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혜 Jul 20. 2021

혐오: 나 역시 지극한 인간임을 모르고

#청소년인문학클래스 #단어수집



선생님은 지금 식탁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어. 베란다 커다란 창문과 마주하는 자리를 내 자리로 정하고 매일 여기에 앉아서 밥을 먹고 책을 읽고 글을 쓰지. 저 풍경을 좋아하거든. 몇 그루 안 되지만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은 깊은 숲의 느낌을 가졌어. 특히 소리가 그래. 나무가 흔들리고 새들이 울지. 나무들 너머로 중학교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소음들도 좋아. 십대가 내는 소리는 참 싱그럽거든. 내가 사랑하는 계절을 닮았어. 나도 저런 소리를 가졌던 때가 있었지, 생각하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 가끔 소리에 끌려서 학교 담 너머에 귀 기울이는데, 너도 알다시피 중학생들의 대화 내용이 딱히 유익하거나 건전하지는 않아. 감탄사와 욕의 향연. 기막히게 된소리마다 강세를 넣어 모든 단어들이 욕의 리듬을 따라 춤을 춰. 그 소리들을 듣고 있으면 자꾸만 웃음이 나와. 욕하는 것도 예쁘네, 혼잣말을 하지. 뭐,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존나 없이는 감정도 없었지. 그때는 존나 웃기고 존나 짜증나고 존나 떨리는 일들만 있었어. 나는 십대들의 존나와 된소리를 존중해. 하지만,  

    

“아! 이 새끼 존나 어이없어, 극혐!”      


나무가 일렁이고 새들이 지저귀고 새끼도 존나도 싱그럽게 부딪히고 사라지는데, 극혐은 달라. 가시처럼 꽂히는 말. 극혐은 ‘극도로 혐오한다’는 뜻을 담은 줄임말이지. 이 말은 욕보다 센 소리나 속된 분위기는 덜하지만, 훨씬 더 위험한 말이라고 생각해. ‘혐오’라는 감정 때문이야. 극혐은 발암이, 맘충이, 급식충이, 씹선비가 틀딱이 되었지. 이대로 괜찮을까? 아니, 우리는 반드시 혐오와 혐오 표현들을 앞에 두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해야 해.     


단순히 혐오가 나쁜 감정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두려움, 분노, 우울처럼 부정적인 감정들은 얼마든지 있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해. 감정은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거든. 


선생님은 감정에 대해 생각하면 거미줄이 떠올라. (이른 아침에 거미줄은 아주 경이롭고 아름다워. 학교 가는 길에 꼭 거미줄을 찾아서 들여다보길! 아마 다른 날 보다 서둘러야 할 거야. 이슬이 가시기 전에 가장 선명하거든, 그리고 거미줄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테니까.) 가느다란 선들이 복잡하고 단정하게 전체를 이루지. 세계의 작은 진동을 포착한 선 하나가 다른 선에게 그 진동을 전달해. 그 선은 또 다른 선에게. 그러다 보면 모든 선들이 진동을 알아차리고 흔들려. 감정도 그래. 내 안에 감정들도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서, 그러나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단정하게 ‘나’를 이루고 있지. 나의 감각과 경험이 이 선들을 흔들고 지나가면, 나는 그 전과 또 달라질 거야.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거미에게 거미줄의 선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소중할 거야. 하나가 끊어지는 순간 거미줄은 균형을 잃고 흔들리겠지. 나의 감정이 어떤 색깔이든 하나도 빠짐없이 소중한 이유야. 한편으로 선 하나가 끊어져도 거미줄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거야.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기억하고 표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해. 감정이 나를 지탱할 거야. 그런데 왜 혐오를 표현하면 안 된다고 할까? 혐오도 여러 감정 중에 하나인데 말이야. 혐오는 무엇을 아주 싫어하는, 단순히 대상에 대한 개인의 기호를 드러내는 감정이 아니라서 그래. 우리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마사 누스바움의 글이 도움을 줄 거야.        


