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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Jul 14. 2022

(33) 역시,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지

선고 후 2주. 2주는 정신없이 흘렀다. 지인들에게 이혼 선고 소식을 알리고 축하(?)를 받기도 했고, 내 기분을 추스르기 위해 애를 썼으며, 정신없이 몰아치는 회사일도 쳐내며... 버텼다. 정신을 차려보니 판결문을 받은지 2주가 다 되어 있었다. 좀 더 솔직히,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마시지 않을 이유보단 마셔야 할 이유가 차고 넘쳤다. 아아, 나는 고생했으니까. 어차피 맨정신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을테니까. 어떤 식으로든 2주를 쉽게쉽게 흘려보내는 것. 그것만을 목표로 삼았고, 2주를 하루 앞두고는 '아아, 이대로 끝인가보다'하며 마음을 놓기도 했던 것 같다. 


변호사님께 이혼소송에서의 항소에 대해 물었고, 인터넷 검색도 수시로 했었다. 공통적인 얘기는 이혼소송의 경우 항소를 한다해도 결론이 달라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 선고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나 사실을 제시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나에게 바람같은 유책사유가 있다면 그것을 증거로 제시하겠지만, 바람같은 건 생각할 여력도 없는 것이 현실. 그러니, 1심 때의 것과 비슷한 내용을 2심에서 제출할 수밖에 없을테고 결론 또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남편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터였다. 항소를 하면 또 변호사 비용을 내야 할테고, 아무 의미없는 소송을 위해 변호사 비용을 들여 다시 재판을 할 이유가 무엇일까. '합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판결문을 받은지 딱 2주가 된 날. 오전 11시 16분에 카톡 알람이 울렸다. 

“상대방이 항소장을 제출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하아…….

눈으로 글씨를 따라 읽으며,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어버렸다. 조용한 사무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너무 큰 소리를 냈음을 인지하고 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변호사 사무실의 누군가가 보낸 카톡. 보통은 "네", "알겠습니다" 정도의 답만 해왔었는데, 이번엔 진심을 담아 답을 써보냈다. 

"올 여름엔 지리산이나 다녀와야겠어요. 정말 지리지리하네요."

딱 그런 기분이었다. 굉장히 지리지리지긋지긋, 지리멸렬 했다. 1심 때도 진술서 등으로 마지막까지 진을 다 빼놨던 당신이었으니, 그래, 설마 이대로 끝날까 싶기도 했었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왜 희망을 가졌을까. 상대에 대해 알만큼 알면서, 이대로 끝날수도 있으리라는 허튼 기대를 왜 품었던 걸까. 바보 똥개 머저리. 기대하지 않았다면 좌절할 일도 없었을 텐데. 바보 똥개 머저리. 


아버지 기일에는 선고가 내려졌었다. 기일 미사 내내 속으로 '감사해요, 감사해요. 도와준거라 믿어요. 감사해요'를 가볍게도 외쳐댔었다. 

항소장이 접수된 건 어머니 기일 전날. 몇주 만에 완전히 다른 마음으로 어머니 기일 미사에 참석했었다.  

'아아, 막을 방법이 없었나요. 설마 아빠가 이혼 찬성하고, 엄마가 반대하는 그런 건 아니겠죠?'

바보같은 생각인 걸 잘 알면서도, 하필 기일 시즌에 작정한 듯 터지는 이혼관련 일들은 자꾸 부모님을 떠올리게 했다. 이럴 때 꿈에 좀 나와서 '걱정하지마라. 미래는 말이야-' 하고 말해주면 좋을텐데. 머나먼 미래를 알려줄 수 없다면 '이번주 로또 번호는-' 이라도 알려주면 좋을텐데. 그냥, '다 지나갈거야' 한마디만이라도, '힘내' 한마디만이라도 해주면 참 좋을 것 같은 날들이다. 






선고 이후, 원망에 절절 매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였다. 내 소중한 마음에 이런 원망을 품다니 흘려보내자, 하고 수십번 마음을 먹어도 심장과 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펄펄 끓고 있는 기분. 날씨도 덥고, 내 속도 덥고. 이대로는 불에 탈 것만 같아 맥주를 그렇게나 들이켰는데. 

항소가 접수됐다는 걸 인지하고나서는 정말, 깊은 곳 어딘가가, 팔팔팔팔 끓는 것 같았다. 이 화를 대체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 걸까. 상대에게 쏟아붓는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남편이 항소장을 제출했다는 그날은, 아이가 남편집으로 가기로 약속되어 있던 날이었다. 처음 약속은 저녁 9시였지만, 10시는 넘어야 데리러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문자가 아이의 핸드폰으로 왔고, '10시는 넘어야'라는 말에서 10시 30분쯤을 예상한 나와 아이는 그 시각에 맞춰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아빠 올 때까지 게임해도 되지?" 

아빠집에서 가지고 놀 장난감까지 다 챙겨둔 아이는 내게 졸린 눈으로 저런 질문을 던졌고, 곧 오겠지 생각하며 게임을 허락했지만 11시가 넘어도 그는 연락이 없었다. 잠을 잘 수도 없는 기다림의 시간들. 그가 도착한 건 11시 40분이었다. 


