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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Jun 22. 2021

환대: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된다는 것

#청소년인문학클래스 #단어수집


오늘은 질문 두 개를 한번에 할 거야, 잘 들어 봐. 


첫 번째 질문, 사람이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두 번째 질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똑같은 질문 아니냐고? 아니, 두 질문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완전히 다른 질문이야. 이 질문들에 답을 하기 전에 우리 그림 하나를 같이 보자. 


Master Baby , 윌리엄 킐러 오처드슨, 1886      


       

방 안 가득히 여린 볕이 차올랐네. 늦은 오후인 것 같아. 여린 볕과 늦은 오후 – 선생님은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아기와 엄마 그리고 따뜻한 볕의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볕에 대해 조금 말하고 싶어. 잠깐 들어줄 거지? 우리는 시간과 존재의 관계를 마땅한 순서나 법칙으로 생각해. 시간이 흐르면, 식물의 여린 초록이 점점 짙고 선명한 초록이 되어가는 것처럼 약한 것에서 강한 것으로, 흐린 것에서 뚜렷한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기 쉽지. 하지만 햇볕처럼 점점 여려지고 부드러워지는 존재도 있단다. 지는 해는 뜨는 해처럼 내리쬐거나 눈부시지 않아. 물을 많이 섞은 물감같이 공기와 사람들의 기분에 섞여 그저 따뜻하고 조용하게 스며들지. 시간과 존재의 관계에 순서나 법칙은 없어.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약해지거나 강해지고 흐려지거나 선명해지고 단단해지거나 부드러워질 거야. 그러니까 시간이 흐르면 무엇이 되겠다 다짐하는 대신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지 지켜봐도 괜찮아. 언젠가 너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야.


       

이제 남은 주인공들에게 눈을 돌려보자. 둥글고 커다란 소파에서 아기와 엄마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부딪히면 소리를 내기 마련인데, 한 사람의 세계와 한 사람의 세계가 부딪힐 때에는 고요해. 겹치지 않고 나누어지거든. 우리는 그 부딪힘을 만남이라고 불러. 만남은 기꺼이 곁을 주는 순간, 나의 자리와 너의 자리가 생겨나고 나란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이야. 엄마는 부채를 들고 아기를 위해 바람을 만들어 주고 있는데, 부채의 바람은 방 안에 볕을 닮은 것 같다. 더위에 거세게 맞서는 바람이 아니라 작은 몸을 보드랍게 감싸는 순하고 연한 바람결. 이 바람결을 자장가 삼아 잠들었던 오래전 어느 여름밤의 감각을 나도 알고 있어. 감각은 영원이 되기도 한단다. 순하고 연한 바람이 불 때마다 나의 불안은 잠들지.     



이 그림만으로 아기가 밥은 잘 먹었는지 춥지는 않은지 아프지는 않은지 확인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 아기는 살아가기에 충분해. 생존을 넘어서 사람답게 존재하고 있어. 내 몸에 맞는 자리에 누워 나를 위한 바람을 느끼며 잠드는 일, 아기는 엄마에게 환대를 받고 있거든. 이 그림처럼 지금 여기에 우리도 환대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또 자라났지. ‘환대’는 사회학자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수집한 단어야. 물론 그 전에도 ‘환대’라는 단어에 대해 알고 있었어. 국어사전에서 환대를 찾아보면,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이라는 뜻을 볼 수 있어. ‘정성껏’과 ‘후하게’ 때문일까? 환대는 중요한 손님과 집주인이 마주 앉은 화려하고 풍성한 식탁을 떠올리는 단어였어. 하지만 새로 알게 된 환대는 이것과 조금 다르더라. 우리 차분히 환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먼저 국어사전의 뜻에서 단 하나의 단어만 남길 거야. 어떤 단어가 좋을까? ‘반갑게’ ‘정성껏’ ‘후하게’는 태도와 방법을 표현하고 있어. 무엇을 위한 방법과 태도겠니? 그래, 맞이하고 대접할 때 갖추어야 할 태도와 방법이지. ‘맞아’와 ‘대접함’의 순서와 관계도 생각해 볼까? 대접은 맞이를 하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까 단 하나의 단어는 ‘맞아’가 될 거야. 맞이하는 일은 환대의 시작이자 근본이야. 이제 화려하고 풍성한 식탁은 필요 없어졌어. 식탁과 의자만이 필요해. 상대는 중요한 손님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말이지. 오직 텅 빈 미래만 가진 아기에게 자리를 주고 눈을 맞추는 엄마처럼, 그저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을 맞이하는 일. 내가 다시 알게 된 환대의 뜻이야.  


