 몰랐으므로 늘 모든 대화를 지워대곤 했었다. 지금도 습관처럼 카톡 목록을 정리하는 스스로를 바라본다. 집에 cctv를 달고, 녹음기를 사는 나에게 친구는 말을 했다.

“니가 좀 예민한 것 같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나도 안다. 하지만 평범했던 하루가 망가져버린 수차례의 경험을 하며, 조심이란 것을 과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어버린 나를 본다. 아니, 원래 예민하고 까칠했었다. 그 기질 위에 더해져버린 이상한 행동 양식들을 바라본다. 어디서부터 내가 잘못한 것일까. 어디서부터 상대가 잘못한 것일까. 10여 년의 시간을 싹둑 잘라, 잘못의 %를 나누는 일.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 상대탓을 하고 싶지도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상대탓만 하고 있던 시기도 다 지나간 느낌이다. 나는 그저 요즘, 내가 궁금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반응하는지. 자기검열을 멈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것은, 지금의 내게 꽤나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글을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감정을 확신할 수 없어서. 내 지나친 아집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몰라서. 내가 얼마나 그를 자극하는지 몰라서. 이 지독한 회피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몰라서. '그가 싫어할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서 글을 써대고 있는 것 같다.


겪어보지 않고 쏟아내는 조언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연예인 기사 아래에 달린 댓글들도 읽어본다. 다들 참 쉽게 말하고 쉽게 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의아할 만큼, 발화가 쉬운 사람들을 본다. 의아하지만, 그저 바라본다. 이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낸 그의 반응 역시 바라본다. 여전히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둘을 바라만 본다. 무책임한가? 글쎄. 나는 그저 받아들이려 애를 쓰고 있다. 나의 이상함을 받아들인다. 그의 이상함도 받아들인다. 쉽게 말하는 사람들도 받아들인다. 나는 상대를 이겨낼 힘이 없을 뿐이었고, 그의 사랑방식은 강했던 것 뿐이었다. 그 둘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조차 의미 없이 느껴진다.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닐까. 문제는, 그 방식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 상대를 바꾸겠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 모든 문제가 벌어지는 것 같다. 관심도 사랑도 표현방식이 적정선을 넘어버리면, 버거운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너 참 답답하다',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 '니가 그렇게 답답하게 구니까 이렇게 된 거잖아'

귀에 들리는 듯한 목소리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