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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Sep 18. 2021

(22) 세 번째 가사조사

언젠가 끝이 나긴 하겠지?

 번째 가사조사는 5월이었다. 한달  6,  번째 가사조사가 잡혔다. 시간은 오후 2. 아마도 조사관은 하루에   정도의 조사를 소화할  있는  했다. 오전 10시에  (2시간~3시간 진행), 그리고 12시반이 되면 점심시간이라며 조사를 마무리했었다. 조사관이 점심시간을 가진  잡히는 것이 오후 2 조사.  역시 530분쯤 되면 퇴근시각이라 마무리되었으므로, 물리적으로 하루   이상은 불가능할  같았다. 주말 조사에 대해 물어본 적은 있었으나 "가능은 하지만...."이라는 답이 돌아왔었다. 결국, 평일  근무시간에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조사에 참여해야 소송이 진행된다는 의미로 들렸었다. 굳이 주말 시간을 뺏으며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가사조사관의 의견은 판사에게 전달되므로. 까칠해 보이는 것도, 예민해 보이는 것도 싫었다. 나는 '성격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런 것이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성격의 문제로 이혼소송까지 오게  것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고, 조사관이 제시하는 시각에 웬만하면 응하려 노력하게 됐었다. 옷차림 역시 마찬가지. 법원이라는 공간에 어울리게(?), 조금은 격식을 갖춘 무채색 계열을 골라 입고 액세서리 등은 전혀 하지 않은  조사에 참여했었다. 눈에 띄는  무엇이라도 어떤 '꼬투리' 될까봐, 스스로를 검열하며 조사에 참여했던  같다.


이번 조사가 조금 더 묵직하게 다가온 건, 아버지의 기일 이틀 후로 날짜가 잡힌 까닭이었다. 1년 전, 아버지의 장례와 그 후의 일들. 그 시간들이 소송까지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기에, 새삼 1년이 이렇게 흘렀구나 하는 무게가 실감있게 다가왔었다. 1년 동안 소송이란 걸 하고 있다니. 나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걸까, 이 의문이 꽤나 자주 들었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발버둥을 쳐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걸까. 혼인제도라는 틀. 그틀을 벗어나는 게 정말 이렇게 어려운 일인걸까.


아버지의 첫 기일 하루 전. 가사조사 3일 전인 그 시점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솔직히, 정말 받고 싶지 않았다. 늘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지만, 아이에 관한 어떤 이야기일까봐 망설이며 받게 된다. 그래도 애 아빠인데, 이 고리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음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에 전화를 받았다.

"장인어른 기일에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아버지 기일의 일정을 물어보길래, 친척들과 성묘를 가기로 했다고 답을 했다.

"왜 나는 거길 못 가는 건데?"라는 질문.

무어라 답해야 할까. 왜 오고 싶은 건데, 물어야 하나. 오고 싶으면 오십쇼, 쿨하게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오려면 와도 되는데, 내가 불편한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왜 내가 가는 게 싫은 건데?", "내가 장인어른 기일에 못갈 만큼, 이런 대접을 받을 만큼 잘못한 게 대체 뭔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의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진술서로 써 냈고,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며 변호사도 고용했고,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가사조사를 이렇게나 받고 있는데, 이걸 또 왜 나한테 물을까.

"그런 건 변호사랑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전화 끊을게."

나름은 대차게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으나, 전화는 연이어 울렸다. 한 번, 받지 않았으나 전화는 쉬지 않고 울렸고, 이걸 안 받으면 불쑥 찾아올까 두려웠다. 아이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또 하게 되면 어쩌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이런 대접을 받을 만큼 잘못한 게 대체 뭔데?"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소송하기 전에도 꾸준히 얘기했고,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아서 소송까지 시작했잖아. 또 그 얘기를 하면 뭘 어쩌자는 건데?"

"그러니까,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건데? 앞으로 다 고치겠다잖아."

이혼을 '당할 만큼' 잘못한 게 없다는 남편. 그 말 뒤에는 늘 "내가 바람을 폈니, 도박을 했니?"라는 말이 이어졌었다. 이혼소송을 시작하며 그토록 설명했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잘못을 내게 묻는다. 똑같은 대답을 해도, 또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대화. 통화는 1시간 가량 이어졌다. 도돌이표. 무한반복.

"끝도 없는 이 얘기 제발 그만 좀 하자. 끊을게"를 여러 번 반복하고서야 '합의 하에'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그는 통화 말미에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 여전히 그는, 내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으니까 좋다고? 통화 내내 나는 화를 냈고, 스스로가 낯설만큼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답은, 저랬다. 암담함? 비참함? 내가 느낀 감정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적확할까. 상대의 감정을 얼마나 별 거 아닌 것이라 여겨야 저런 대꾸를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더는 남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저, 생각하려 노력했다.