그래, 나는, 화를 어쩌지 못해 '고자질'하듯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러 올 때는 늘 이런 기다림이 반복되곤 했으니까. 그리고, 이런 기다림은 결혼 당시부터 꾸준히 한결같이 나를 힘들게 하던 부분이었다. 그의 늦음에는 늘 이유가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상황이 그랬어."

"일찍 오려고 최선을 다한거야."

이런 말을 하는 상대에게 화를 내면 그건 싸움이 되곤 했다. 

"이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왔는데, 그렇게밖에 말을 못해?"

불보듯 뻔한 대화. 약속에 대해 지적할 에너지도 애정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저 '또 늦네'하면 될, 익숙하고 익숙한 일. 


그럼에도, 팔팔 끓는 마음은 더 뜨겁게 데워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의 도착 연락을 받고 아이를 1층까지 데려다주는 그 짧은 시간동안, 스멀스멀 화가 자꾸 치솟았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이 상황 때문인지, 정수리에서 땀이 삐질삐질 날 정도로 화가 났다. 아이에게 웃으며 "잘 다녀와" 인사를 할 때 즈음엔, 하나 둘 숨을 고르며 발가락에 힘을 꽉 줘야 했다. 정신차려. 정신차려.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지 않으면, 정말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것만 같았다. 

"왜 항소까지 하고 지랄이야. 미친놈아!!"

......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말이, 입밖으로 나올까봐 입술에도 힘을 꽉 줬다. 습습후후. 하나 둘 하나둘. 애가 보고 있어. 흥분하지마. 정신차려. 습습후후. 일단 웃으면서 보내고, 집에가서 찬물로 샤워를 하자. 샤워를 하면 괜찮아 질거야. 정신차려. 


다행히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인사를 하며 아이를 보냈다. 당연히, 남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도 모를 만큼, 나는 남편을 마주할 때마다 의식적으로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집으로 올라와 샤워까지 마쳤지만, 갑갑함은 조금도 사라지질 않았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잠은 노력할수록 달아났다. 하..... 또 몇 년이 더 걸릴까. 항소하면 그놈의 진술서를 또 써야 하나. 그러니까 내가 '고소'를 당한 거잖아. 내가 뭘 잘못한거지. 

부들부들 분을 삭이지 못해 잠들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참 웃기기도 했다. 이건 뭐,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던가. 진정 좀 해. 저 사람때문에 기분 상하지 않으려고, 그런 일 더 만들지 않으려고 소송도 하고 있잖아. 결국 끝나. 진정해. 습습후후. 






예전에 쓴 글에서 이런 비유를 했던 것이 떠오른다. 

남편과 아이와 시댁 식구와 외딴섬에 살던 나. 매일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여기서 죽든 저 바다 건너 다른 섬으로 탈출하다 죽든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죽을 각오로' 용기를 내서 아이를 데리고, 첨벙 바닷물에 뛰어 들었었다. 물은 차가웠고 하늘을 까맸다.

나는 스스로의 예상보다 강한 체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섬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점차 더 힘이 차올랐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고 태양이 떠올라 주변도 밝아졌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앞을 살피던 그때, 발목에서 확 당기는 힘을 느꼈다. 내 발목엔 남편이 묶어둔 끈이 남아있었다. 웃으며 끈을 당기는 남편과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쳐 멀어지려 애쓰는 나. 


선고는, 마침내 반대쪽 다른 섬에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신호처럼 느껴졌었다. 

'여긴 어디지, 와 세상에,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구나' 생각하며 두 다리로 새로운 땅에 우뚝 선 느낌. 그런데 이번에도 발목에서 힘이 느껴진다. 휘청. 방금 디딘 땅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기도 전에, 발목에 묶인 끈 때문에 꼬꾸라진다. 끌려가지 않을거야. 눈 앞의 모래사장을 힘껏 잡아보지만, 아무 것도 지지할 것이 없는 상황. 속절없이 질질 끌려가 다시 바다로 풍덩. 

어푸어푸, 얼마나 더 발버둥을 쳐야할까. 이 끈을 내 힘으로 풀어낼 수 없다는 비참함. 남들이 풀어줘야 한다는 걸 잘 알기에, 그저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풀어주세요, 이 끈을 제가 풀 수가 없대요. 제발 이 끈 좀 풀어주세요. 


내 속 깊은 곳에서 바글바글 무언가가 끓고 있다. 화를 풀어낼 방법을 몰라서 자꾸 눈물이 나는데, 이깟일로 울어버리는 스스로에게도 화가 난다. 건드리면 다 죽여버릴거야, 생각하지만 누구를 죽여버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곁에는 아이밖에 없다. 내 기분을, 이 화를, 아이를 향해 쏟지는 않으리라. 이런 다짐을 매일같이 하고 있다. 아이를 상대로 화풀이를 하는, 그런 최악의 엄마는 사양이다. 습습후후.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아본다. 습습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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