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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Feb 02. 2022

(27) 부러움이란 사치스러운 감정

"저녁 뭐 먹을래? 치킨이나 햄버거 같은 거 퇴근길에 사갈까? 애들한테 한 번 물어봐."


퇴근시각이 다가오는 회사 탕비실. 한 남자직원이 아내분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보기 드문 다정한 말투와 표정에서 그의 가족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따님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빠, 나는~ 저녁~."

다정한 가족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텀블러에 조심히 물을 담고 탕비실을 벗어났다. 그의 가정 상황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즈막한 웃음 소리와 함께 이런 저런 메뉴들을 읊어대는 목소리를 듣자니, 오늘 저녁 웃음이 가득할 그의 식탁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좋겠다'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런 아빠를 둔 아이들이 좋겠다는 건지, 저 가정이 좋겠다는 건지, 아내분이 좋겠다는 건지 알수는 없었지만 그냥 '좋겠다' 싶었다. 우습게도 부러웠던 것 같다. 아아- 저런 일상적인 대화를 밝게 나눌 수 있는 가족이라니. 참 좋겠다, 행복하겠다 싶었다. 

소송을 질러버린 입장에서 다정한 가족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건, 참 우스웠다. 나만 참았다면, 나만 버텼다면 그럼 나도 저런 '부러운 모습'의 일원으로 남아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자리로 돌아와 곰곰 생각해봐도 우스웠다. 가지지 못한 걸 부러워해서 어쩌자는 건가. 

그리고 곧 깨달았다. 그럼 소송 전에는, 내가 가정을 깨어버리기 전에는 저런 화목한 모습으로 살았던 적이 있었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속했던 가족과 가정은 저런 화목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와 새삼 어떤 '부러움'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다. 가정을 깨어버리기 전에는 남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던가. 

신기하게도, 없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 때는 남의 것이 부럽지도 않았었다. 행복하게 사는 건 너무나 멀고 먼 달나라 사람들의 모습이었기에, 화목한 가정을 보고 '부러움'조차 느끼지 않았던 나. 

아,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아, 행복하겠구나.

고작 그런 '남의 일' 정도로 받아들이다가, 이제와 남의 가정에 부러움을 느끼다니. 부러움이라는 감정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떠오르는 감정임을 새삼 깨달았다.


별거와 이혼 소송으로 평화라는 것이 찾아왔고, 그렇게 생긴 마음의 여백에 많은 감정이 자람을 느끼는 요즘이다. 빽빽했던 덩쿨을 걷어낸 여백의 땅. 그곳에서 부러움과 자격지심, 비교 등 많은 감정들이 자라남을 새삼스레 느낀다. 애초에 가져본 적조차 없는 것을 부러워하는 이런 상황은, 나이 마흔이 되어서도 당황스럽다. 이 잡초같은 감정들 사이에서 어쨌거나 가장 높이 자라고 있는 건 안정감이라는 나무같다. 이 숲에 온갖 감정들이 자라고 있지만, 스스로가 가장 주의깊게 지켜보고 정성을 들여 키워내고 있는 건 역시 안정감이라는 나무다. 

'저건 남의 인생일 뿐이야. 부러워해도 가질 수 없어.'

'나는 지금 좋잖아. 왜 남을 부러워하는 거야?'

못난 감정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런 나를 그저 바라보려 노력한다. 내 마음숲. 이것저것 다 뒤섞여 있는 그곳에서 중요한 것들만 추려내는 것. 그것들만 잘 키워 나가리라 다짐하는 시간들. 남들이 뭐라 하든,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든 결국 중요한 건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감임을 절실히 배웠으므로. 이혼 소송을 통해 확실히 배운 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1년의 육아휴직 후 복직. 이전에 친했던 회사사람들과는 따로 점심을 먹으며 그간의 소식을 전하곤 했었다. 같은 부서여서 매일 점심을 같이 먹던 한 여자선배가 있었다. 별거나 이혼, 그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했던 무렵, 매일 점심을 먹으며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답답한 마음에 온갖 얘기들을 선배에게 털어놨었고, 선배는 묵묵히 들으며 때론 조언도 해줬었다. 사직서를 내고 남편이 찾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월급은 지켜야지"라고 해줬던 선배. 그 현실적인 조언이 없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곳에서 더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굴이 너무 좋아졌어. 무슨 좋은 일 있어?"

