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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Apr 17. 2022

(29) 조정이 결렬됐다1

… "결렬해 버렸다!”고 쓰는게 맞을지도? 

3월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4월이 시작되어 있었고, '또 하나의 터널을 지나왔구나'하는 체감이 들고서야 글을 쓸 마음이 생긴 것 같다. 별거를 시작했던 2년여 전 그 무렵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그런 밤들이었다. 울고, 또 울고, 몸서리 치고, 치솟는 화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한없이 가라앉곤 했었다. 


왜, 왜,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 법과 제도는. 

내가, 대체 뭘 잘못한건데. 


마음을 어찌해 볼 힘조차 나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 같다. 오래된 성향이랄까. 마음이 버거울 땐 말없이 웅크리기를 택한다. 이런 시기에는 반드시 해야할 일들만을 처리할 뿐. 지인들과의 연락이나 안부인사조차 적절히 대처하질 못했다. 친구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잠수기'. SNS를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는 것도 이번 3월에 깨달았다. 답글이나 업로드 같은 건, 도무지 해내기가 어려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뾰족한 감정을 드러내 버릴까봐. 스스로의 미성숙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또 비슷한 방식으로 3월을 보냈다. 웅크리고 웅크린 후에야, 이대로는 안돼, 하는 생각이 싹텄다. 참, 어리고 나약한 나란 사람. 






3월 둘째 주에 첫 조정기일이 잡혔었다. 화요일 오후 4시. 

회사 상황상 월화요일은 연차조차 낼 수가 없었다. 변호사 사무실에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고, 일단 원고인 나는 빠진 채 첫 조정을 진행해 보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변론기일에는 변호사 대리 참석이 가능하지만 가사조정에는 본인이 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의아했지만, 변호사 사무실에서 괜찮다고 말을 하니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이 조정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 측은 이혼을 원하지 않았고, 나는 너무나 강력히 이혼을 원하고 있었다. 조정은 이혼에 대한 의사가 합의된 이후에 양육권이나 위자료, 양육비 등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조건'들을 조정하는 과정인데, 이혼 의사조차 다른 상황에 조정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1차 조정이 끝난 후 변호사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었다. 담당 판사님께서 다음 조정 때는 원고 피고 두 당사자가 반드시 참석하기를 요청하셨다고, 2차 조정 날짜에 참석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2주 후 수요일 오후 2시. 반차를 내면 참석이 가능해보였고, 아이의 하원시각에 맞춰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은 좋은 시간대여서 참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1차 조정이 지나가고 이틀 뒤, 변호사님께서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생소한 상황이었기에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상대측(남편) 변호사가 연락을 해 왔다고 했다. 1차 조정에 참석했었던 남편은, 그 조정 내내 나와의 대화가 부족하다고, 이렇게까지 이혼을 강력히 원하는 것이 본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나를 직접 만나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무슨 대화를 또 해요, 그 대화가 안돼서 소송까지 왔는데 무슨 대화를 또 해요?"

나는 발끈했었다. 남편은 대화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소송 과정 내내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확고하게 소송을 원하는 아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화로 충분히 풀 수 있고 앞으로 얼마나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알려주고 싶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줄줄줄 쓸 수 있을 만큼 여러 번 들은 이야기였다. 그는 별거 시작 때부터 꾸준히 했던 이야기를 '또' 꺼내고 있었고, 나는 '더이상은' 그의 이야기를 들을 마음이 생기질 않았었다. 그럼에도 또 대화라니. 

원하는 것을 들어줄 때까지, 같은 이야기를 꾸준히 질릴 만큼 반복하는 것은 남편의 오래된 특징이었다. 그가 원하는 '소송 취하'를 들어주지 않은 것이라 나는 생각했지만, 그는 '대화가 부족해서' 내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의 거절에도 변호사님이 설득을 이어가셨다. 아이의 아빠이고 앞으로 계속 봐야할 상황인데, 마음에 응어리는 남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들어보는 게 좋겠다는 설득. 