'내 선택은 옳았어. 저런 사람과 헤어지려 한 내 선택은, 인생 최고의 결정이야. 잘했어.'

시간은 흘렀다.





세 번째 가사조사 당일 아침. 남편에게서 카톡이 왔다. 열이 난다고,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카톡을 보고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코로나인가? 애가 남편을 언제 만났었지?' 였었다. 그는 코로나가 아니라고 말을 했고,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고 난 이후에 떠오른 감정은, 솔직히 '기쁨'이었다. 1시간 가량 통화를 했던 것이 며칠 전이었고, 아버지의 기일을 보내는 내내 나는 가사조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또 마주쳐야해, 또 그렇게 오래오래 이야기를 해야해, 하는 걱정. 누군가의 아픔에, 심지어 남편이었던 사람이 열이 난다는데 그 사실을 이렇게 기쁘게 받아들이는 내가 싫었지만, 그래도 기쁜 건 기쁜 거였다. 가사조사관에게 전화를 걸었고, 잡아둔 조사일정이 있으니 일단 3차 조사는 '나 혼자' 받는 형태로 진행을 하자고 했다. 남편은 열이 떨어진 이후에 다시 약속을 잡겠다는 이야기였다. 오예. 너무나 기분이 좋아져서, 스스로가 웃겼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젠장, 가사조사!'하며 욕을 해대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오예!를 외치며 샤워를 하고 있었다. 거 참. 역시나, 단순한 사람이었다.


미적거림, 망설임이라고는 없이 준비를 한 까닭인지 예상보다 20분이나 일찍 법원에 도착했다. 처음. 자녀양육교육을 받으러 법원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땐 지도앱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길을 찾아 헤맸었다. 가사조사까지 합치니 이번으로 네 번째 방문. 법원으로 가는 길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까지 사 들고는, 지도앱도 켜지 않고 길을 찾아 갔다. 조사실 위치까지 알고 있는 상황. 법원 구조에 익숙해질 일이, 내 평생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피식 웃으며 '여유있게' 법원 마당의 벤치에 앉았다.

작년 11월, 자녀양육교육을 받은 후 잠시 쉬었다가려 앉았던 벤치였다. 추운 날씨에 덜덜 떨며 찔끔찔끔 우는 그 와중에, 브런치 작가 합격(?) 소식을 접했었던 곳. 땀을 뻘뻘 흘리며 그곳에 앉아있으니,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건, 그때와 지금의 마음 상태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는 이래도 되나, 이혼을 해도 되나, 앞으로 어찌될까 하는 두려움에 절절 매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떻게든 흘러갈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 같다. 내 선택은 옳았고, 절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확신. 옳은 선택을 한 스스로에 대한 믿음. 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며 살아가리라는 다짐. 아직도 여전히 소송중이기는 하지만, 마음이 많이 편안해진 것만으로도 위안을 느꼈다. 시간이 흘렀고, 나는 여기까지 왔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체감의 순간. 모든 것이 정리된 후, 다시 이 벤치에 찾아와보리라 다짐도 했다.


3시간 정도로 예상했던 가사조사는 2시간 만에 마무리되었다. 사실, 해도해도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라 할 말도 별로 없었다. 그저 가장 힘들었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해서 전달하는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가장 기억나는 가사조사관의 질문.

"결혼 전에는 이런 사람인지 모르셨던 거예요?"

스스로가 참 바보같아서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아뇨. 알았어요.... 지금 보는 문제들을 정말 그때도 다 알았거든요. 근데, 결혼하면, 애를 낳으면, 가정을 가지면 점점 나아질 거라고.... 그냥 저 혼자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래. 기대. 내가 상상하던 '이상적인' 가정이, 노력하면, 이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어쩌면 이 결혼은, 내 망상이 낳은 참사인지도 모르겠다. 맞벌이를 하고, 아이 양육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나 혼자서 믿고 있었다.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기보다, 내 망상 안에 상대를 집어넣고 당연히 그리 될 것이라 기대했었던 것 같다. 멍청하게도. 헛된 꿈을 품었던 나.


가사조사관은, 가사조사는 3차례 정도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보통 이 다음 순서는 '가정방문'으로 진행된다고. 두 양육자의 주거지를 가사조사관이 직접 방문해, 어느 쪽이 아이에게 더 나은 환경인지를 살핀다는 그 순서. 사실, 이혼을 준비하면서 계속 궁금해했던 것이 이 가정방문이었다. 대체 뭘 살펴보는 건지도 궁금했고, 아이와 나 가사조사관 셋이 마주 앉아 무엇을 하는 지도 의문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보드게임을 할 것 같지는 않았고, 아이를 상대로 난처한 질문을 던질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 가정방문은 또 한 달 후 7월로 날짜가 잡혔다. 오전 11시에 아이와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와 1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이후 가사조사관은 어딘가에서(알아서 혼자) 식사를 해결하고 2시까지 남편의 집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아이 역시 점심을 먹고 남편의 집으로 가 있어야 한다는 일정. 1시쯤 남편이 아이를 데리러 오는 것으로 일정은 정리됐다.





