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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Jun 19. 2022

(31) 선고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

가사조정에서 "그만할게요!"를 외쳤던 건 3월 말. 가사조정 결렬 이후 또 어떤 단계가 진행될지 기대했지만, 거 참 무심하게도 '변론기일'이 잡혔다. 변론기일은 변호사 대리 참석만으로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는 시간. 물론 당사자도 참석이 가능하지만, 2년 여의 소송 동안 변론기일에 참석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처음엔 상대를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요즘은 연차가 아까워서 참석하지 않는다. 또 이어질텐데 굳이 가서 뭐하나. 그런 마음으로 변론기일을 대하게 된다. 인간의 적응력이란 역시 엄청난 것이었다. 처음엔 '소송'이라는 단어도 버거웠는데, 이젠 “또 변론기일이 왔군”하는 것으로 재판 일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소송 시작 - 변론기일 - 가사조사 - 부부상담 - 가사조정 - 변론기일.


이 과정을 거치는데 2년이 흘렀다. 정말 묻고 싶다.

"이 가정이, 회복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질문은 차오르지만, 누구를 향해 물어야 할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나는 누구와 소송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엔 '남편'이라는 개인과 ‘싸운다’는 느낌이었지만.. 이젠 혼인제도와 가정법원을 설득하는 과정에 있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그들이 '이혼 결렬'을 외치면 나는 어쩌나. 그들이 이혼 결렬을 선언한다한들, 이 가정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4월로 잡혀 있던 변론기일은, 담당 판사의 코로나 확진으로 1달 여 뒤로 밀렸다. 5월 중순, 양측 변호사는 또 만났고 의미없는 대화를 나눴다.

"원고는 이혼을 원합니다."

"피고는 이혼을 원하지 않습니다."

5월의 변론기일 즈음엔 정말 궁금했었다. 와,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과정은 다 거친 것 같은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또 변론기일이 잡히나? 그럼 계속계속계속 만나서 같은 말만 반복할텐데. 대체 어떻게 되는거지?


궁금증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10시40분에 변호사들이 만났고, 12시에 내게 '선고기일'이 지정됐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드디어 선고. 항소가 이어지든 어쨌든 2년 여 소송이 일단락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선고기일이 좀 더 무겁게 다가왔던 건, 아버지의 두 번째 기일 당일로 날짜가 잡혔기 때문이었다. 2년 여 전 아버지의 장례 이후 나는 소송을 결심했고, 1년 전 아버지의 첫 기일에는 출간 계약을 맺었다. 두번째 기일에는 이혼 선고가 내려진다. 우연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연히' 날이 겹친 것이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꾸 마음이 부푼다. 왠지 좋은 결과가 나올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친구에게 말을 했었다.

"아버지 귀신이 판사한테 씌여서, 나한테 엄청 유리하게 판결 내리고 다시는 항소도 못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야, 너네 아버지라면 '이혼은 안된다!!' 하실 수도 있지 않아?"

"......"

20년 넘은 찐친의 텐션이란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아버지의 성격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그래, 아버지라면, 귀신이 된 와중에도 "이 가시나가 미쳤나. 이혼이라니!"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무덤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힘들었지, 아버지가 도와줄게"하는 아버지 귀신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이혼은,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안된다!!!"

아버지가 외치시면,

"아아, 아빠. 이미 눈에 흙이 들어가셨잖아요. 그 말이 무덤에 눕는다는 의미 아니었나요"하고 대답해야지 상상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눈에 흙이 들어가셨으니, 승소 판결 좀 이끌어주시면 안되나요, 항소도 좀 막아주시면 안되나요.


살아계셨을 때라면 꺼내지도 못했을 말들을 상상해본다. 귀신이 된다고 전지전능해지는 것은 아닐텐데,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기댈 건 부모인 건지 그런 상상을 자주 하고 있다.

엄마, 아빠. 제발 이혼 판결 좀. 판사를 조정하고 그런 거 좀 해줄 수 없나요.

피식. 혼자 웃는다.






그동안의 이슈라면, 친척 결혼식 정도가 떠오른다. 이혼 소식이 여기저기 친척들에게 알려지고 나서 갖는 첫 공식모임이었다. 사고 친 연예인이 무대로 복귀하는 그런 기분이랄까. 갖가지 핑계로 빠지고픈 마음도 들었지만, 언젠가 한 번은 겪을 일이라 마음 먹었다.

