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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Mar 04. 2022

(28) 아이가 울었다

이혼 매거진에 글을 쓴지 두 달 여가 흘렀다. 개인적으로 바쁘기도 했지만, 소송 자체도 이렇다하게 진행되는 것이 없었다. 상담을 했고, 마쳤고, 상담사가 쓴 보고서(?)가 판사에게 전달된다고 듣기는 했지만 뭐가 어찌되는 것인지 법원도 변호사도 그 어느 누구도 연락은 없었다. 소송을 시작할 때만 해도 스스로가 소송에 '휘말린' 사람이라는 자각이 꽤나 강했지만- 1년이 넘어가면서 그런 자각도 서서히 옅어져갔다. 그저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 것은 상담이 끝난지 두 달 여가 흐른 시점이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번호를 보는 순간 뭔가 받아야겠다는 느낌이 왔다. 공공기관 어딘가의 느낌이 나는 번호랄까. "여보세요"하고 받았고 상대는 "가정법원 가사조사관 ***입니다"하고 말을 시작했다. 

남편과 나의 가사조사를 진행한 분은 아니었다. 법원에 인사이동이 있었고, 담당자가 바꼈다는 짤막한 설명을 들었을 뿐. "관련 내용들을 모두 충분히 검토한 후에 전화를 드린 것이니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하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래. 편하게....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민한' 나는 그 쉬운 '편하게'가 잘 되지 않았다. 


내 삶의 기록들, 그 사적인 내용을 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줄었으면 하는 마음이랄까.(이렇게 공개적인 곳에 글을 쓰면서도 그랬다. 익명에 숨어 있는 것과 실명을 드러낸 상황은 그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가사조사관 앞에서 그렇게 울고불고 했던 기억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본 적 없는 사람이 '편하게'라고 말을 해봤자 별로 와닿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예전 조사관을 불러주세요!"하고 소리칠 입장도 안됐다. 닥치고 "네, 그렇군요"하는 것 말고는 별 방법이 없어보였다. 


부부상담에 대한 후기를 묻고, 생각의 변화를 묻는 것이 전화를 건 이유라고 말을 했다. 

나는 "생각의 변화요?"하고 되물었다. 가사조사관은 "이혼에 대한 의사가 변하셨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드리는 겁니다"하고 말씀하셨다. 절대, 그럴리가. 시간이 가면서 더 확고해지는 결론. 내 선택은 옳은 것이었다는 확신. 이렇다할 근거는 없었지만, 현재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그 모든 대답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여러번 반복해서 쓰는 문장인 걸 잘 알고 있지만 '무탈한 일상이 주는 평온함'은, 정말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엔 으레하는 절차라고 생각해서 기대도 안했어요. 하지만 상담은 예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습니다. 남편이나 제가 가진 개인적인 문제들을 돌아보고 앞으로를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상담사님께도 감사를 드리고픈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이혼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으셨고요?"


무려 '나랏돈'으로 상담을 받았으니, 어떤 극적인 변화라도 말씀드리는 게 이치에 맞는 걸까 생각했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상담을 하면서 점점 더 확고해졌습니다. 이혼을 해야만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확고해서일까. 전화는 생각보다 짧게 끝났고, 나는 전화를 끊으려는 상대방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폭력이나 어떤 물리적인 피해가 없었다 해도, 그에 준하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측정 불가능한 피해이기에 구체적인 증거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저는 지금의 생활에 굉장히 만족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건 생각하기도 싫고, 법원에서 기각이 나온다해도 항소할 마음입니다. 절대로 남편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


돌아봐도 대충 이 정도의 이야기를 건넨 것은 분명한데, 할 말은 다 한 것 같은데, 왜인지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바보처럼 흐윽, 흐흑 거리며 여러번 목을 가다듬고서야 말을 끝마칠 수 있었다. 


과거를 돌아볼 때 차분해야 모조리 끝났다고 결론낼 수 있는 것 아닐까. 온마음으로, 정말 온마음으로 "나 정말 잘 결정한 것 같아"라고 생각하면서도, 결혼 시절에 대해 떠올리면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응어리가 남은 걸까. 응어리라니. 그런 걸, 내 귀한 마음 한 구석에 품어서 뭐하려고. 