마주앉은 점심자리에서 선배는 내게 인사를 건넸다. 

사실, 복직 후 가장 많이 들은 인사 중 하나가 "얼굴 진짜 좋아졌네요.", "표정이 엄청 밝아졌어요" 같은 것들이었다. 예의상 건네는 인사들일지도 몰랐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기에 스스로도 '그런가' 하며 지내던 날들이었다. 


선배도 첫 인사에서부터 얼굴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했고, "회사 안나와서 그런가봐요"하고 답했다. 첫 인사부터 대뜸 '이혼소송을 해서 그런가봐요' 하고 대답하긴 부담스러웠으니까. 

어쨌거나 식사가 진행되며 서로의 안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기 시작했고, 나 역시도 그간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놨다. 이혼 소송을 시작한 것과 아이 양육을 위해 출퇴근 시간을 조정했고 야근하는 시간에는 도우미를 구했다는 이야기 등등. 그 선배는 "아..."하고 듣기만 하다가 "얼굴이 너무 좋아서, 화해했나 생각했었어"하는 말을 건넸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그러면 얼굴이 엄청 안좋을 걸요. 휴직 전처럼 막 죽을상을 하고 다닐 것 같은데."

"그런가..?"


이후로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깔깔 거리며 나눴고, 선배는 "밝게 웃는 거 보니까 좋다"같은 인사도 내게 건넸다. 

"저 요즘 진짜 잘 지내요.", "요즘 진짜 좋아요."

이런 말을 대화 중에 너무 많이 해버려서일까. 지나친 강조에서 어떤 불편한 기운을 느낀 것일까.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한창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했음에도, 잘 지낸다는 말이 정말 거짓이 아니었음에도, 회사로 돌아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때 그 선배가 건넨 말은 "힘내. 너무 힘들면 꼭 말하고"였다. 

순간 그 말이 턱 하고 귀에 걸렸다. 

'아니, 안 힘든데요. 정말이에요', '맹세컨데 잘 지냅니다' 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한 번 더 "요즘 저 진짜 잘 지내요" 해버리면 더 걱정을 하게 만들 것만 같아서 그냥 웃고 말았다. 


무엇이라 말을 해야 '진짜 잘 지냄' '걱정 NONO'하는 마음이 전달될 수 있는 것일까. 너무 강조해서 여러 번 말했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걱정하는 선배의 마음이 고맙기도 했지만, 정말 잘 지내는 걸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되는 것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결국 믿고 싶은 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본 정보 그대로 보고 듣는 것 아닐까. 상대의 발화 그 자체의 단어보다 이면에 숨어있는 어떤 것을 우리는 보고 싶어하니까. 이혼 소송 중인 '속 시끄러운 여자'가 아무리 잘 지낸다고 한들, '어우, 속 시끄럽겠다' 생각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나 역시도 스스로에게 가끔 묻고는 있다. 

'정말 이렇게나 괜찮은 거 맞는 거야? 스스로도 속이고 있는 거 아닐까?'

하지만 지금까지 느낀 내 반응은 한결같이 '괜찮아'였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질질 울던 많은 밤들도 결국은 지나갔고, 상담까지 거치면서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 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자라는 아이에게 이 상황은 정말 버거운 것이 되겠지만, 그 죄책감에 몸서리 치던 날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글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아이의 받아들임은 앞으로 서서히 진행되겠고 그 시간들이 내게 어떻게 다가올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만, 이혼이라는 선택 자체에 대해서는 뒤돌아보지 않게 된 것 같다. 말 그대로 '잘 지내는' 요즘이다. 





