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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Sep 01. 2022

(34) 안녕? 니가 항소장이구나

상대의 항소장이 접수된 건 7월 초. 종이 한 장이 갖는 위력은 꽤나 엄청난 것이어서, 한동안은 꽤 절절거리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혼을 결심했던 시간들이 떠오르는, 그런 날들이었다.


처음 이혼을 '상상'했을 때, 가장 마음을 괴롭혔던 건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혼자 애를 키울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 모든 걸 참고 살 수 있을까. 그야말로 진퇴양난. 그런 시간들을 보낸 후 결심한 건 결국 이혼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이혼소송이라는 것을 시작하고 나서 한동안은, 밑도 끝도 없는 원망에 시달렸었다.

처음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차올랐다. 진짜 너무했어. 나는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가네. 나쁜놈이네. 뭐 어쩌자고 그렇게까지 말을 막할까.


상대에 대한 미움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다음에는 그 모든 원망들이 방향을 틀어 나를 찔러왔었다.

멍청한 년. 사람 볼 줄도 모르고, 덜컥 결혼은 왜 해서. 어디갔니 내 청춘. 20대 마지막부터 30대까지의 시간이 통으로 사라진 기분이었다. 멍청한 것. 밑빠진 독이라고 생각했을 그때부터 돈이라도 모았어야지. 이렇게 된 건 다 내가 멍청하기 때문이야. 남들은 얼마나 잘 사니. 혼자서 잘난 척 사랑 노래 부르다가 꼴 좋다. 다 자업자득이지. 개똥멍청이야.


항소장은, 그 모든 기분들을 다시금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앞으로의 소송 진행? 그런 건 모르겠고 "에잇 나쁜놈, 역시 너는 끈질기구나! 에잇!"하며 어떤 날을 흘려보내면, 다음 날엔 "에잇 멍청한 년. 결혼 결심한 내가 미친거였지. 다 자업자득이야!"를 반복하며 40살의 여름을..., 아주 뜨겁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어느 금요일 퇴근길. 집 현관에 붙어있던 낯선 쪽지(?) 하나는, 가뜩이나 뜨거운 날들을 더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편물 도착 안내서'

우편물은 '법원등기'로 분류되어 있었고, 보낸 분은 '가정법원'으로 명기되어 있었다. 개똥멍청이라 하더라도 지금 나에게 온 것이 '항소장'이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법원등기의 경우 본인이 직접 받아야만 하는데, 낮에 사람이 없었으므로 우체부님이 우편물을 다시 가지고 가버리셨다는 것도 쉽게 짐작이 됐다.


소송을 시작할 때는 이미 변호사를 선임한 후였기에, 이런 우편물을 받은 적이 없었다. 법원에서 무엇을 보내든 법적대리인인 변호사 사무실로 전달이 됐고, 변호사 사무실에선 PDF 파일로 카톡으로 깔끔하게 내게 전달을 해 줬었다. 1심이 완료되었으므로, 그와 함께 법적대리인 또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채였고, 그게 우편물같은 문제로 내게 다가올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었다. 


일단, 안내서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우체부님은 평일에 다시 방문할테니 집에서 받거나, 우체국으로 직접 찾으러 오는 방법을 제안해 주셨고, 나는.. "그거 그냥 우체통에 꽂아놓고 가시면 안되나요. 분실 안될거예요. 상품권도 우편으로 받은 적 있어요"라며 구차하게 굴었다. 평일에 집에 있는 건 다음주 일정을 상상하건데 불가능해보였고, 우체국으로 직접 가기엔 너무나 귀찮았다. 악!악! 그러니까 왜 항소같은 걸 해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만들어!라며 화가 치솟던 그 무렵, 문득 다른 걱정 하나가 떠올랐다.


'우편물이 반송되어서 법원으로 돌아가고, 법원에서 만약에 회사주소로 항소장을 보내버리면 어떡하지?'


