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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Dec 20. 2020

(14) 놀랍도록 별 일 없이 삽니다

소송은 지지부진하지만...

소송을 시작하면 매일이 '빠밤' 하는 일들로 가득찰 줄 알았다. 짧다면 짧은 삶 동안, 변호사를 선임하고 원고가 되는 일이 없었기에 '소송=전쟁 시작'을 의미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일단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남편은 여전히 소장을 받지 않고 있고, 소송에 임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돈을 보내왔다. '양육비'냐고 묻는 내게, 남편은 '생활비'라고 선을 그었다. 돈에 생활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양육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무슨 큰 차이가 있나 싶지만 남편은 생활비임을 강조했다. 양육비는 '이혼한' 가정에서, 주양육자가 아닌 사람이 아이 양육을 위해 지급하는 돈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단어 하나에도 민감한 그 마음이 이해는 됐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걷고 있는 것이다. 별거와 이혼 그 중간 어디쯤에, 우리는 서 있다.


아이는 남편이 있는 집에 2~3차례 정도 다녀왔다. 폐문부재로 소장은 전달되지 않아도 카톡은 되는 신기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또 지리멸렬한 싸움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변호사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그저 평화로운 이 일상을 절대로 깨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 성격은 이런 것이다. 도망가고 회피하고 침묵하고 방관하고. 공격을 하는 일도, 공격을 받는 일도 더이상은 겪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일어난 별 일 이라면, 어머님의 전화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무려 52분의 통화. 찾아오시겠다는 것을 만류하고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님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수는 없겠냐" 요청하셨다. "지금까지 니가 받은 상처는 지난 일이지만, 성장하는 아이에게는 앞으로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상처들이 생길 것"이라는 말씀도, "결국 너의 미래에 아이는 짐이 될 것"이라는 말씀도 다 귀담아 들으려 애는 썼다. 어른의 거듭되는 이야기를 자르고 또 자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하지만 통화가 길어질수록 마음이 차분해져갔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등을 말했다. 어머님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했고, 나는 "최선을 다해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것"이라고 소리쳐 버렸다. 




아이 학교에서 '딱지접기' 숙제가 나온 날,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자발적으로 남편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놀랍도록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세상에. 연애와 결혼까지 무려 10년을 부대낀 사이이며 내 아이의 아빠인데 이렇게 생각이 안날 수가 있나 싶을 만큼, 문득 생각나는 경우도 잘 없었다. 이곳에 글을 쓰는 동안 혼자 울고 웃으며 많은 감정을 흘려 보내서일까. 그저 아주 오래 전에 알았던, 아주 오래 전에 날 괴롭혔던 전전 직장의 상사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면 될까.


어쨌거나 아이 숙제로 '분노의 딱지접기'를 하며 나는 남편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1학년도 안다는 그 딱지접기를 나는 할 줄 몰랐고, 아이 학교에서는 딱지 위에 그림을 그려 교실을 꾸미겠다며 A4 용지로 무려 10개의 딱지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학교에서 접어봤다는 아이도 막상 종이를 쥐어주니 헤맸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일단 책을 찾아보는 '구식' 인간이었기에, 종이접기 책을 꺼냈다. 딱지접는 방법을 찾았다. 다행히도 수록돼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색종이로 딱지 접는 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A4용지를 색종이처럼 정사각형으로 잘라 딱지를 만들었다. 아이는 학교에서 본 것과 크기가 다르다고 말했다. 음? 


검색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없었다. 이 정보화시대에  A4용지로 딱지 접는 방법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거야, 화가 났다. 대체 학교에선 어떻게 만든 건데? 아이와 마주 앉아 종이를 잡고 한참을 주물럭거렸다. 결국 아이가 해결책을 찾았고, 힘이 들어가는 부분만 도와주니 하나의 딱지가 완성됐다. 그렇게 10개의 딱지를 접으면서, 남편이 있었다면 슥슥 접어 금방 10개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했다. 고작 딱지 때문에 남편에게 연락할 수는 없는 일. 천천히 10개를 완성해 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싫어한 종이접기는 역시나 좋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색종이든 A4용지든 뚝딱뚝딱 비슷하게 접으면 될 것 같은데, 이 정도 응용이 안되는 나란 사람의 고장난 프로세스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참 사람은 한결같고 변하기 어려운 거구나 생각했다. 