재판 과정과 상관없는 때에 양측 변호사가 모두 시간을 내서 동석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꺼내셨을 때는 죄송함이 앞섰다. 굳이 낼 필요도 없는 시간을, 원고와 피고를 위해 만들어보겠다는 진심에서는 감사함도 느꼈다. 이렇게까지 하신다는데, '깽판'을 부리고 싶진 않았다. 결국 약속을 잡았다. 


3월 둘째주에 1차 조정을 마치고, 셋째주에 우리측 변호사 사무실에서 남편을 만났다. 넷째주에는 2차 조정이 예정되어 있었던 상황. 나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할지 일단은 참고 듣기로 마음을 먹고 이 자리에 참석했었다. 

남편에게도 '할 만큼 다 했다'는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혼생활 내내 나는 생각했었다. 

'할 만큼은 해보자. 참을 만큼은 참아보자.' 

늘 그런 마음 상태로 남편의 일상을 참아내려 최선을 다했지만, '아, 더이상은 안되겠다' 하는 생각이 실체감 있게 다가오는 순간이 왔었다. 이건 더는 안되는 거구나, 하는 결심을 하고서야 별거를 택했고, 별거 이후에도 한 두차례 정도 더 '할 만큼 다했지만, 이걸 더는 버틸 수는 없겠다'하는 생각이 들고서야 소송을 시작했었다. 

남편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하리라 짐작했고, 참고 들어주리라 마음 먹고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2년 여 전, 소송을 시작할 때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던 기억이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그 이후로 처음 온 것이었으니, 2년만이구나. 여기서 계약서를 쓰던 그 당시, 울고 울다 고개를 들었을 때 창문 밖으로 펼쳐지던 풍경이 또다시 눈에 들어왔다. 맞아, 여기서 엄청 울었었어. 당시의 나는, 창밖으로 바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뿌얘진 시야로 보면서, 여긴 대체 어디일까 같은 생각을 했었다. 

2년이 지나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나는, 1년의 육아휴직을 보내고 꽤나 차분한 상태로 이곳에 다시 앉아있었다.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다. 나란 녀석, 잘 버텼구나. 2년을 어떻게든 살아내고 이렇게 차분해졌어. 울지도 않잖아, 잘 버텼어. 대견해.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기도 했었다. 


피고(남편)와 피고측 변호사, 원고와 원고측 변호사. 네 명이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꽤나 비장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는 네 사람. 바쁜 평일 낮시간에 마주 앉아 이혼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이어갈 네 사람. 참.. 씁쓸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이런 비장함이라니. 독립선언서라도 쓸 것 같은 표정으로 마주 앉은 4명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법적 절차가 아닌 이런 만남은, 두 변호사님께도 낯선 상황임이 절절히 느껴졌다. 결국 우리쪽 변호사가 남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를 물어보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쓸데없이 비장하고 어색해서 '변호사 동석 대화'를 주장했던 내 의견을 굽히는 게 필요해 보였다. 

"변호사님들 바쁘실텐데 저희끼리 이야기를 한 번 해볼게요."

여러 번 괜찮냐고 의사를 물어보신 후에야, 양측 변호사님들이 자리를 떠나셨다. 작은 사무실 테이블에 남편과 둘이 마주 앉았다. 얼마만이었을까. 이렇게 마주 앉은 건. 소송을 시작하고 처음이었으니 2년 여 만일까. 어색하고 불편해서 컵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을 때, 남편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왜 그렇게 이혼을 원하는 거야?"


아아...............젠장. 또 그 질문이구나, 싶었다. 내가 왜 이혼을 원하는지를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수차례 말을 했지만 "앞으로 잘할게"라는 무한반복의 대화에서 결국 소송을 택했던 나. 논리정연(?)하게 소장에도 적어보냈는데, 그는 또 그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차분히 대답하고 싶었다. 2년 여의 시간동안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소송에 불만이 생길 때마다 스스로에게도 집요하게 묻곤 했었다. 