복직 후 8개월. 스스로를 어찌나 알뜰살뜰 챙겨먹였는지 7kg 정도 살이 찐 상태였기에 결혼식이 다가오면서는 다이어트에 대한 열망도 불태웠었다. 하지만 남의 결혼식을 위해 살을 빼는 일 따위가 쉽게 될 리는 없었다. 맞는 옷이 없어 친구에게 옷까지 빌려 입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평소의 나라면 대충 “에라 몰라”하며 입고 갔겠지만, 이번 행사는 뭐랄까, 엄청나게 신경이 쓰였다. 초라해보이고 싶지 않았고, 슬퍼보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아이를 데려간 주말. 홀로 기차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친척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던 것 같다. 이혼 소식을 전혀 접하지 않은 먼~ 친척들은 "남편은 같이 안왔어?"하고 물었고, 이혼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애는?"하고 물어왔다.

남편에 대해 묻는 분들은 오히려 상대하기가 쉬웠다.

"아, 애랑 있어요"라고 말을 하면 쉽게 수긍하곤 했다. 먼 거리, 코로나 시국 등등으로 "아, 혼자 왔구나?"하고 더 이상의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혼 소식을 접한 친척들이었다. 그들과의 대화는 꽤나 복잡하게 흘러갔다.

"애는?"하고 묻길래 "애 아빠랑 있어요"하고 대답을 했었다.

이어지는 질문은 “애 아빠는 어디 있는데?”였고, 정말 어디있는지 확신하지 못했으므로 “집에 있겠죠..?”하고 대답했었다. 그 이후엔 “넌 어디서 왔는데?”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어디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저는 집에서 왔죠…?”하고 대답을 했지만, 상대의 기이한 표정을 보고서야 이 대화가 어딘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 아빠와 아이가 같이 있다"는 말에서 그들은 '아빠랑 아이가 만나는 거면 화해를 한 건가?'를 궁금해 했고, '집’이라는 단어에서는 아이와 남편과 내가 함께 사는 집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잠시 지나간 대화를 돌아보다 여러 문장으로 상황을 풀어 설명했다.

"보통 때는 아이랑 저랑 제 집에서 둘이 지내고요, 남편은 본인 집에 따로 사는데 주말에는 아이를 남편집에 보내요. 지금도 애 아빠집에 애가 간거예요."

"아... 난 또. "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며, 나의 똑똑함에 감탄했다. 이 혼란한 대화에서 숨은 맥락을 파악해버리다니.

그날 결혼식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결혼식도 지켜보다가 그렁그렁 울어버리는 나였지만, 이 결혼식에서만큼은 절대로 울지 말아야 했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다짐을 하며 결혼식 내내 딴청을 부렸다. 신랑신부가 부모님을 향해 절을 할 때도, 신부와 신부의 어머니가 포옹을 할 때도 나는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10살인 아이는, 요즘 들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오곤 했다. 집으로 오는 손님은 나의 지인인 경우가 전부였으나, 이젠 내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이의 친구가 오는 것에 꽤나 익숙해졌고, 그럴 때마다 아이의 장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었다. 아이들의 간식을 챙기고,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기에, 다른 생각을 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서, 9시를 넘어 10시까지 놀다가 가는 경우들이 벌어졌다. 고지식한 나는 9시쯤이 넘으면 남의 집에 있는 것이 결례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집에 갈 생각이 없어보이는 아이 친구를 쫓아낼 수도 없었다.

“아줌마는 무슨 일을 해요?”

“이건 먹을 만 하네요.”

…. 10살 아이의 뒷담화를 하는 것 같지만, 몇몇 대화를 통해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곧 내 아이의 아빠에 대해 물을 것 같다는 느낌. 그리고 상상은 곧 현실이 됐다.

10시에 집으로 가려던 아이 친구는

“근데 왜 얘 아빠는 집에 안와요? 한번도 못봤어요”하고 말을 던졌다.

“….”


미리 준비해둔 대답은 “아~ ○○ 아빠는 늦게까지 일을 하셔”였었다. 이 질문을 내게 한다는 건, 아빠와 따로 산다는 걸 아이가 친구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거였고, 아이가 말하지 않은 정보를 내가 흘려서는 안되는 것 같았다. 이것은 아이의 인간관계이므로, 섣불리 말하지는 않겠다는 것이 오랜 고민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답변을 준비해뒀지만, 막상 현실에선 내뱉지 못했다.

"아…."

어색한 몇 초의 침묵 후 “ ○○ 아빠는~~~”하고 말을 하려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아이가 말을 가로챘다.

“□□야, 내일은 몇 시에 놀 수 있어?”

