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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10. 2020

변론기일 다음엔 가사조사


소송이 진행되는 속도는 느리고, 느리고, 느리고, 또 느려서 성격 급한 사람들은 끝을 보기도 전에 포기하겠구나, 생각했다. 그 무렵 나는, 이것이 아주 은밀하게 진행되는 일종의 국가사업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했다. 국가가 소송 기간과 절차를 일부러 늘리고 늘려서 이혼하려는 사람들이 지치다 못해 알아서 나가떨어지게끔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혼율을 줄이려는 속셈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속도였다. 마감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이런 속도가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뫼비우스의 띠 위에 올라선 기분이 드는 날들이었다. 어디가 시작점인지, 끝이 있기는 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흘러왔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이토록 지루한 과정을 버티다 보면 ‘이런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왜 이혼하려고 하는가, 소송 따위 취하하고 평온한 척 살면 안 되는가?’를 스스로 끊임없이 묻게 된다(역시, 국가의 계략에 휘말린 걸까). 그러나 나는 휘말리지 않으리라. 버티고 버텨서 끝을 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두 번째 변론기일은, 첫 번째 변론기일에서 정확히 5주 뒤로 잡혔다. 변호사를 선임한 지 7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두 번째 변론기일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여전한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했을 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변론기일 후에 담당 변호사가 전화로 알려주었다. 피고의 변호사는 “피고는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내 변호사는 “원고는 이혼을 원한다.”고 말했다. 


제 다음 단계 ‘가사조사’가 시작된다고 했다. 법원에서 지정한 가사조사관이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양육환경을 둘러보는 등의 과정이 진행된다고. 가사조사 날짜는, 두 번째 변론기일에서 한 달 후로 잡혔다.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절차가 진행되는 듯했다. 첫 변론기일에서 한 달 후쯤 두 번째 변론기일이 잡혔고, 그로부터 한 달 후 가사조사 날짜가 잡혔다. 가사조사관이 전화를 걸어와 ‘상의 후에’ 날짜를 잡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날짜와 시간을 통보받는 방식으로 조사 날짜가 정해졌다. 평일 오후 2시. 육아휴직이 아니라면 절대 참석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의아했다. 이런 식이라면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소송이혼을 못 할 텐데, 연차를 박박 긁어모은다 한들 이게 가능할까? 궁금할 지경이었다. 육아 휴직이 끝나면 나 역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할 터. 그때까지도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런 일이 닥칠 때마다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벌써 걱정됐다.




첫 번째 가사조사는, 배정된 가사조사관을 법원 조사실에서 만나는 형태로 진행된다고 했다. 무려 원고와 피고가 ‘함께’ 참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진심으로 놀랐다. 어떻게든 만남을 피하고 싶은 내 마음 같은 건, 법 절차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항의해 봤지만 ‘폭행이 없는 경우’에는, 둘을 한 자리에 불러 각자의 이야기를 ‘함께’ 듣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답변만 이어졌다.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그럼에도 가야겠지, 생각했다. 무려 한 달 만에 잡힌 가사조사를, 내 마음을 이유로 빠질 수는 없는 거니까. 폭행도 당하지 않은 나는, 진행되는 법 절차를 지연시키고 싶지 않았다. 


‘조사’라는 이름이 붙은 과정이었기에, 탐정처럼 무언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쏟아낼 것이라 염려했었다. 하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진술서를 기반으로 ‘양측 입장’을 듣는 것이 다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데, 그 얘기를 한번 해볼까요?” 조사관이 질문하면 나 혹은 남편이 번갈아 가며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했다. 대답에 대한 어떠한 평가나 논쟁 없이 다음 질문으로 패스. 남편과 나의 의견이 다를 경우에도 그 부분을 파헤쳐 결론을 내기보다는 “자, 이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하고 중재하셨다. 조사관은 원고의 의견-피고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정리하는 정도의 보고서를 작성하는구나, 라는 걸 조사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꾸준한 질문들은 양육권은, 위자료는, 양육비는, 등으로 이어졌다. 이혼소송 전 인터넷에서 “위자료도 필요 없으니 빨리 끝내고 싶어요.”라는 글을 읽을 때마다 안타까웠다. ‘이런 바보!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아야지. 더 버텨야지!’ 하며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일에 훈수를 두곤 했었다. 하지만 조사실 안에선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소송이 빨리 끝날 수만 있다면, 모든 사항에 다 협조하겠습니다.”조사관의 기록에 나의 말은 어떻게 남겨질까. 멍청한 답변이었겠지. 잘 알면서도, 정말 진심으로 ‘빨리 마무리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옆자리의 남편은, 꾸준히 이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 사안으로 이혼 판결이 날 것이라 절대 생각하지 않기에, 위자료와 양육비 등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던가. 내 마음과 상관없이, 이 소송은 한동안 이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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