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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Nov 20. 2020

은행아 은행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보자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아이가 있었고, 아이가 속한 이 가정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내 인내심이 부족해서 아이의 성장 환경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만 힘들면 된다, 나만 참으면 된다고 수만 번 다짐했지만 그럼에도 결국 한계는 왔다.  


물이 가득 찬 컵, 그 컵에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넘쳤다고 해보자. 누가 물을 넘치게 만든 걸까? 물이 이미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까, 물이 가득 찬 줄 모르고 마지막 한 방울을 떨어뜨린 사람 탓일까. 누구의 탓이든, 내 안의 인내심이라는 컵이 결국엔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기어이 물을 넘치게 만든 마지막 한 방울은 한심하게도 ‘신용카드’였다. 남편이 쓴 소액결제와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카드값. 그것이 나의 임계점이었다. 처음엔 언제나 그랬듯 참았다. 또 싸우게 될 바에야 말을 말자고 생각했던 것. 하지만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소액결제가 꾸준히 이어졌고, 월급으로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는 날이 여러 달 지속되면서 ‘진짜 더는 못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이런 상황이 평생, 영원히 계속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말해도 달라지지 않는 남편, 아무리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경제 상황. 결혼 초에 느꼈던 ‘쳇바퀴의 매력’을 결혼 7년 차에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나 혼자 달리고 달려도 제자리인 현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움츠리고 움츠리던 마음이 어느 순간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의아할 정도의 변화이긴 했다. 힘들어 죽겠네, 아아, 차라리 콱 죽어버릴까? 생각하다가 이대로는 절대 안 죽어, 억울해서 못 죽지! 하는 심경의 변화였달까.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방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진 않았다. 남편의 생활을 더는 책임지기 싫어서 막연하게나마 ‘남편과 멀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뿐. 그렇게 며칠을 궁리한 끝에 생각해낸 게 ‘별거’였다. ‘따로 사는 게 어떨까?’ ‘따로 살려면 집이 있어야지’ ‘집을 구하려면 돈이 있어야지’로 생각이 뻗어나갔다. 그러다 떠올린 게 은행이었다. 



대기 의자에 앉아 창구에 앉은 직원들을 둘러봤다. 비교적 인상이 선해 보이는 직원이 있어서 그 사람이 나를 불러주기를 바랐다. 몸과 마음이 잔뜩 위축된 상태여서 뭐라도 붙잡고 위안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저어, 신용대출을 받고 싶은데 대출 가능 금액을 알 수 있을까요?” 선한 얼굴의 직원 앞에 앉아 준비해 간 멘트를 했다. 은행 직원은 필요한 서류를 가져왔는지 물었고 나는 신분증을 내밀었다. “연봉 등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서류는 없으세요?”라는 직원의 말에 대출의 세계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거구나, 생각했다. 신분증을 내밀면 내 신용을 조회해서 ‘귀하의 대출 가능 금액은 얼마입니다.’하고 즉시 알려주는 시스템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 건 없다는 사실에 당황한 나는 은행 직원 얼굴만 바라봤다. 은행 직원은 필요한 서류 목록을 프린트하더니 이 서류는 △△ 기관에서, 이 서류는 □□ 기관에서 받을 수 있다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역시, 선한 외모만큼 마음도 따뜻한 분이었다.필요한 서류를 준비해서 며칠 후 다시 은행을 찾았다. “연봉 이하의 금액이라면 신용대출이 가능하다.”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 그러면, 연봉 이하의 금액을 신용대출로 빌리고, 그걸 보증금으로 낸 다음에 또 전세대출을 받으면 집도 계약할 수 있는 건가요?” 


이런 질문이 너무 없어 보인다는 걸 잘 알았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아이와 살 집이 필요했으므로. 이런저런 설명이 이어졌다. 모든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결론은 ‘가능하긴 하다’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세상에! 나에게 돈을 빌려준다니! 벌떡 일어나 큰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 이제 부동산에 가보자. 적당한 집을 찾아서 신용대출을 받고 전세대출도 받자. 이자는 얼마쯤 될 테니, 월급에서 이만큼을 빼고 이걸 줄이면, 아이와 둘이 살 정도는 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잔뜩 그늘진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드는 기분이었다. 이런 긍정적인 기분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가, 싶어서 스스로가 기특했다. ‘와, 은행에 찾아갈 용기를 내다니! 정말 잘했어.’ ‘13년간 내가 지켜낸 신용아. 고생했어!’ 정말 오랜만에 내가 나를 인정했던 순간이었다. 이렇게 쉽게 풀릴 일이었는데, 그동안 나는 왜 방법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숨죽이고 버티기만 했던 지난 시간이 조금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딱 오늘까지만 후회하자. 그리고 더는 내 삶을 방치하지 말자, 다짐하며 은행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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