'이렇게나 이혼을 원하는 이유가 뭐야?'

'이대로 별거 상태만 유지해도 괜찮은 거 아니야?'

아무리 물어도 답은 하나였다. 이혼. 그와 엮여 있는 관계를 끊어내고 싶다는 강렬한 바람. 그 강렬함을 느낄 때도 묻곤 했었다. 왜? 후회하지 않을 자신있어? 왜 이렇게 원하는 거지? 


"나는, 당신이라는 사람의 바닥을 봤고, 그 바닥을 두려워하면서 평생을 살고 싶지 않아. 사람이 살면서 화를 낼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할 말 못할 말이라는 게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도 있는거잖아. 넌 그 선을 넘었고,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거야. 죽도록 미워하는 마음을 누르려고 애쓰는 건 딱하나, 니가 애 아빠라서야."


왜 이렇게 이혼을 원하는 건지를 스스로에게 물은 결과, 얻은 답이 그거였다. 바닥. 나는 그의 바닥을 감당해내기가 싫었다. '저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거야'라는 다짐도 하곤 했었다. '왜 이렇게 이혼을 하고 싶어하는 거야?'라는 질문은, 이상하게도 '죽어도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거야'라는 다짐으로 끝맺음 되곤 했었다. 결혼 생활 내내 나를 괴롭혔던 그의 생활방식과 분노와 막말들. 처음엔 그것 때문에 이혼을 이토록 강력하게 원하는 것이라 나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이 흐른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건, 그가 내게 던졌던 '말'이었다. 막말이 주는 상처는 생각보다 컸고, 예상보다 아팠고, 떠오를 때마다 쓰렸다. 


"니 아버지 영정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냐?"


숱한 막말들 중에서도, 이 문장 하나만큼은 도무지 그 상처가 아물지를 않았다. 아버지 장례식장을 찾은 회사 남자 동료들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넨 것이 싸움의 이유가 됐었다. 부모님 장례식에서 슬퍼해야 하고 적어도 웃으면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는데, 내 생각은 좀 달랐었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들이었고, 나의 부재로 내 몫의 일까지 해냈어야 하는 그들이었기에 반기고도 싶었다. 부모님의 장례는 오래 가져가야 할 슬픔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굳이 그것을 남들 앞에서 눈물로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었다. 회사 동료 앞에서 눈물이라니. 그런 건 보이고 싶지 않았었다. 


장례식장에서 '웃으며' 남자 동료들을 반긴 이 상황은, "그들과 무슨 사이냐"의 논쟁으로 이어졌고, 싸움 과정에서 점심값 등을 보낸 송금내역이 그의 레이더에 걸렸고, "무슨 사이길래 돈까지 보내냐", "바람피지? 모텔 갔다오고 모텔비 보낸 거 아니야?" 등으로 대화가 넘어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러다 나온 말이 아버지 영정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냐,는 것이었는데 그 말이 2년 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도무지 소화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영정 앞에서 나는 당당하기는 어려웠었다. 그가 주장한 그런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에게 죄송했고, 속상했고, 후회되는 일들은 정말로 많았었다. 남편이 내게 던졌던 저 질문은 그런 복잡한 감정들과 얽히며 몸집을 불려갔었다. 아버지의 장례와 3주 후 다가오는 어머니 기일 사이에 있던 시기. 그 어떤 공격을 받아내기엔 스스로가 너무 지쳐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돌아봐도, 적어도 남편은 그런 말을 내게 할 자격이 없었다. 부끄럽지 않냐고? 당신은? 내 아버지에게 죄송하지 않아? 그런 말을 내뱉을 자격이, 정말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소송 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묻는 내게 남편은 "니가 의심받을 짓을 했잖아"하고 따지곤 했었다. 소송 후 변호사사무실에서 마주 앉은 남편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묻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참 낯설었다. 이 상황이. 남편의 사과 앞에서 잠시 할말을 잊었던 것도 같다. 이제와 사과라니.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도 들었으니 당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도무지 그게 되지 않는 나는, 그런 나는 문제가 있는 사람인 걸까. 내가 예민한 것일까.  


