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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Feb 02. 2023

(36) 우린 끝까지 참 달랐다-1

무려, 4개월 만의 글이네요. 제 소식을 궁금해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사.....사... 사랑합니다! ㅎㅎㅎㅎㅎㅎ그동안의 일상들 하나씩 정리해 올릴게요..... 이젠 좀 자주 뵐 수 있기를, 저부터가 매우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핫. 

4개월 전 글은, 이혼 소송 승소 후 항소 시작에 관한 것이었네요;;; 

그 뒤의 이야기를 이어가볼까 합니다. 





항소가 접수된 건 7월 초. 어영부영 시간은 잘도 흘렀고 느리고 느린 가정법원 시간표도 어쨌거나 흐르긴 하는 모양이었다. 가정법원의 특징은 뭐랄까..... 잊을 만 하면 내가 소송 중에 있음을 상기시켜준다고나 할까. 소송 그런 건 모르겠고 일상을 살자!!! 하고 살아가고 있으면,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찾아오듯 툭, 우편물이 도착했다. 


변론기일이 잡혔다는 우편물이 온 건 10월 초. 10월 중순에 첫 변론기일이 잡혔다고 했다. 항소장부터 변론기일 안내서까지 모두 등기우편으로 왔으므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우체국에 다녀오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퇴근하는 길, 집앞에 우체부님이 붙이고 간 스티커가 보이면 아주 자연스레 우체부님께 전화를 걸었다. 점심시간에 찾으러 간다고 말을 하고, 다음날 점심시간이 되면 우체국으로 향했다. 익숙해졌다해도.. 정말 의문은 들었다. 저기요, 가정법원님. 21세기 아닌가요. 우편물을 오프라인으로 전달하는 것 말고는 정말 방법이 없나요. 정말요? 네? 


사실, 해결책은 있었다. 1심 때처럼 변호사를 선임하면 되는 거였다. 변호사만 선임하면 우편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으리라. 1심 때의 변호사님과 수차례 통화도 했다. 이대로 항소가 진행되면 선임하겠습니다, 하며 계약서도 미리 받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하지만…, 선임비를 아끼고 싶었다. 2심은 보통 1심보다 비싼 선임비를 내야 하지만, 내 경우엔 1심을 승소했고 2심에서도 다툴 만한 새로운 쟁점이 없었기에 1심과 같은 비용을 내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같은 비용, 400만 원. 안타깝게도 그건 내게 너무 큰 돈이었다. 제발 남편이 항소를 취하해주길. 그런 마음으로 계약을 차일피일 미루던 상황이었고, 변론기일이 열흘쯤 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온갖 용기를 끌어모아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혹시, 항소 취하할 생각이 없나요?”

늘 그랬지만, 남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괜히 돈 쓰고 변호사 선임하지마. 나도 안 했어.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 시간 많이 안 걸릴 거고 의견 조율하고 합의서 작성한 후에, 내가 취하할게.”


처음 항소가 시작됐을 때, “왜 항소를 했냐”는 내 질문에 남편은 “2주 안에 항소 접수 안 하면 완전히 끝이라니까 일단 낸 거야. 나도 고민하고 있어”하고 답을 했었다. 변론기일을 앞두고 취하 의사를 묻는 내게 남편은,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이 보내온 카톡을 여러 번 읽어야 했다. 만나자는 제안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1심 선고가 나온 마당에 합의서라니.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일단 차분히 생각이란 걸 해야 할 것 같았다. 변호사를 선임해 모든 걸 맡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지만…, 변호사 선임 이후에 남편이 취하를 하면? 나는 선임비를 날리게 된다. 400이면 몇 달 치 아이 학원비인데, 400이면 맥주가 몇 캔인데, 400이면 영어학습지도 시킬 수 있고, 400이면…. 엉엉. 구질구질하지만 이게 눈앞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여러 번의 방학도 걱정됐다. 남편의 협조 없이는 방학을 보내기 어렵다는 것이 최근의 결론. 지금의 양육 협조에 변화가 있을 만한 어떤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 번쯤, 그래, 한 번쯤 더 이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고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또 비겁한 선택을 하는 걸까, 자문도 들었지만…, 돈 400과 돌봄 공백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대면 대화는 1시간 이내로’라는 조건을 내걸고, 시급 400만 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죽도록 싫다 한들, 이것이 현실이니까. 





법원에서 변론이 진행된다는 그 시각에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변론기일에 법원에 갈 생각이 없다는 남편의 말을 나는 믿지 못했고, 둘 다 절대 변론에 참석할 수 없는 시각에 다른 장소에서 만나자는 것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예정되어 있던 변론은 오후 4시. 우리는 3시에 만나 4시에 헤어지는 것으로 일정을 정하고, 만남의 장소는 내가 정하기로 했다. 평일 오후 3시, 너무 조용한 곳은 피해야 했다. 나 혹은 남편이 얼마나 소리를 질러댈지 상상하기 어려웠고, 우리의 대화가 남들에게 들리는 것도 걱정이 됐다. 고민하다 결정한 곳은 넓~은 창고형 베이커리. 늘 적당히 소란스러웠으며 음료도 함께 판매하니 딱 적절하다 싶었다. 