마음이라는 것에 물리적 실체가 있다면, 갈고리 같은 것으로 이런 응어리들을 박박 긁어내고 싶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 원망이니 슬픔이니 다 갖다 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 

...갈고리? 어쩌면 그런 큰 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유적 발굴 현장 같은 데서나 쓰는 부드러운 솔, 그 정도면 좋을 것 같다. 마음의 바닥에 바짝 엎으려 부드러운 솔로 툴툴 털어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마음 바닥이 다칠 일도 없을 만큼 아주 부드러운 솔로 툴툴. 그리고 따뜻한 입김을 모아 후, 불어버리고 싶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뿌옇게 일었던 먼지도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었던 바닥인 양 깨끗하도록. 후-.  


가사조사관은 법적으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과정을 거쳤기에 이대로 변론기일이 잡힐 것 같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주셨다. 그 통화 후 일주일 정도가 흘렀을까. 변호사 사무실에서 카톡이 왔다. 변론기일 안내가 아니라 '가사조정' 날짜가 잡혔음을 알려주는 연락이었다. 

양육비와 양육권 등을 '조정'할 때 잡힌다는 그 과정. 남편은 꾸준히 이혼 의시가 없음을 밝혀왔기에.. 조정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조정을 하기로 했다니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남편의 생각이 바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도 들고 있다. 변론기일이 잡힌다면 변호사들이 만날테고, "원고는 이혼을 강력히 원합니다" "피고는 이혼의사가 없습니다" 하는 이야기들을 또 반복하게 될테니까. 그렇게 질질 끌 수 있는 문제를, 실질적 논의를 나누는 조정으로 바꿨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닐까. 헛된 기대는, 일단은 품지 않기로 했다. 


첫 조정날짜는 3월 초. 내가 마지막 상담을 받은지 4개월 여가 흘러서야 다음 절차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혼소송이 '길면' 2년이 걸린다고 들을 때마다 2년이나 걸릴 일이 뭐가 있지,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2년을 꽉 채울 것 같다. 그 긴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결심이라니. 거 참 확고한 결심일세, 감탄마저 드는 시간이다. 나는 어쩌면 꽤나 고집이 센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최근 남편의 집에 자주 다녀오고 있었다. 방학인 것도 큰 이유였지만, 코로나 상황도 문제였다. 아이 학교에 이어 학원, 돌봄교실까지 매주 이슈가 터져나왔고 신기하게도 그 이슈들이 내게 전달되어져 오는 건 아이가 남편의 집에 가 있는 주말인 경우가 많았다. 남편에게 이슈를 전해야 했고, 연락이 온 당일 검사를 받으러 가야하는 상황에서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선별진료소로 가는 일정이 이어졌다. 일요일에 검사를 받고 나면 월요일 오전이 되어야만 결과가 나왔고, 결과가 나오기 이전엔 그 어떤 스케줄도 잡을 수가 없었다. 


월요일 오전 '음성' 결과를 보고 아이를 돌봄교실 혹은 학원으로 다시 보내야했지만, 학원이 쉬거나 돌봄교실이 문을 닫거나 하는 '빈 시간'들이 생겨났다. 남편은 기꺼이 아이를 맡았고 나는 덕분에 회사를 다녔다. 소송전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변화이기도 했다. '당연한 듯' 아이를 맡는 남편을 보며 정말 솔직히 '진작 좀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해, 나는 그 시간들을 즐기기도 했다. 남편이 아이와 있는 동안에는 쫓기듯 퇴근을 할 필요도 없었고, 홀로 집에 있으면서는 굴러다니며 책을 읽고 TV를 봤다. 마음껏 내 자유시간을 즐겼다. 아이와 아빠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아이에게 필요한 시간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엄마답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변명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길수록, 나는 즐거워했다. 