지금 한 번 인터넷 서점에서 마사 누스바움을 검색해 봐.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어. 제목과 소제목을 살펴보면 마사 누스바움이 어떤 글을 쓰는 학자인지 감이 잡힐 거야. 인간성, 인생, 정의, 감정, 상상력, 사랑 –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명쾌하게 정의하기에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지. 누구나 경험하지만 그 누구도 똑같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더 ‘나은’ 방향은 분명히 있어. 며칠 전에 만족을 느끼는 법은 쉽지만, 행복을 느끼는 법은 부단히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 행복을 느끼는 법을 배우려는 태도는 그렇지 않은 태도보다 더 ‘나은’ 삶을 만들겠지? 우리는 그 방향을 찾아야 해.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세상에 인간과 인생이 이렇게나 많은데, 더 나은 방향을 단 한 명이 정할 수는 없을 거야.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며, 더하고 빼고 고쳐야 할 테지. 선생님은 『인간성 수업』으로 누스바움의 생각을 처음 접했어. 다 읽고 나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거든. 나 또한 그 방향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고 그 역할이 크든 작든 아주 중요하다는 자부심도 생겼지. 생각하고 나누고 행동하자고 다짐했어.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 대화도 그 다짐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다음에 읽은 책이 바로 『혐오와 수치심』이야. 표지가 인상적이지. 덩어리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거대한 인간의 살과 피부가 화면 가득 차 있어. 영국 화가 제니 사빌의 작품이야. 제목은 <인생의 어느 시점>. 선생님에게는 이 그림이 아주 강렬하게 다가와서, 제니 사빌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봤어. 주로 여성의 비대한 몸을 아주 커다랗게 그리고 있는 작가야. 접히고 뭉개지고 흐르는, 실재의 몸들. 그의 그림 속 주인공은 우리에게 익숙한 ‘아름다운 비너스’가 아니야. 소외되고 배제되었던 여성들의 ‘살’이지.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여성의 살을 혐오했고 여성의 살은 스스로를 수치스럽다 여겼지. 그 살들이 무대 위로 나온 거야. 그리고 우리에게 묻지. 왜 혐오 받아야 하지?      


제목 옆에 작게 원제가 있어. Hiding from humanity : Disgust, Shame, and the Low. 혐오와 수치심과 그리고 ‘법’이 있네. 이 두꺼운 책의 주제를 함축한 제목이야. 누스바움은 이 책을 통해서 ‘혐오스러움이 법을 만들고 판결을 하는데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묻고 ‘될 수 없다.’고 답하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동성애 커플의 애정 행위가 혐오스러워서 폭행을 가했다고 하자. 법이 그 폭행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 범죄자가 느낀 혐오는 판결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거야. 분노와 두려움을 생각해 볼까. 법은 분노나 두려움을 느낀 이유가 ‘타당하다’면, 범죄의 잘못을 줄여주거나 범죄로 여기지 않아.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협박을 받아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였고,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물건을 훔쳤다고 하자. 법은 범죄에 대한 책임을 줄여 줄 거야. 누스바움은, 혐오는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문제가 무엇인지, 여러 학자들의 분석과 방대한 자료를 통해 설명하지. 선생님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혐오를 독이나 병균처럼 외부의 위험한 물질로부터 몸을 지키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어. 사람을 독이나 병균처럼 취급하면 안 된다는 다소 막연한 이유로만 혐오 표현에 반대했지. 하지만 생각보다 더 복잡한 문제가 있더라고.      


단 몇 문장으로 혐오의 문제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내가 이해하기에 가장 큰 문제를 말해 줄게. 혐오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생기는 ‘타당한’ 감정이 아니야. 혐오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거든.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과 다른 순수하고 고결한 존재라고 생각해 왔어. 하지만 인간의 몸은 동물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지. 우리 몸이 배출하는 배설물을 떠올려 봐. 똥 오줌 땀 콧물 피. 배설을 할 때 인간은 자기 안에 ‘동물성’을 목격하게 되지. 배설물은 혐오스러워. 하지만 눈물은 어때? 눈물은 좀 달라. 왜 그럴까?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큰 차이는 웃거나 우는 일이라고 믿고 있지. 맞아, 눈물은 동물성을 연상시키지 않아. 인간만의 특징이라 생각하는 거야.      