아무튼 딱지 덕분에 깨달았다. 종종 이런 경우에 남편이 생각날 수 있겠구나. 나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함께 할 사람이 없다는 것. 이런 것이 '빈 자리'구나 생각했다. 딱지 10개를 어떻게든 완성한 것처럼 앞으로도 채워가야 할 많은 일들이 있겠구나 느꼈다. 


이날 이후 아이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딱지치기를 한다면서 종종 딱지를 만들어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딱지를 접으며 아이가 말했다. 반 친구 중 한 명이 크고 튼튼한 딱지를 집에서 가져왔고, 그 친구와 시합을 하는 족족 져 버려서 자꾸 딱지가 줄어들어 속상하다는 것이었다. 

아이들 싸움이니 그들만의 리그로 두는 것이 맞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속상했다. '그 아이의 크고 튼튼한 딱지를 누가 만들어줬을까'를 생각하는 이 놈의 자격지심이 문제였다. 그 아이의 엄마가 만들어 줬을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 아이의 아빠가 만들어줬을 것만 같았고, 아빠가 만들어 준 딱지가 내 아이에게는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미친 것 같았다. 알고 있다. 자격지심이라는 것을. 이렇게 쓰면서 돌아봐도 역시나 미친 것 같은 사고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내 아이에게도 크고 튼튼한 딱지를 가지게 해주고 싶었다. 결국 그날 배송 온 택배박스를 잘랐다. 손이 빨개지도록 힘을 줘 '대왕' 딱지를 완성했다. 심지어 딱지치기 연습도 했다.  


다음 날, 아이의 하교가 다가올수록 나는 궁금했다. 이겼을까. 이겼겠지. 기분이 좋을까?

학교에 다녀온 아이는 코로나가 심해져서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가까이 있으면 안된다고 딱지치기가 금지됐음을 알려줬다. 망할 코로나. 역시 나쁜 코로나였다. 아이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좀 시무룩해졌다. “엄마가 만들어 준 딱지로 이겼어” 하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고작 딱지 따위에 이토록 진심인 내가 스스로도 이상했다. 이 자격지심, 이 열등감을 어떻게든 이겨내지 않으면,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기-승-전-자격지심, '자격지심 끝판왕'이 될 것이 뻔해 보였다. 아이는 괜찮은데, 나만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생각한다는 내 감정에 빠져, 판단력마저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졌다. 사실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는 것이다.




별 일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매일이 소중하다. 나의 하루를 온전히 내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지인들과 연락을 하고, 하루 혹은 일주일을 계획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매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매일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다.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는 것 같다. 현재가 너무 힘들고 벅차고 버거울 때는, 단지 하루 하루를 버텨내느라 과거도 미래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가오는 미래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 것이 아니었다. '와- 오늘 하루가 끝났다', '젠장- 또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오겠군' 하며 살다보니 '미래'라는 것을 꿈꾸지 못하게 됐다. 어차피 이런 매일이 흘러갈 미래라면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최근엔 생각한다. '미래'라는 것도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꿈꾸고 계획할 수 있는 거구나. 

나는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좀 더 발전해 갈 수 있을까.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상상하고 계획을 세우는 삶. 오늘도 어제처럼 평안한 하루가 될 것이라는 안정감을 딛고 서서 미래를 상상해본다. 아이는 어떻게 자랄까. 아이는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보게 될까. 결국, 내가 삶으로 보여주면 되는 것 아닐까.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평안하기를. 자격지심 끝판왕 괴물만은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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