그렇게 버티더니 항소를 취하한다는 이유가 뭘까. 남편은 만남 전에 “나도 더이상 붙잡지 않을 거니까,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라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 항소 취하를 조건으로 내게 무엇을 요구하려나, 매우 불안했었다. 사실 내가 가장 걱정했던 건, 글에 관한 것들이었다. 남편이 브런치를 알게 되고, 그걸 다 삭제하라고 하면 어떡하지. 책 발간을 눈치 채고 책 내용에 대해 따져대면 어떡하지. 글같은 거 더이상 쓰지 말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게 젤 두려웠었다. 

항소 취하 조건이라면 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랬기에, 혼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니가 뭐라 하든 내가 하고픈 걸 할테다, 글을 그만두는게 항소 취하 조건이라면 응하지 않고 변호사를 선임할 테다,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 같은 거 이제 더는 두고 보지 않을 테다!!!! 다짐은 했지만.... 그럼에도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거였다. 

(이때 잔뜩 쫄았던 경험으로 인해, 모든 과정이 끝날 때까지 글을 쓰지 못했다. 브런치도 인스타도 아예 내버려두고, 모든 과정이 끝난 다음 그때 시작하는 게 낫겠다, 하는 다짐을 했었다. 사실.... 지금도 여파가 남아있는 것도 같다. 본다 한들 어쩔텐가 싶지만, 그렇게 해서 피곤해지는 건... 너무 싫은 일이니까.)


반차를 내고 약속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정확한 시각에 남편도 도착했다. 조정 결렬 전 만났으니, 7개월 만이었다. 그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남편의 어깨 혹은 테이블만 바라보며 말을 했고, 남편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도 없었다. 확실한 건, 일로 만난 사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그 누구의 개입도 없이 우리는 단둘이 마주 앉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대체 뭔데?”

뾰족하게 던지는 내 질문에 남편은 태블릿을 꺼내 미리 작성해 온 문서를 보여줬다.


- 약속한 날짜가 아니라도 아이를 보고 싶을 때면 데려가는 것을 허락해준다.

- 아이의 주변 친구들이나 학교 등에 이혼 사실을 너무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다.

- 앞으로 아이에게 이벤트(학교 행사, 체육대회, 결혼, 입대 등)가 있을 때는 웬만하면 함께 자리한다.

- 아이의 학교생활 등에 문제나 특이사항 발생시 공유하고 함께 의논해 해결한다.

- 건강에 큰 이슈가 발생할 시 반드시 이를 알리고 공유한다.


…….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한줄 한줄 문서를 읽어가면서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아, 역시 나따위 글을 쓰든 책을 내든 남이 알 리가 없구나. 아아, 괜히 걱정했어 하는 마음이랄까. 

그리고 든 생각은....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이구나 하는 깨달음. 올해  10살인 아이의 입대와 결혼 등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항소 취하를 걸고 나누는 조건이라기엔 너무 소소했다. 이게 뭐야, 싶은 마음이랄까. 그리고…, 뭐랄까, 너무 다정했다. 남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내겐 그랬다. 특히 건강상의 이슈 부분. 유방암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터였기에 남편은 그 유전에 대한 걱정을 자주 했었고, 40세가 되면 매년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거듭 말하곤 했었다. 그가 40살이 된 나를 앞에 앉혀두고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알려달라는 문서를 들고 와, 항소 취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 한결같아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우리는 이혼할 사이니까. 그런 기억 같은 건 굳이 헤집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온갖 기분과 온갖 감정을 삼키려 마스크를 내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순간, 본인이 적어온 문장들의 의미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떨렸다. 잠시의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마스크 내린 거 오랜만에 보니까, 진짜 울컥하네”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남편의 목소리가 떨리는 순간부터 그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모른 체했다. 울컥한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동요도 없는 듯 다시 마스크를 쓰고 테이블만 바라봤다. 나라는 인간은, 내 앞에서 누군가 울면 그대로 따라 울어버리는 특이체질의 인간이었으므로. 이 상황에, 상대의 감정에 동요되어 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남편의 말에도 나는 그저 묵묵히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래…, 그랬던 우리였다. 연애 당시, 남편의 이런 순수함이 좋았던 때가 있었다. 계산적이지 않은 우직한 모습이랄까. 지랄 맞은 성격 밑에 깊게 깊게 숨겨진 순수한 성품이랄까. 그런 것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혼 이후 계산적이지 않은 그 순수함이 얼마나 버거운 것인지를, 나는 너무 처절하게 배워야 했다. 특히나 아이가 태어난 후, 나는 안정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결혼생활을 이어가고픈 현실적인 생각뿐이었지만 남편은 연애감정만 마음에 품은 채였다. 기본 생각이 다르니 대화는 늘 어긋났다. 연애감정? 그딴 건 팍팍한 생활을 끌어가며 모두 증발되어 버렸다. 하지만 남편은 한결같이 순수함을 품은 채, 나를 대하고 있음을 참 새삼스럽게도 깨닫게 됐다. 그래, 변한 건 나였다. 생활에 치여 사랑 따위는 잊은 지 오래. 사랑 그딴 건, 다시는 내 삶에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고 있었다. 남편은 여전히 그리움을 품고 과거를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우린, 끝까지, 참으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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