혐오는, 인간이 지닌 동물성을 삭제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야. 인간은 동물과 다른 고결하고 순수한 존재가 되고 싶은데, 자꾸만 동물처럼 똥도 싸고 오줌도 싸고 땀을 흘리고 콧물을 닦고 구역질과 구토를 하지.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 자꾸만 감추고 눈을 돌려. 나의 동물성까지 모두 다 가져갈 수 있는 대상을 찾지. 인간과 동물 사이에 경계의 자리를 마련해 두고 나보다 취약한 사람들과 집단 – 흑인, 아시아인,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어린이, 노인 –을 향해 소리쳐. 이 자리에는 ‘대부분’의 인간과 다른 더럽고 추하고 이상한 존재들이 앉아있어요! 약한 존재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고 마음을 놓았던 거야. 나는 저들과 달라. 완전하고 완벽한 인간이라고! 혐오에는 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이 담겨 있고 그러한 열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약한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아. 이 열망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존엄하지 못하고, 심각한 위험과 피해를 입는 거야.     

이 그림은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의 4월 첫째 주 신간 표지 일러스트야.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니? 먼저 배경이 되는 장소를 살펴볼까. 미국 시사주간지의 표지이니까, 미국 대도시의 열차 플랫폼이겠다. 두 사람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어. 옷차림은 아주 평범하네. 오히려 너무 어두운 것 아닌가 싶어. 이런 옷차림은 회색 도시의 풍경에 금세 묻혀 버리겠지. 혹시 보호색인 걸까? 두 사람은 시선을 주변에 두고 있어. 표정을 봐, 불안하고 두려운 것 같아. 이 일러스트의 제목은 ‘delayed’, 열차는 지연되고 있고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플랫폼에서 벗어나 열차에 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 같아. 열차 플랫폼은 아주 일상적인 공간인데, 두 사람은 왜 불안하고 두려워 보이는 걸까? 선생님이 말하지 않은 정보가 두 가지 더 있어. 그래, 두 사람은 여성이고, 미국에 사는 아시아인이야. 약자. 물리적인 힘과 상징적인 힘 모두 약하지. 차별과 혐오의 대상. 최근 미국에서는 아시아 여성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어.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가다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다가, 약속 장소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공격을 당하는 거야. 그 공포와 슬픔을 상상할 수 있겠니? 인종과 성 차별은 아주 오래된 사회문제이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휩쓸면서 혐오가 더 심각해졌어. 생각해 봐,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시아 여성이 원인이 아니야. 분노를 약한 사람들과 집단에게 표현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우리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맞아야 하는 거지? 어쩌면 대답은 아주 간단해. 혐오스러우니까. 너희가 혐오스러운 인간이 되어야 우리는 순수하고 고결한 인간이 될 수 있으니까.       


혐오의 기준은 고정된 흑과 백의 관계가 아니야. 사람의 정체성은 부분이 모여 만든 전체이니까, 집단의 특징으로 만든 혐오 표현은 반드시 나를 향하게 될 거야. 선생님을 봐, 장애인 혐오 표현 앞에서는 무사할 수 있어도 여성 혐오 표현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지. 나는 아시아인 여성 엄마... 겹겹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순수하고 고결할 수 없단다. 혐오는 진실이 아니야. 혐오 표현은 마치 진실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진, 가면을 쓴 언어이고. 그 안에는 나 역시 지극히 인간다운 인간임을 부정하며 불안에 떠는 얼굴이 있겠지.         


방금 알았는데, 작년에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는 책도 번역되었네.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어. 누스바움의 세 번째 책은 이 책을 읽고 싶다. 혐오하고 혐오 받은 것이 이렇게 쉬운 세상에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혐오를 막을 수 있는 언어를 배우고 말하고 싶어. 우리, 같이 하자.                 



작가의 이전글 환대: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