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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Nov 02. 2022

바깥의 가능성

눈에 밟히는 그림들이 있어요. 말 그대로 한 걸음씩 꾹꾹 눌러 여기에서 저기로, 천천히 걷고 싶은 그림. 길이 있어 두렵지 않고 멀지 않아 숨차지 않죠. 지난번 소개한 올가 토카르추크의 신간 <다정한 서술자>를 처음 받았을 때, 표지가 눈에 밟히더라고요. 책을 펼치지도 못하고 한참을 꾹꾹 눌러서 바라보았습니다. 누가 그렸을까. 요안나 콘세이요의 일러스트였어요. 어쩐지, 빛바랜 종이 위에 금방이라도 지워질 듯한 연필과 색연필의 질감이 참 따스했어요. 맞네,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이네,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그림 위를 오랫동안 고요히 걸었던 이유는 가운데에 있는 사람, 때문이에요. 익숙한 형태인데 낯선 내용을 담고 있는 사람. 하얗게 텅 빈 사람. 우리는 이 그림만으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요. 성별, 나이, 직업, 취향, 기분 그 무엇도 짐작할 수 없어요. 관념의 방해 없이 무지를 의도할 수 있죠. 평등한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그저 아! 사람이구나, 하고요. 그렇지만 이것뿐이었다면, 저는 금세 표지에 그림은 잊고 책을 펼쳐 문장에만 몰두했을 거예요. 이 그림에는 다른 것이 있어요. 텅 빈 사람 바깥으로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과 꽃들. 사람 안은 비어있고 사람 바깥은 가득하네요.

      

얼마 전 유행했던 ‘나의 뇌 구조’ 이미지를 기억하시나요?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처럼 텅 빈 사람이 있어요. 다른 점이 있다면 채워지길 기다린다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로 말이에요. 뇌가 있는 부분에 말풍선을 크게 또는 작게 그리고 그 안에 나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생각들을 꺼내 단어로 남겨 두는 거죠. 이 이미지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나’에 대해 말해줘요. 저도 이 이미지를 사용한 적이 있는데 어린이들이 조금 더 쉽게 글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거든요. 말풍선으로 채운 사람의 머리를 앞에 두고 물어요. 자, 지금 내 머릿속에는 무엇이 있나요.


하지만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은 전혀 다른 질문을 하고 있어요. 나의 머릿속, 그러니깐 나의 상황과 생각과 기분은 중요하지 않아 보여요. 텅 비어 있는 ‘나’, 그 바깥이 채워져 있잖아요. 이 그림 뒤에 차곡히 쌓여 있는 올가 토카르추가의 문장들 중에서 한 부분을 옮겨 볼게요.      



우리는 다성적으로 울려 퍼지는 일인칭 서사의 현실 속에서 살며, 사방에서 이러한 다성적 메아리와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인칭 서사’란 창작자로서 ‘나’의 주변에 좁은 원을 그려 놓고, 거의 자신에 관한 글만 쓰며 그 협소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개별화된 관점, 그리고 ‘나’로부터 솟아나는 개인적인 목소리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며, 정직한 것이라 여깁니다. 그로 인해 폭넓은 시야나 전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더라도 말이죠. 이런 식의 일인칭 서술 방식으로 인해 독창적이면서 절대적인 양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여겼고, 이를 통해 우리가 개인으로서 자율성을 잃지 않고, 자아를 인식하고, 자기 운명을 자각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서술 방식은 ‘나’와 ‘세상’ 사이에 대립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소외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336쪽)



맞아요, 우리는 일인칭 서사 시대를 살고 있어요. 모두가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죠. 물론 삶의 주체는 ‘나’이고, 그러므로 ‘나’에 대한 관심은 아주 중요해요. 하지만 이렇게 ‘나’에게만 집중하다 보면 ‘나’는 중심이 되어요. 중심이 반복되고 쌓이면 중심주의가 되고요. 중심주의는 오직 단 하나가 진리이자 진실이라는 뜻이니, 대립과 소외를 부를 수밖에 없죠. 올가 토카르추크의 말대로 “세상이 죽어가는데 우리는 심지어 알아차리지도 못할 수 있”어요.