남편의 집엔 삼촌 등 원가족이 있었고 그들이 돌아가며 아이를 케어할 수 있었다. 내가 마음을 놓는만큼, 아이에게도 무한의 자유가 주어졌다. 10세 아이의 최대 즐거움. 무한의 TV시청과 게임. 늦잠. 과자. 그 모든 것들. 그래 어쩌겠어, 하며 기꺼이 받아들였다. 

월급을 지켜낼 것, 

아이와 다른 이들의 관계에 문제가 없도록 나도 노력할 것. 

그것이 내 결심이었고, 가장 중요하다 생각한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괜찮은 선택지로 보였다. 그럼에도... 이게 맞는 걸까, 이혼하자며 집을 나온 주제에 그 집으로 아이를 계속 보내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애써 끊어내려 노력했다. 생각해봤자, 답은 없었다. 


보통은 1박2일이었던 기간이, 2박3일에서 3박4일로 늘어나는 경우도 종종 벌어졌다. 토일월을 남편집에서 보내고, 화요일 퇴근 후 늦은 밤에야 아이를 만난 그 어느 날. 아이는 쓰러지듯 잠이 들었고, 수요일에 자고 일어나선 내내 기분이 안좋아 보였다. 아이와 있기 위해 수요일에 연차를 낸 상황이었기에, 나의 계획대로 '푹 쉬게' 해주면 된다고 마음대로 결론내고 있었다. 내가 즐겼던 그날들을, 아이도 즐겼으리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아이가 원했던 거였으니까. 니가 원하는 대로 아빠와 실컷 있었고, 주말이 오면 다시 가면 되잖아? 이 계획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장난치듯 아이에게 물었다. 

"기분이 안 좋아? 왜? 너~ 벌써 며칠째 돌봄교실도 안가고 학원도 안갔잖아. 오늘도 안가기로 했잖아~ 근데 왜 기분이 안좋아?"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우울한 그런 날도 있지 않나, 가볍게만 생각했었다. 정신이 아득해진 건,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부터였다. 눈물을 보고서야 웃을 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코로나 검사로 코를 찔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최근 들어 우는 걸 본 기억도 없었다. 

"왜, 왜, 왜 울어?"

아무 말도 없었다. 

"니가 말을 안해주면, 엄마는 진짜 알수가 없잖아. 왜 기분이 안좋은거야?"

"....... 아빠 보고 싶어."

"........"


진심으로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떠오르질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아이를 보고 있었다. 침묵 속에 시간이 흘렀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애써 솔직히 말해준 아이가 불편한 기분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어느 육아책에선가 읽은 대로, 그냥 공감을 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이건 뭐.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고작 그런 것이, 이 순간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그래. 아빠가 보고싶을 수도 있지. 그래. 무슨 마음인지는 알 것 같아... 마음에 대한 인정. 보고싶다는 그 대상이 아빠가 아니었다면, "인터넷으로 한 번 찾아볼까", "어디가면 볼 수 있을까" 따위의 말이라도 했을 것 같은데. 이 상황에선 아무 것도 해결해 줄 수도, 아무 것도 도와줄 수도 없었다. 심지어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나였다. 이런 상황을 만든 주제에 위로를 건낼 자격이 있을까..? 


공감과 인정. 어느 책에서 본 그대로, 일단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해주려 노력했다. 아이는 울먹이고 있었고, 계속되는 침묵이.. 나는 불편했다. 

"그래. 아빠랑 토일월화 같이 있었으니까, 수요일 아침에 아빠 생각이 나는 건 당연해."

"지금 아빠가 옆에 있길 바라는구나."

30여 분쯤. 자꾸자꾸 구석으로 숨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 책에서 본 공감과 인정만으로는 지금 이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다음은 뭘 어째야 하는 걸까. 지금 돌아봐도 잘못한 행동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다음을..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쁜 기분을 계속 품고 있어서 어쩔건가. 앞으로도 이런 일은, 이 아이의 삶에서 꾸준히 반복될텐데. 그때마다 "아, 그럴수도 있지", "아,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아"라는 말만 자꾸 반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문득 드는 생각. 그걸 어떻게 끊어낼지를 알려주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일을 벌인 엄마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 않을까? .....정말 돌아봐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아들, 지금은 아빠를 못 보잖아. 안되는 걸 자꾸 '그랬으면 좋겠다'하고 생각만 하면, 상황이 변할까?"