바야흐로 기일 시즌이었다. 아버지의 기일 3주 후 돌아온 어머니의 기일. 외할아버지 첫 기일이라며 아이를 데리고 산소에 갔던 나는, 외할머니 기일이니 함께 미사에 가야한다고 아이에게 말을 했었다. 미사만 하면 되는 거야? 누가누가 오는데? 등을 묻던 아이는 뜬금 없이 "엄마는 안 죽지?"라고 물어왔다.

작년 아버지 장례식에선 "엄마는 언제 죽어?"를 물어서 똑바로 대답하질 못했었다. "너 클 때까진 안 죽지"하고 싶었지만, 그게 거짓말이 될까봐 쉽게 입을 떼지 못했던 나. 이번에도 멍청이처럼 버벅거리며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었다. 안 죽는다고 해야하나, 언젠가는 죽는다고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찰라.

아이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엄마가 죽으면 난 아빠랑 살아야 되잖아."

........ 새삼, 새삼, 깨달았던 것 같다. 이 아이 역시 엄마와 아빠가 따로 사는 이 환경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후회되는 질문을 나는 아이에게 던지고 말았다.

"아빠랑 사는 건 싫어?"

나는 무슨 대답을 기대했던 것일까. 무엇이라 말해야 할 지 몰라 망설이는 아이의 눈을 보고서야, 그 눈에 당혹감이 스치는 걸 보고서야 내 질문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싫다고 대답하지도, 좋다고 대답하지도 못하는 질문을 아이에게 던져버린 멍청이였다. 이 질문은, '엄마랑 사는 게 좋아? 아빠랑 사는 게 좋아?' 하는 질문을, 돌려 던진 것에 불과했다. 아빠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혹시 나는 '싫다'는 대답이 나오길 기대했던 건 아닐까. 아이가 망설이고 있는 그 무렵,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엄마도 아빠도 다 너를 너무 사랑해.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오래오래 살거고, 널 지켜줄거야."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대답을 해버린 것일까. 엄마는 안죽으니 엄마랑 세상 끝날까지 살면 된다고 안심을 시켰어야 했을까. 누구랑 살지,를 아이가 고민한다면,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라 생각해왔던 시간들. 어쩌면 아이에게 불안감을 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말, 나는, 여전히 답을 모르겠다.


기일 시즌의 마무리는 내 생일이었다. 어머니의 기일에서 열흘이 지나면 찾아오는 생일. 생일은 일요일이었고, 아이에겐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었다. 아이는 7월이라는 것만 알 뿐, 정확한 날짜는 매년 헛갈려 하고 있었기에 굳이 알리지 않았다. 단둘이 앉아 파티같은 것을 한다면, 그 상황이 아이에겐 부담이 될 것 같았다. 이 나이에 생일이라고 친구를 부르기도 우스웠고, 그런 기분도 전혀 나지 않았기에 그저 조용히 지나가고 싶었다.

아이는 내 생일을 하루 앞둔 토요일에 남편의 집에 다녀왔고, 아이를 데리고 온 남편은 "엄마가 주라고 하던데"하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시어머님이 끓이신 미역국과 불고기가 담겨 있었다. 감사한 일이었지만, 감사함보다 불편함이 앞섰던 게 사실이었다. 이 상황에, 이러시면, 나는, 대체, 무슨 인사를 드려야 할까.

집으로 돌아와 어머님께 카톡을 보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감사함만 전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어머님은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거듭 감사하다 말씀드렸다.

남편이 함께 하지 않는 생일은, 무려 12년 만인 것 같았다. 연애기간까지 모두 포함하니 그랬다. 27살이었던 나는 39살이 되어 오롯이 홀로 생일을 보냈다. 쓸쓸했어야 했나? 정말 솔직히, '전혀' 쓸쓸하지 않았다. 최근 몇년간 생일마다 얼마나 싸웠는지. "가고 싶은 곳을 정해서 말해"라는 남편이었다. 어디를 가도 싸웠고, 집에 있어도 싸웠던 많고 많은 기억들. 무탈하고 평화롭고 조용하게 흘러가는 하루에 감사하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내 시간이, 새삼스레 소중했다. 온전히 내 것인 시간. 그 가치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기에, 정말 그것으로도 뜻깊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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