      

바로 이거예요.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이 눈에 밟혔던 이유. 지금 여기, 오직 일인칭 서사만을 쓰고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조언이자 경고입니다. 나의 머릿속은 너의 머릿속이 될 수 없어요. 하지만 나의 바깥은 너의 바깥이 될 수 있지요. 우리는 바깥을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숲 속에 있는 두 사람을 떠올려 볼까요. 두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숲 속에 있죠. 한 사람의 숲은 다른 한 사람의 숲이기도 해요. 숲이 풍요로울 때, 두 사람의 삶이 한결 나아질 것이고 그러므로 두 사람은 ‘나’의 바깥, 숲을 향해 시선을 돌려야 해요.      


이 바깥이 그저 ‘외부’를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공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 능력은 곧 선택의 가능성을 의미하죠. 우리는 수동적으로 외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바깥을 선택할 수 있어요. 그림 속 사람은 풀과 꽃을 나의 바깥으로 선택했어요. 이 사람의 시점은 풀과 꽃을 통하고 있고 그 시점으로 쓰는 서사는 풀과 꽃에 대한 이야기가 될 거예요. 풀과 꽃이 단순한 배경으로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을 향해 뻗어 나가는 기운이 있어 참 좋아요.      


자, 이번에는 제가 한 번 해보려고요. 나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무엇은 어디를 향해 뻗어 가고 있을까요?       


발레 학원. 저는 발레를 사랑해요. 재능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가 없어요. 겨우 일주일에 세 번, 한 시간 반을 발레를 배우는 데 쓰고 있고요. 하지만 이 시간 없이는 매일을 버티지 못할 거예요. 몸을 움직일 때 드는 마음을 알고 나서 더 적극적으로 삶에 개입하게 되었거든요. 삶을 살아내는 건 결국 몸이구나, 사람의 몸에 감탄하고 있어요. 몸은 나의 바깥입니다.   


화실. 저는 그림을 사랑해요. 그림은 발레보다 더 해요. 재능은 어린 시절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았어요.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세 시간을 그림을 배우는 데 쓰고 있는 걸요. 하지만 이 시간이 없었다면 관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거예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대상을 정성으로 관찰하는 사람. 관찰은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애정의 표현이었어요. 바라봄. 다정한 시선은 나의 바깥입니다.       


책장과 책상. 저는 틈틈이 다른 사람이 쓴 문장을 읽어요. 거의 평생을 놓치지 않고 해온 일. 인내심이 없는 편인데, 문장만큼은 성실하게 모아 왔어요. 밑줄 친 문장들로 지은 옷을 입고 오늘도 어린이 작가님들을 만나러 갑니다. 가을바람이 제법 차지만 따뜻하고 든든해요. 지혜로운 이들이 앞서 빚어 둔 생각들로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어요. 문장은 나의 바깥입니다.     


집. 저는 아이와 개와 고양이를 키우고 있어요. ‘키우다’라는 단어가 입에 붙어 버려서 쓰고야 말았네요. 다시 쓰고 싶어요. 저는 아이와 개와 고양이를 돌보고 있어요. ‘키우다’는 왠지 권위가 서려 있는 단어 같아요. 나의 힘이 강조가 되죠. 반면 ‘돌보다’는 너를 돕는다는 편안한 다짐이 든 단어 같고요. 잘 자라는 건 그들의 힘이지 저의 덕분이 아니죠. 다만 가까이 있기. 언제든 도울 수 있도록. 존재를 돌보는 존재가 되면서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을 시작했다고 믿어요. 저는 존재들에게 곁을 내주고 그 존재들은 저에게 기대요. 그 덕분에 중요한 사람이 되었고요. 돌봄은 저의 바깥입니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 결정했어요. 텅 빈 나로부터 자라는 나무가 있어요. 위로는 가지가 아래로는 뿌리가 뻗어가요. 아이와 개와 고양이가 나무에 기대고 있고요. 조금 피곤했는지 각자의 방식대로 단잠을 자고 있어요. 잘 때 큰다던데, 푹 잘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야겠어요. 나의 바깥에서 자라는 존재들.

      

이번 주 수업 시간에는 우리 같이 그림을 그릴 거예요. '나'를 비우고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려고요. 작은 그림 여럿을 하나씩 벽에 붙이면 커다란 그림 하나가 되겠죠. 나의 바깥과 너의 바깥이 어우러진 우리의 세계. 나는 세계의 파편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타날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나의 바깥은 서로의 바깥이고 우리의 바깥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꽃을 꺾을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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