말도 안되는 전개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한 번 그런 생각이 떠오르니 '혹시나'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질까봐 꽤나 진지하게 걱정이 됐다. 사람이 하는 일, 어디서든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지 않을까. 걱정에 압도된 개똥멍청이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에 항소장을 손에 넣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우체부님께 월요일 점심시간에 바로 찾으러 가겠다고 말을 해버렸다.






월요일.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도저히 운전할 자신이 들지 않는 그런 장대비였기에, 버스를 타자 결심을 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더웠고 축축했고 몹시도 짜증이 났다. 지나가던 차는, 드라마 한 장면처럼 물을 뿌리고 지나갔다. 옷이 흠뻑 젖었지만, 화낼 기력 따윈 없었다. 개똥멍청이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항소장이 회사로 올 가능성을 막아버리자!'

우체국에 들어섰을 땐, 땀인지 비인지 모를 것들에 잔뜩 젖은 채였다. 온몸에선 땀이 났고,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돌아가야 했으므로 마음에서도 땀이 났다. 직원에게도 내 상태는 꽤나 심각해보였으리라. 어쨌거나 그는 내 이름을 물었고, 그 다음엔 "등기를 보내신 분이 누구인가요?"하고 질문을 던졌다.


마음의 준비따위 하지 못했기에, '아, 아'하며 렉이 걸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목을 흠흠 가다듬고, 직원쪽으로 바짝 다가가 "가정법원이요"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스윽 다가갈 때 직원분은 흠칫 놀라는 듯 했지만, 내 대답엔 딱히 반응이 없었다. 그저 몸을 움직여 우편물을 찾기 시작했을뿐. 직원의 등을 보며, 한껏 움츠러든 스스로가 또 한심해졌다. 개똥멍청이 같으니.


항소장을 받아들고, 비를 뚫고 또다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어쩜. 월요일 점심시간에 이렇게나 사람이 없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만큼 굉장한 비이긴 했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바로 나요, 하는 꼴로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버스는 올까? 과연 올까?

버스를 기다리며 우산을 앞으로 세워 몸을 막고 항소장을 가슴팍 깊이 소중히 품었다. 종이를 젖지 않게 하겠다는 본능(?)적인 태도였지만, 품고 보니 웃겼다. 세상에. 이게 뭐 귀한 거라고. 버스에 타고서야 봉투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든든한 내 품 덕분에 녀석의 상태는 온전했다. 눈에 띄는 건? 내 이름 옆에 적힌 한 문장.

"배우자에게는 주지 마십시오."


발송자가 무려 가정법원인 봉투, 전 배우자가 보냈을 것이 분명한 그 봉투를.. 현 배우자가 받아드는 일이 세상에는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수신인 이름 옆에 떡하니 문구 한 줄을 넣기까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 그 문구를 보고있자니, 확실히 느껴지는 건 딱 하나있었다. 나는 아직도 인생 '쪼렙'인 것 같다. 담담해지지 못하고 사사건건 바르르 떠는 쪼렙. 언제쯤 담담해지게 되는 걸까. 


버스에서 내려 김밥 한 줄을 사들고 푹 삶긴 시금치같은 몰골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점심시간 동안 하루치의 에너지를 모두 써버린 기분이었다. 온몸이 푹 삶긴 기분이랄까. 축축했지만 더웠고 찝찝했지만, 아무튼 항소장은 더 깊이 껴안으며 회사로 들어섰다. 사무실에선, 혹시나, 누군가가 이 봉투를 볼수도 있으니까. 공적 공간에 있는 누군가가 봉투를 보게 될까봐, 이 비를 뚫고 녀석을 구해온 것이었으므로. 소중히 깊숙히 봉투를 품고, 자리로 돌아와 쇼핑백을 하나 꺼내 그 안으로 항소장을 접어 넣었다. 퇴근할 때 챙겨갈 수 있도록 신발 옆에 쇼핑백을 내려뒀다. 그리고 김밥을 까 먹었다. 그럼에도 김밥은 참 맛있었고, 우걱우걱 씹어삼키며 생각했다.

'정말 멋진 40살 생일이구만.'

개똥멍청이에게 꼭 어울리는 그런 점심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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