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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Nov 22. 2020

월요일 오전 9시, 길 위에서

년간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회사에 다니면 아이를 남편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남편을 자주 봐야 했다. 코로나 확진자 수에 따라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아이 학교 상황 역시 결심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상태가 몹시 위태롭다는 게 느껴졌다. 회사나 길에서 조금만 큰소리가 나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그대로 일시 정지. 평범했던 일상마저 조금씩 버거워지던 시기였다.


협의이혼은 불가능할 게 뻔했으므로 처음부터 고려하지도 않았다. 별거도 못 받아들이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게다가 별거 기간 내내 ‘이혼만은 절대 안 돼’를 주장하던 남편이었다. 소송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소송을 하려면 변호사가 필요했다. 간혹 변호사 없이 홀로 소송을 진행하는 사람도 있다고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내가 그 방법을 택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러다가 기각이라도 나오면 그다음 대안이 없었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여러모로 나아 보였다.


이 무렵 깨달았던 건 변호사 사무실이 정말, 정말, 정말 많다는 사실이었다. 전국으로 갈 것도 없이, 내가 사는 지역으로 범위를 좁혀도 엄청난 숫자의 변호사 사무실이 있었다. 와, 공부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중에서 한군데를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나와 내 아이의 인생이 달렸는데 신중해야 했다. 나를 승소로 이끌어줄 변호사가 절실히 필요했다.  


30분에 오만 원이라는 큰돈을 내면서 상담 투어(?)를 다녔다. 처음엔 많이 다녀보면 더 좋은 사람을 고르는 안목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누군가가 명확하게 ‘이 소송 승소할 수 있습니다’라고 확답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대여섯 군데를 돌아다닌 결과, 변호사마다 하는 말이 달랐다. 어떤 변호사는 이 정도 사유로는 이혼이 어렵다고 했고, 또 어떤 변호사는 높은 확률로 승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상담을 통해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이혼은 결국 판사의 판단에 맡겨지는, 그러니까 정답이 없는 싸움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법이 정해 놓은 유책 사유(도박, 외도, 폭행)가 우리 둘 모두에게 없었으므로 더욱더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내 이야기를 판사에게 잘 전해줄 변호사를 찾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잘 전하려면,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할 터. 마음이 가는 변호사가 한 명 있었다. 후줄근한 몰골로 질질 울며 말하는 나를 담담하게 다독이던, 깔끔한 정장을 입고 명확한 어조로 말하던, 적당히 단호하되 필요한 순간 다정함을 나눠주던 변호사였다.전화로 약속을 잡고 사무실에 방문한 때는 월요일 오전 9시였다.


어떤 ‘새로운 일’이 벌어지기 딱 좋은 시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변호사와 마주 앉았다. 탁자 위엔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신호탄이 될 서류가 놓여 있었다. 진짜 시작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부디 이 계약서가 나의 레테의 강이 되어주기를. 과거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살아갈 수 있게 마법을 부려주기를.




마음을 정하고 왔음에도 “계약서 쓰시겠어요?”라는 변호사의 말에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서류에 사인하는 순간 모든 일을 되돌릴 수 없을 터. 게다가 ‘계약서’라는 단어에도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이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과 ‘계약’이라는 단어가 안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아아, 하루만 더 생각하고 내일 다시 올게요, 할 마음도 없었기에 “네”라고 대답했다. 변호사는 내가 사인해야 할 곳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쳐주었다. ‘사건위임계약서’는 고작 4장, ‘사건명 : 이혼’이라는 단어도 그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이혼하려고 변호사 사무실까지 온 마당에 이 단어를 보고 놀란다는 게 새삼 놀라웠지만, 막상 활자화된 ‘이혼’이라는 단어를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는 좋은 이별은 할 수 없었던 걸까. 우리의 10년을 서류 몇 장으로 정리해 남에게 위임해버리는 것 말고 다른 끝은 없었을까. 남편과 대화도 하기 싫어서 혼자 변호사를 찾아온 마당에 아직도 ‘좋은 끝’에 집착하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변호사 사무실을 나섰다. 월요일 오전, 모두 바쁘게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게 될까. 끝도 없는 질문을 되뇌며, 천천히 걸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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