“나? 내일 학원 마치면 5시? 너는?”

그렇게 질문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내 아이가 말을 가로챈 건, 의도적인 것이었을까? 아니면 헤어지는 그 순간, 정말로 궁금해서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질문을 던진 것일까.

여러 상황을 봤을 때, 후자에 더 가깝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이 친구와 나는 몇 계단 밑에 있었고, 신발을 늦게 신은 내 아이는 뒤이어 계단을 내려 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아이에게 친구의 질문을 들었는지, 그래서 말을 가로챈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관뒀다. 내 아이가 그렇게나 눈치빠르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거면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나아보였다.

아빠와 따로 산다는 걸 아이는 인지하고 있었고. 아빠와 엄마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걸 아이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말할지는 아이의 선택이지 않을까? 숨길 필요가 없음을 알려줘야 하는 걸까?

정말, 모르겠다.


문제는 며칠 후에도 이어졌다. 아이의 친구들이 놀러오는 시각은 주로 5~6시 사이였고, 밥을 먹지 않은 채 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저녁을 챙겨먹이고 있었다. 아이 친구의 어머니가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왔다. 너무 미안해서 차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내용. 마침 아이들은 내 곁에서 함께 놀고 있었고, 아이 친구의 어머니는 잠시 내려와 커피나 한잔 마시자고 말했다.


워킹맘으로 10년간 아이를 키우며, 아이 친구 엄마와의 만남은 꽤나 꿈꾸던 상황이었다. 엄마들을 통해 학교 소식도 접하고, 또래 애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듣고도 싶었다. 쉽게 이룰 수가 없었던 그 엄마 관계를 마침내 할 기회가 온 것이었지만, 갖은 핑계를 대며 만남을 거절했다.

“아, 애들끼리 있기엔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 제가 오늘은 진짜 좀 피곤해서요.”


사실, 나는 … 덜컥 겁이 났었다.

“애들 얘기로는 애 아빠가 집에 안온다던데..?”라는 질문을 받게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이혼소송 중이에요”하고 스스로 밝히는 건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의 친구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니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면 어쩌나, 이제 막 친해진 아이들에게 놀지 말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커피 한잔'을 듣는 순간부터 내내 떠올랐다. 돌아봐도 좀 지나친 상상 같지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 이야기를 하기는 너무나 어려워보였다. 촉이랄까, 여러 번 통화를 한 적은 있었기에, 이 분이 남편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능력도 없는 나는, 결국 “다음에 꼭 봬요~~~”를 외치며 전화를 끊었다.






선고에 대해 생각하다 잠을 설친 어느날, 출근준비를 하며 호피무늬 치마를 손에 들었다. 소송을 시작할 즈음 덜컥 사버리곤 몇 번 입지도 않은 화려한 무늬. 모자 달린 블랙 원피스, 모자 없는 블랙 원피스, 단추 있는 남색 원피스, 멜빵 블랙 원피스 정도를 돌려가며 입는 평소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볼 때, 꽤나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내게 이혼의 이미지는 ‘센 언니’같은 것이었다. 홀로 아이까지 키우는 강인한 모습에는 왜인지 호피무늬, 숏커트, 까만 가죽자켓 등이 어울렸고, 이런 무늬가 어울리는 강한 사람이 되고 말겠다며 질렀던 것이 호피무늬치마였다. 옷을 산 당시에도 안 어울리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2년이 흐른 지금 봐도 좀 지나치다 싶게 안 어울리는 옷이었다. 그래도 입고 나섰다. 이런 강렬한 무늬에 내 유리멘탈이 깊게 숨겨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단단해 보이는 껍질로 감싸고 있으면, 바사삭 금방 금이 가 버리는 마음 같은 건 숨길 수 있지 않을끼.


다음 주. 선고 기일 이후 어떤 글을 쓰고 있을지 매우 궁금한 날들이다. 그래, 사실 선고는 별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판사가 “이혼하지 마시오!” 한다 해도 내가 항소를 할테고 “이혼하시오” 한다면 남편이 항소를 할 것이므로. 2년을 기다린 판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은 힘들겠지만, 별 의미를 두지 않으려 벌써부터 애를 쓰고 있다. 어차피 항소가 이어질테니 첫 판결은 의미가 없으리라. 호피무늬 치마로 유리멘탈을 숨기듯, “괜찮다 괜찮다” 크게 일억번쯤 말하면 무슨 결과든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멘탈이 아작날 결과라면, 그건 또 뭐 어쩔텐가. 삶은 이어질테고, 나는 그저 원하는 것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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