남편이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 떠올리게 된 건 세면대 때문이었다. 퇴근 후 세수를 하는데 세면대 밑으로 물이 쏟아졌다. 에? 하고 아래쪽을 보니, 세면대와 하수구(?)를 연결하는 은색 호스 같은 것이 세면대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끼워두면 빠지고 끼워두면 빠지는 주말을 보내고, 검색도 해 봤지만 공구라고 부를 만한 것도 집에 없었다. 좀 더 고민하고 해결해봤으면 될 일이었을텐데, 나는 경솔하게도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버렸다. 조물주보다 위대하신 건물주님께서 도움을 주시지 않을까,하는 안이한 태도였다. 


"어르신~ 세면대에 그 배수구 호스가 빠져버렸는데. 아무리 끼워도 자꾸 빠져요."

전문가를 불러주시길 바라고 건 전화였지만, 어르신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거 진짜 간단한데, 남편이 그걸 못하던가요?"

"....."

너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남편'이라는 단어를 맞닥뜨려서일까.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고 어르신은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그거 별 공구도 필요없고 힘으로 돌려서, 옆에 남편 있어요? 바꿔봐요."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남편? 남편? 저쪽 집에 있는 남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 저... 저... 저희, 남편 집에 없어요. 저희 주말 부부예요."


.......... 집에 없어요,까지 말하는 동안 계속 머리를 굴리다 결국 택한 건 '주말 부부'였다. 3대가 덕을 쌓아야 해낼 수 있다는 그 주말 부부. 그런 걸 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잘도 이런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 힘들겠네. 남편은 어디 있는데?"

"서.... 서울이요."

... 돌이켜봐도 정말 모르겠다. 미국 뉴욕이나 가까운 일본 도쿄로라도 보내버릴 걸. 상상력이 부족한 내가 겨우 선택한 답안지는 대한민국 서울이었다. 거 참, 안타까울만큼 부족한 상상력이었다. 

"주말에도 자주 못와서요. 이런 거 하시는 업체 연결해주시면 안될까요? 아님 제가 찾아볼까요?"라는 이야기까지 꺼내자 어르신은 "알았어요"하고는 전화를 끊으셨고, 곧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 분 역시 "남편은 옆에 없어요?"하며 남편을 찾으셨고, 나는 또.. 본인 집에 잘 있을 남편을 서울로 보내버렸다. 지금도 정말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아, 이혼 소송중이라서요" 혹은 "남편 같은 거 없는데요" 등의 말을 했어야 하나. 거짓말이 때론 편한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고, 거짓으로 상황을 대충 넘어가려 했었다. 

상대가 대화를 이어가셨다. 

"오늘은 내가 다른 곳에 예약이 있어서 안되고. 내일 1시? 그쯤에 갈게요."


"1시요? 그 시각에는, 아니 평일 낮에는 집에 사람이 없어요. 6시 이후나 주말... 아니시면 날을 정해주시면 회사에 휴가를 내서 시간을 맞출게요."

"회사를 다녀요? 일을 왜 해?"

왜 일을 하냐는 질문에 의아함이 들었지만, 그저 시간만 맞추면 될 것 같았고 평일 어느 때로 날을 잡아주시길 바라며 대답했다. 

"네, 저도 일을 해서 낮에 집에 사람이 없어요. 시간을 어떻게 맞추면 될까요?"

"아니, 남편이 일을 한다면서? 서울까지 가서. 그런데 왜 마누라도 회사를 다녀?"

".........."


임기응변 능력따위 없는 나는, 이번에도 역시 말문이 막혔다. 왜 회사를 다닐까. 왜 일을 할까. 자아실현을 위해서요? 돈을 벌기 위해서요? 남편이 있음을 가정한다면.... 남편이 벌이가 시원찮아서요? 상대도 아무 말이 없었기에 몇 초의 침묵 후에 내가 먼저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평일 낮 말고는 시간 맞추시기가 어려우신 거죠? 일단 '저희'(일부러 '저희'라는 복수 명칭을 사용했다)가 알아서 한 번 해보고 정말 안되겠으면 다시 전화드릴게요."


