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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Nov 09. 2022

집은 동그란 시간 속에 있어

린롄언 쓰고 그린 <집>

“나 왔어.”

“응, 잘 다녀왔어?”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어요. 바닷가 근처에 있는 작은 서점에서 만난 그림책 한 권이 가방 속에 있는데, 그 그림책 때문이겠죠. 너무나 당연해서, 무심하게 흘려보내던 인사에 이렇게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그러고 보니 우리가 건네는 인사에는 늘 ‘돌아오다’는 단어가 있었어요. 서로에게 안녕히 다녀오라고 말하죠. 국어사전에서 ‘돌아오다’를 찾아볼까요.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오거나 다시 그 상태가 되다. 돌아오려면 원래 있던 곳이 필요해요. 원래. 나의 시작이 되는 곳.     


가방 속에 있는 그림책은 대만의 일러스트레이터 린롄언이 쓰고 그린 <집>이에요. 서점에 서가를 살펴보다가 낡은 종이를 찢고 오려 붙여 만든 도시가 눈에 들어왔어요. 특별하고 아름다운 오직 단 하나의 ‘집’이 아니라 비슷하게 생긴 작고 네모난 집들이 도로를 경계로 촘촘하게 서 있어요. 진짜 집 같다는 생각을 했죠. 저는 경기도 외곽에 있는 신도시 아파트에서 자랐고 또 살고 있거든요. 제가 가지고 있는 ‘집’의 고유한 이미지는 마당이 있는 2층 단독주택인데, 제가 살고 있는 ‘집’의 진짜 이미지는 반듯하게 정렬된 아파트 단지예요.

     


표지가 아니었다면 저는 이 그림책을 넘겨 보지 않았을 거예요. 제목이 ‘집’이라니, 익숙한 소재잖아요. 집, 하면 떠오르는 것들 - 햇빛과 나무가 있는 마당, 뾰족하고 빨간 지붕, 창문과 커튼, 따뜻한 온도, 맛있는 음식, 행복한 가족들. 편안하고 소중한 곳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반복되어 왔다고 생각했어요. 다행이죠, 진짜 집의 풍경을 그려 준 작가 덕분에 이 그림책을 지나치지 않고 갖게 되었으니까요. 이 책을 통과하며 저는 집을 새롭게 배웠어요. 집은 시간 속에 있더라고요.      


첫 문장, “여기는 우리 집이야”. 역시 그럴 줄 알았지. 뒤에 이어질 문장도 가늠이 되고요. ‘우리 집에는 엄마 아빠 나 그리고 개와 고양이가 살아.’ 마치 버릇처럼 가족을 소개하는 문장을 상상하게 되죠. 하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어요. 두 번째 문장을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읽다가, 이 그림책을 마음 놓고 좋아하기로 다짐합니다. “매일 여기에서 출발해.”



매일을 출발하다니, 시간은 쏜 화살의 방향을 닮았고 그래서 출발은 단 한 번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매일 출발을 할 수 있대요. 그렇다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출발이고 어제와 다른 길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거죠? 그림책에 실린 누군가의 오늘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듣고, 가을의 결실을 가득 안는 날이었네요. 매일 출발을 하고 매일 다른 길을 걸어도 끝은 같아요. “우리가 처음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 마침표를 꾹 찍었으니 내일 다시 출발할 수 있고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우리는 출발하고 길 위를 걷고 다시 돌아옵니다.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되돌아온다.


문득 질 들뢰즈의 말이 생각났어요. 아주 오래전에, 어느새 십 년이 훌쩍 넘은 것 같아요, 들뢰즈의 철학을 설명하는 짧은 글 한 편을 읽었거든요. 맨 위에는 모네가 그린 <수련> 두 점이 나란히 있었어요. 모네는 같은 곳에 앉아 같은 풍경을 반복해서 그렸죠. 연못과 연못 위에 연꽃들. 하지만 모네에게는 같은 풍경이 아니었어요. 빛이 있고, 빛과 수련이 서로 얽히는 순간마다 수련이 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빛도 움직이고 수련도 움직여요. 가만히 멈춰있지 않으니 매 순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나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내죠. 모네는 그 차이를 포착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수련> 연작들은 같은 수련을 그렸어도 모두 다른 수련 그림이에요. 차이가 없었다면 혹은 차이를 포착할 수 없었다면 수련 그림을 반복해서 그리지 않았겠죠. 자, 수련처럼 여기에 있는 ‘나’를 떠올려 볼까요. '나'의 매일이 반복된다면 차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나’와 ‘세계’가 맺는 관계에 따라 조금씩 다른 순간들. 차이가 없다면 되돌아오지도 못해요.      


저는 매일 똑같은 일상이 지긋지긋했어요. 반복되는 매일은 무능력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며 주눅도 들었던 것 같아요. 별일 없는 삶은 별 볼 일 없는 삶 아닌가. 혼자만 멈춰있고 그래서 뒤처지는 기분. 나에게 특별한 하루는 자연스럽지 않고 기를 써서 만들어야 하는데 지치더라고요. 그런 날들에 들뢰즈의 말을 들었던 거예요. 반복은 지겹고 무료한 것이라 배워왔는데 반복을 긍정하는 철학자라니, 나도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 눈을 갖고 싶다, 간절한 마음이 들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들뢰즈의 철학이 너무 어려워요, 그때도 지금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한 마디만큼은 손에 쥐고 살고 있어요.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되돌아온다. 때때로 들뢰즈의 말을 제 마음대로 바꿔서 생각하기도 해요. 가치 있는 것만이 반복되어 되돌아온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반복되는 거라면 그 차이는 반복될 만큼 가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출발을 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 우리에게는 ‘집’이 있어요. 어제는 오늘로 오늘은 내일로 쉬지 않고 이어지겠지만 집이라는 시작과 끝으로 구분되죠. 이 짧은 단절이 지난 삶과 남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주고요.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쏜 화살이 아니라 나무의 나이테를 닮았어요.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동그라미. 매일의 온도 습도 강수량과 일조량. 나무는 차이를 반복하며 자신의 몸을 만들어 가요. 어제의 동그라미가 조금 어긋났더라도 바꾸거나 지울 수 없어요.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의 동그라미가 어제의 동그라미를 품어야 하거든요. 그래야 뿌리를 내리고 뻗어 나갈 수 있어요. 어제와 오늘의 동그라미를 품을 내일의 동그라미를 기대하면서 매일 다시 출발하고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나이테. 나이테를 닮은 시간은 그 어떤 하루도 쓸모없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선생님 저는 다른 애들처럼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니에요. 특별한 경험이 없어요. 매일 비슷한데, 그래서 제가 쓰는 글은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글감을 찾다가 제 곁에서 조용히 마음을 털어놓았던 h에게 이 그림책과 나무의 나이테를 보여주고 싶어요.


h! 듣고 있지? 차이 있는 것만이 반복되어 되돌아온다. 반복이 나무를 만들고 삶을 만들어. 그러니까 출발하고, 차이를 손에 쥐고, 돌아오는 우리의 매일을 믿어 보자. 집에 돌아와 그 차이를 자세히 살피고 예뻐하고 기억하는 사람으로 살자. 그러다 보면 우리의 삶은 어느새 저 나무를 닮아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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