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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Nov 20. 2020

남편을 남겨놓고 이사를 했다

일하는 틈틈이 포털사이트에서 부동산을 검색했다. 적당한 집이 나타나면 약속을 잡고 점심시간마다 집을 보러 다녔다. 하루라도 빨리 집을 구하고 싶었다. 나와 아이가 지낼 수 있는 곳.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를 재울 수 있는 곳. 딱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충분한 집’을 찾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온갖 대출을 다 끌어와도 아파트는 무리였고 빌라 정도로 선택지를 좁혔다. 부동산에서는 단독주택도 권했지만, 아이와 단둘이 지낼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다. 만약 남편이 찾아와서 불같이 화를 내면 어떡하지, 남편이 강제로 아이를 데려가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만약’을 생각한다면 얼굴도 모르는 이웃사촌이라도 있는 게 나았다. 


그래서 빌라 위주로 집을 알아봤다. 가격이나 위치 등을 부동산에 말해두고 조건에 맞는 집이 나타날 때마다 가봤지만 뭐든 하나씩 맞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갑자기 가격을 올린다거나, 회사와 너무 멀거나, 아이 유치원과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나 혼자 사는 집이었다면 뭐가 됐든 괜찮았겠지만, 아이와 함께 거주할 집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이길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괜찮은 집이 나왔는데 보겠느냐고. 몇 번이나 실망한 전적이 있어서 별 기대 없이 도착한 곳은 역시나 낡은 빌라였다. 이번에도 꽝이군, 생각하며 집 안에 들어섰는데 웬걸. 보자마자 ‘여기다!’ 싶었다. 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집을 보는 순간 이곳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이 유치원에서 차로 10분, 곧 입학할 초등학교와는 도보 3분, 회사와의 거리는 차로 20분, 남편이 사는 집과 차로 10분…. 심지어 가격도 예상했던 것보다 저렴했다. 모든 기준을 충족시키는 집을 ‘운명처럼’ 만나자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남편과 멀어질 수 있겠구나.





“집 계약했어.” 

별거 이야기를 꺼낸 지 2~3주가 지난 시점. 이번엔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일방적으로 통보한 느낌이었다. 겨울잠에 빠진 곰처럼 잠을 자면서 용기라도 충전한 것인지, 집을 계약했다고 이야기할 때는 망설임도 없었다. 때린다면 맞아버리겠다거나 설마 몇 대 맞는다고 죽기야 하겠어? 라는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이 무렵엔 ‘내가 원래 이렇게 강한 인간이었나?’ 의아할 만큼 스스로가 조금 낯설기도 했다. 


마침내 이삿날. 이 상황을 시댁에 알리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짐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까지 아이를 돌봐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 것까지 먼저 부탁드릴 염치는 또 없었기에,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신 배려에 감사함도 느꼈다. 시아버지는 이삿짐을 나르는 내내 곁에서 지켜보시며 끝도 없이 담배를 태우셨다.


 두 분의 마음을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집을 박차고 나가는 며느리는 시부모님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워 고개를 숙인 채 짐을 날랐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까지, 세 사람이 살던 집에 남편의 짐만 남겨두고 나머지 짐을 챙겼다. 이삿짐 업체 직원들이 “어머, 남편만 두고 나가시나 봐요.” 같은 말을 할까 봐 걱정스러웠지만, 그분들 역시 연륜으로 모든 상황을 짐작한 것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 짐은 두면 되는 거죠?”라고 묻는 것들은 모두 남편의 물건이었다. 나는 아이와 생활할 때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챙겨야 했다. 새로 마련할 돈도 없었다. 결혼할 때 친정 오빠가 사준 TV, 내가 산 냉장고 등을 나는 악착같이 챙겼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게.”라던 남편은, 혼자서는 어떻게든 살 수 있다며 필요한 건 다 챙겨가라고 말했다.


함께 7년여를 살았던 남편의 집, 시댁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도 같은, 아무튼 그런 남편의 집과 시댁을 뒤로 하고 차에 올랐다. 남편은 열심히 이사를 도왔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힘이 센 ‘남자’라는 존재와 부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나 혼자 이걸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든 해내기야 했겠지만, 남편이 도와주니 정리가 훨씬 빨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사를 마친 남편이 떠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문이란 문은 모두 잠그는 것이었다. 현관문을 잠그고, 활짝 열어뒀던 창문도 몽땅 잠가버렸다. 그리고 아이 곁에 누웠을 때 떠오른 건 남편의 얼굴이었다. 남편은 뭘 하고 있을까. 난장판이 된 집에 혼자 남은 남편이 어떤 상태일지 상상해보려 애썼다. 새삼 화가 나진 않을까, 갑자기 화를 내며 쳐들어오면 어떡하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만히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꽁꽁 잠가놓은 문들을 또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당연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침입자의 존재도, 남편의 존재도 모두 위협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위협을 떠올리다 보니, 이제는 정말 거대한 세상을 나 홀로 헤쳐가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전투력이 없는 인간인데, 내 곁에 있는 꼬맹이를 어떻게 지킨담. 막연함, 불안함, 걱정이 밀려왔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부터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내 책임이다, 이런 일을 벌인 건 나다, 잘 해내야 한다, 약해지지 말자, 더 강해져야 한다, 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이사 첫날,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쉽게 잠들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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