통화종료 버튼을 눌러버리곤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남편이 없는 내가 문제인지, 남편이 일을 하는데 왜 일을 하냐고 묻는 아저씨가 문제인지, 둘 다의 문제인지. 어쩌면 '남편 없는' 사람의 자격지심인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화'가 났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급하게 브런치를 열었다. 내가 느꼈던 깊은 당혹감을 메모라도 해두고 싶었다. 다다다다 핸드폰으로 개요를 쓰며 감정은 차분해져갔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아저씨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남편도 서울까지 보내놓고 부인도 왜 여기서 일을 하냐 궁금할 수도 있지 뭐, 하는 것으로 마음도 바뀌어 가고 있었다. 급하게 저장. 그리고는 꽤나 대견함(?)을 느꼈다. 훗. 브런치를 하기로 한 나, 정말 잘했구나? 글이라는 친구가 있으니 이렇게 투정도 부릴 수 있고 엄청 좋잖아? 서글픔과 당혹스러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글을 통해 기분전환을 해버리다니, 엄청 글쟁이 같잖아? 하고 생각했고, '글쟁이라니!'하는 스스로가 웃겨서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결혼기념일....이라고 쓰기에도 민망한 그런 날이 왔었다. 놀랍게도 나는, 그 날짜에 정말 아무런 감흥도 없이 평범한 하루를 보냈었다.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울리는 카톡 알림. 

'이 시각에 누구지?'

이 밤에 연락을 해올 만한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고, 남편인가, 하며 카톡을 열었다. 역시나 남편이었다. 

"고민하다 말해. 결혼기념일 축하해."


첫 번째 든 생각은 '오늘이었어?'하는 것. 아이가 쓰는 패드의 비밀번호는 결혼기념일 날짜였다. 수차례 그 비밀번호를 누르면서도 나는 그 숫자가 가리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핸드폰에서 오늘의 날짜를 확인을 하고서야, '세상에- 이렇게 까먹어버리다니' 하고 놀랐다. 그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일차원적인 놀람. 그게 첫번째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작년 이맘때 썼던 어떤 글이 떠올랐다. 작년, 남편의 생일과 결혼기념일과 시부모님의 생신 등을 지내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일이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언젠가는 이 날짜들도 기억에서 흐릿해지는 날이 올까' 같은 문장을 썼었다. 세상에. 1년만에 그걸... 이뤄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나는, 2년이나 지난 별거 날짜는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0여 년을 기념했던 결혼기념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었다. 참 새삼스러웠다. 흘러가는 시간도 새삼스러웠고, 순식간에 적응을 해 나가는 나도 새삼스러웠다. 원래 기억력이 지독히도 나쁜 나였다. 날짜 같은 것은 잘 기억도 하지 못했지만, 10여 년을 챙긴 결혼기념일을 이렇게나 빠르게 잊어버리다니.   


'나 정말 그 시간을 많이 지나왔나봐'하는 실감도 새삼스레 했던 것 같다.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 나쁜 기억력을 가진 걸 기뻐해야 하나 싶다가도, 이제 더이상 특별한 날짜도 아닌 날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내 뇌의 효율성에 대해서는 칭찬해주고 싶었다. 

남편에게 답을 보내진 않았다. 축하,라니. 어쩌면 고심했을 단어 하나하나를 읽어봤지만.. 답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런 태도 역시, 새삼스럽긴 했다. '읽고 씹냐'고 욕먹을 게 무서워서 머리를 짜내 뭐라도 답을 했을 예전의 나. 지금은 그저 씹었다. 고민해서 답을 해봤자,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는 못할 테니까. 이미 끝난 결혼, 그 결혼을 한 날짜에 이제와 축하를 전한들, 내가 답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연예인 누군가가 이혼을 하고, 결혼반지로 목걸이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도 났다. 기사 속 그녀는 "스스로의 실수를 잊지 않기 위해 목걸이를 만들어 반지를 걸고 다닌다"고 했던가. 결혼기념일을 기억하는 대신 별거일을 잊지는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이 모두를 잊어서는 안된다. 떠올리기 싫다 하더라도, 곱씹고 곱씹어서 다시는 그런 시간을 보내진 말아야지, 하고 결심도 했던 것 같다.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해 스스로를 방치했던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절대로 다시는 보내지 않으리라는 다짐. 결혼기념일과 별거일은 이제, 그런 다짐을 하는 날짜로 내게 남겨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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