말 한마디, 그게 뭐라고. 그것 때문이면 기회를 줘도 되지 않냐고, 스스로에게 참 많이도 물었었다. 내가 뭐라고, 용서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 거냐고. 그럼에도 내가 내린 결론은 그랬다. 상대의 입장에 공감을 못하는 건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만, 할 말 못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대가 어떤 상황인지 관심조차 없는 사람과는 평생을 함께 하긴 어렵다는 것. 화가 나서 막말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게 내가 느낀 남편의 바닥이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는 넘어버렸고, 그 공격은 쌓이고 쌓인 문제들이 많은 상황에 결정타가 되어 버렸다. 사과를 들으면서도 다짐했던 것 같다. 나는 너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후회하게 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아. 






남편의 저런 상태가 '머리'로 이해된다고 하면, 사람들은 의아해 할까. 연애와 결혼생활까지 장장 10여 년. 그 시간을 부대끼며, 남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하기에 저런 말을 내뱉은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이해가 되기도 했었다. 결혼생활 내내 느꼈던 그의 행동방식. 남편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끝도 없이 같은 말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몰아가는 방식을 택하곤 했었다. 그의 공격성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 드러났고, 나약한 나는 그 상황이 버거워서 "알았어, 원하는 대로 해" 하는 것으로 백기를 들곤 했었다. 


별거라는 상황은, 남편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리라. 그는 그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보고 싶었을 거였다. 그 와중에 찾아온 아버지의 장례. 별거 중인 아내 아버지의 장례같은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상황이었을 테고,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제 정신이 아닌" 시간이었을 것이라 짐작도 된다. 장례 이후 그는 어떻게든 합가를 하고 싶었을 테고, 원하는 것을 아무리 말해도 내가 들어주질 않으니 다른 방법으로 '위협'을 택했으리라. 떨어져 지내는 상황에 마땅히 꼬투리 잡을 것은 없었고 '외도 가능성'을 스스로의 무기로 삼은 것이라 짐작도 됐다. 실제로 그는 외도 가능성을 이유로 수차례 별거한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었다. 남편은 그저 불안했던 거였고, 그 불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랐을 뿐이었다. 


소리를 지르는 그를 볼 때면, 그 뒤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보이기도 했었다. 나 혼자만의 상상이지만, 그를 볼 때마다 목도리도마뱀을 떠올리곤 했었다. 삶에 펼쳐지는 수많은 상황에서 그는 강해보이기를 택했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끌려오지 않을 때는 몸집을 부풀리며 공격하기를 택했었다. 

나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 속에 있는 아이는 삶의 수많은 상황에서 웅크리기를 택하는 편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았고 공격받지 않으려 미리미리 방패를 설치하는 그런 성향.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 방어를 하고 있는 두 사람. 그것이 몸만 성인이 되어버린 두 사람의 행동패턴이었고, 그것이 우리의 관계였다. 


변할 수 있을까. 이 관계가? 우리가?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둘은, 함께 있으면 서로가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어. 떨어져서 각자의 방식대로 사는 게 맞아."

남편은 말했었다. 

"그럼 아이는?"

"늘 싸우고 괴로워하는 부모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보단,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걸 보여주는 게 나을거야."


나는 여전히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믿고' 있다. 그의 생활방식과 공격성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를 밀어낸 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이 양육을 책임지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이었다. 안되는 걸 안된다고 인정하는 게 비겁한 일일까? 안되는 건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면 되는 것 아닐까. 여전히 답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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