 "우울하고 나쁜 기분에 퐁당 빠져있으면, 니 뇌는 스스로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 새로운 생각을 하면서 니가 도움을 줘야 뇌가 움직이지."

"지금은 엄마랑 있잖아. 엄마랑은 어떤 걸 해보면 재미있을까?"


당연하게도, 이런 식의 조언들은 아이에게 가닿지 않았다. 딱히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없는 문제였기에 나는 부엌으로 물러났다. 

"엄마 커피마시고 있을게. 필요하면 불러."

조금은, 냉정해지고 싶었다. 그렇게하면 아이도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을까? 아빠 이야기에 쩔쩔매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어쟀든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조금씩 스스로 기분을 회복해 갔고, 밤에는 자연스레 주말에 아빠집에 갈 계획을 세웠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아닐까. 가고 싶다고 할 때 말리지 않고, 이야기를 꺼낼 때 불편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잘 들어주고. 그럼에도 아이가 아빠와 실컷 시간을 보내며 엄마를 떠올리는 순간, '아, 엄마는 거기 잘 있지'하는 안심이 들도록. 그게 정말, 최선인 것 같았다. 내 욕심으로 붙잡아서도 안되고, 나의 틀에 아이를 가둬서도 안된다. 

'엄마든 아빠든,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기만 하면 언제든 나를 반겨주는구나.' 이 정도를 아이가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고작 이런 정도였다. 


이혼 소장에 나왔던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소장 내내 아이는 '사건 본인'으로 불렸다. 소송을 먼저 제기한 나는 원고, 남편은 피고로 불렸던 그 문서. 어쩌면... 사건 본인은 '피해자'의 다른 표현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이 소송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예상했듯 이 아이일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다양한 모습으로 꾸준히 벌어지겠지. 어떻게 해야 아이가 입는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저지른 '사건'으로 아이는 피해를 입었다. 나는 원고이면서 '가해자'인 주제에..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수혜자'도 되어 있었다. 이 소송은, 정말, 지극히도 이기적인 선택이었구나. 깊이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후회해야 했을까? 아이의 눈물 앞에서, 엄마인 나는, 이런 선택을 한 스스로를 원망하고 이 모든 선택에 대해 후회해야 했을까.

브런치에 이혼관련 글을 쓰면서 종종 메일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보내는 메일들. 그 메일들에서 꾸준히 내게 묻는 질문은 "후회하지는 않으세요?"였다. 나는 자신있게 답하곤 했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정말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 .. 아직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들의 질문에 진솔하게 답하고 싶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라면, 그 지옥을 그저 버티지만 말고, 그곳을 바꿀 작은 행동이라도 해보는 게 낫다는 생각 역시 변하지 않았다. 

그랬던 나에게 아이의 눈물은.... 내 안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느끼게 해준 계기가 됐다. 내 새끼의 눈물 앞에서도 나는, 이혼을 후회하지 않고 있었다. 


나만 생각을 바꾸면, 내가 이 소송을 취하하면, 아이는 '멀쩡한'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적어도, 아빠가 보고싶다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일 같은 건 없을 것 같았다. 내 힘듦만 보는 게 맞을까, 이런 내 태도는 엄마로서 너무 무책임한 것일까. 아무리 되물어도, 생각이 바뀌질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혼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라는 결론을 내는 나란 인간. 아들을 생각한다는 건, 어쩌면 내가 만든 거짓말이었던 건 아닐까? 아들을 생각한다면, 이혼을 포기하는 게 맞지 않나? 자책하고 자문해도, 결론이... 바뀌지 않는다. 

아이를 남편 집에 보내놓고 이렇게 앉아 자판이나 두드리고 있는 나는, 어쩌면 정말 이중적인 태도로 아들을 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가정의 상태는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막막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단호한 마음이 함께 고개를 든다. 아들이, 잘 받아들여주기를. 그저 바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비겁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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