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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24. 2020

변론기일이 정해졌다

드디어 ‘변론기일’이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변론기일이란, 변호사들이 만나(본인 출석도 가능하다) 서로 이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말한다. 남편이 꾸준히 소장을 받지 않았기에, 내 변호사님이 ‘공시송달’을 신청했다고 하셨다. 공시송달이란 법원 게시장에 공고문을 게시해, 송달받을 사람이 송달 서류의 내용을 알 기회를 만들어줌으로써 송달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아무튼 ‘소장 전달과 동일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과정에 대한 허락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렇게 변호사를 선임한 지 5개월 만에 변론기일이 잡혔다.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변론기일 이틀 전. 밤 9시에 가톨릭 사제인 삼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늦은 시간에 울리는 전화는 불길함을 동반하는 법. 역시나 삼촌은 격앙된 목소리로 ‘내일 시부모님이 찾아오시겠다’는 연락을 받으셨다고 했다. 삼촌은 결혼 생활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이혼하는 조카가 못마땅한 듯, 나를 꾸짖다가 전화를 끊으셨다. 그런 삼촌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 삼촌은 목소리를 들으면 자꾸 화내게 되니 앞으로 문자를 주고받자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그리고 시부모님은 삼촌 혼자 만날 테니 집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삼촌이라는 울타리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결혼이 그렇듯, 이혼도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또 한 번 절감했다. 아이에 이어 가족들까지 나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있었다.




변론기일 하루 전.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삼촌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나는 남편이 변론기일에 대해 모르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소장을 받지 않은 상태이니 변론기일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삼촌의 전화를 받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소장을 확인했으니 시부모님이 움직이시는 게 아닐까, 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변론기일을 이틀 앞두고 남편이 법원에 찾아가서 공시송달을 취소하고 소장을 직접 받아 갔음이 확인됐다. 


담당 변호사는 상대방 또한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변론기일을 고작 하루 앞두고 변호사 선임이 가능하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럼에도 변론이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해서 더 놀랐다. 변론기일에 법원으로 가볼까, 하던 생각은 완전히 접었다. 혹시나 그곳에서 남편을 만날까 봐 무서웠기에 그냥 집에 있기로 마음을 굳혔다. 


변론기일 당일. 법원에 가지 않기로 했으므로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전에는 아이의 온라인 수업을 도왔다. 점심을 먹여 학원에 보내고, 조용해진 집에서 마음을 다스렸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그럼에도,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냉장고를 정리하고, 대청소를 하고, 침대 시트를 갈고, 샤워를 하고 난리를 쳤음에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무엇을 불안해하는지도 모른 채 불안에 떨었다. 손끝이 달달달 떨리다가 급기야 호흡마저 불안해졌다. 숨, 숨을 쉬어야 했다. 습습 후후- 습습 후후-. 숨을 길-게 내뱉는 게 진정에 도움이 된다는 글을 어디서 읽었던가, 누구에게 들었던가. 아무튼 숨을 길-게 내뱉으며 숨쉬기에 열중하는데 담당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정되었던 변론 시간에서 고작 12분이 지난 시점. 결과는 역시나 ‘속행.’ 다음 변론기일을 잡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남편 역시 참석하지 않았다고. 원고도 피고도 없이, 남의 가정사를 주제로 마주 앉은 양측 변호사는 각각의 의뢰인이 주장한 바를 전달했다. “원고는 이혼을 원한다.” “피고는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 결렬. 땅땅땅. “얼마나 더 걸릴까요?” 변호사에게 물었고, “오래 걸릴 겁니다.” 대답을 들었다. ‘오래’라…, 지나온 시간만큼 길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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