    

솔직히, 나에게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는 조금 어려운 책이야. 크게 두껍지 않아도 방대한 이론과 자료를 넘나드는 아주 빽빽한 숲이거든. 빈틈없이 네모반듯한 문장들이지만, 나는 따뜻한 위로를 받았어. 이 책을 처음 읽을 당시에는 아기를 키우는 엄마의 역할만 맡고 있었는데, 나와 아기의 존재가 거부당한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어. 그 느낌을 직접 확인한 경험도 있어. 어느 날 나는 아기를 안고 지하철을 탔고 아기를 울리지 않으려면 서서 가야 했지.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아야 하니까 손잡이들이 달린 좌석 앞으로 갔어. 그런데 그 좌석에 먼저 앉아 있던 사람이 불쾌하다는 듯이 말하더라고, 자리 많으니까 여기 있지 말고 저쪽으로 가라고. 사과를 하고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갔는데 눈물이 날 것 같더라. 나는 여기에 있음을, 나와 아기의 존재 자체를 사과한 거야. 며칠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 마음이 드는 원인을 찾았고 나아지려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선명하게 알 수 있었어.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을 가졌으니, 이 책의 내용이 어려워 완벽히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너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어.      



이 책은 인간의 개념과 사람의 개념을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인간이 자연적인 사실이라면 사람은 사회가 인정한 결과야.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태어난 한 개체는 언제 어디에서든 인간이지만 사람은 공동체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야. 너도 알다시피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잖아, 사회 안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하거든. 사회가 그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자리를 내줄 때 인간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되지. 권리가 생긴다는 말이야. 사람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사람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은 종종 환대에 조건을 붙여. 누구든 이곳에 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이 가진 사회 경제적인 가치를 계산하고 그에 따라 자리를 주려고 하지. 아주 오래 전에 흑인들은 버스에서 지정된 자리에만 앉을 수 있었어. 그리고 지금은 노키즈존이 있지. 청소 노동자들이 화장실 한 칸이나 지하실 구석에 앉아 쉴 때, 임대 아파트 주민은 우리 아파트 놀이터를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보았을 때, 성추행 가해자 처벌 요구가 피해자를 향한 비난의 화살로 돌아갈 때, 사람의 삶은 사람답다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람답게 살고 싶다면 먼저 타인을 환대해야 해. 내가 이곳에 사람답게 존재할 수 있다면, 나를 기꺼이 맞이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 맞이했기에 존재할 수 있었을 거야.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 우리는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 이 연결은 모든 사람의 존엄과 평등을 증명하기도 하지. 그래서 환대는 어떤 조건도 없는, ‘절대적 환대’가 되어야 해. 우리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출신 학력 직업 성품 성향을 덮어 두고 자리를 주어야 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보답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고 자리를 주어야 해.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잘못을 해도 복수하지 않고 자리를 주어야 해.      



이러한 절대적 환대의 풍경을 존 버닝햄의 그림책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에서 볼 수 있어. 기차가 너른 들판 위를 달려. 그 기차에는 아이와 개가 타고 있지. 그리고 기차에 타고 싶은 동물들이 차례로 등장해. 아이와 개는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 소리치지만 동물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귀를 기울이고 기차에 자리를 내주지. 어떤 조건도 없이 말이야. 커다란 코끼리도 사나운 호랑이도 모두 기차에 오르고 자리를 찾아. 기차 밖에 있던 ‘너’는 ‘우리’가 되고, 그렇게 우리는 점점 늘어가. 기차가 잠시 정차하면 우리는 들판에서 눈 위에서 바다에서 마음껏 뛰어놀지. 우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놀이는 신나고 재미있는 법이고, 아이와 개는 그 전보다 지금이 더 행복할 거야.


존 버닝햄,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 비룡소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는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대. 하지만 이 책의 저자 김현경은 우리는 절대적 환대에 기초한 사회를 상상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가능성을 말한다고 했어. 선생님이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       



맨 처음 선생님이 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려 볼까? 사람이 살아가려면 죽지 않아야 하고,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어. 물, 밥, 옷, 집 같은 것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여기에 무엇인가 더해져야 해. ‘더’는 단순한 양과 질이 아니야. 물만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가까스로 시냇물이 되어 흐르지. 시냇물 주변으로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모여들 때 비로소 시냇물다운 풍경을 갖게 되는 거야. 어디 시냇물 뿐이겠니, 풀도 꽃도 벌도 나비도 나다운 풍경을 가지려면 서로가 있어야 해. 결국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은 풍경을 갖는 일이 아닐까? 풍경은 내가 원한다고 가질 수 없지. 내가 여기에 있음을 인정해 주는 존재가 있을 때 그리고 네가 거기에 있음을 인정하는 내가 여기에 있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곁을 내줄 때 우리는 풍경을 가질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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