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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Dec 07. 2022

그곳에 가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고정순 쓰고 그린 <무무 씨의 달그네>

기필코 백 살까지 살 거야. 매일 밤 신앙심 깊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서 셈을 합니다. 이를테면 나는 지금 사십 살이니까, 백에서 사십을 빼는 거죠. 육십이 남아요. 육십, 육십. 답을 되새기면 안심이 되고요. 아직 망하지 않았어. 내일 아침부터 행복하다면, 내 삶 전체에서 반절 이상은 행복하게 산 거니까 그 정도면 괜찮아. 됐어. 내일 아침에는 행복을 찾자.

      

다짐, 아니 기도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 셈은 끝을 몰라요. 셈이 끝나려면 내일부터 육십 년 동안 돌돌 말린 실을 풀 듯 행복이 쭉 이어져야 할 텐데, 내일이 되면 약간 행복하고 대부분 행복하지 못한 채 다시 셈을 하는 밤이 왔으니까요.      


열두 살 겨울. 처음으로 롯데월드에 갔어요. 놀이공원 말고 롯데월드.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들은 땅에 가까워요. 스프링 위에서 플라스틱 조랑말이 흔들거리고 범퍼카들이 스산한 전조등을 빛내며 서로에게 부딪히는 곳. 롯데월드는 달랐어요. 모든 것이 하늘 가까이 있었죠. 목을 뒤로 젖히고 천장을 오래 쳐다보았어요. 하늘 같은 천장. 천장에 닿을 듯 위를 향하는 놀이기구들과 사람들의 목소리. 천장이 있어 사람들은 하늘 너머로 날아가 버리지 않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죠.


친구들이 롯데월드에 다녀온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엄청 부러웠어요. 롯데월드에 한번 가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하늘과 스릴은 비싸요. 저의 엄마와 아빠는 높은 천장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의 지갑은 얇기 마련이죠.  온 가족이 롯데월드로 나들이를 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거예요. 저를 롯데월드에 데리고 간 사람은 공부방 선생님이었어요. 작은 살림집 작은 거실에서 작은 상을 펴고 서너 명이 둘러앉아 전 과목을 배웠거든요. 겨울 방학에 공부방 아이들이 모여 롯데월드를 간다는 말을 듣고서 꼭 가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어요.      


아, 롯데월드! 신비하고 아름다운 나라에 순식간에 몰입했죠. 소원을 이루었으니 가슴 가득 행복이 차올랐어요. 특히 퍼레이드가 시작된 순간에는 행복으로 무거워진 가슴이 쿵쿵 소리를 내었어요.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췄어요. 사람들 틈으로 손을 뻗어 공주님의 아름다운 실크 드레스를 만졌죠. 순간은 왜 영원이 될 수 없을까 애가 탔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계속 행복할 수 없었어요. 집에 있는 엄마 때문에. 롯데월드에 한 번도 못 온 엄마, 엄마가 이걸 봤다면 무척 좋아했겠지.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퍼레이드 사진만 수십 장을 찍었어요. 엄마랑 왔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가 곁에 있었다면 행복했을 텐데. 롯데월드에서 저는 조금 행복하다가 금세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마음. 안타까움과 속상함.      


열두 살 겨울을 떠올리면서 내가 엄마를 참 많이 사랑했나 보다,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도 해요. 행복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저절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는. 행복은 익히고 연습해야 하는 능력이 아닐까. 저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몰랐어요. 행복해지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자꾸만 행복을 찾으려고만 해요. 이곳이 아니라 저곳에 행복이 있을 거라 믿고 이곳에서 벗어나 저곳으로 발을 딛죠. 롯데월드 한가운데서 집에 있는 엄마를 생각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저처럼 말이에요.      


이쯤에서 우리 잠깐 그림책 한 권을 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고정순이 쓰고 그린 <무무 씨의 달그네>는 행복에 대해 질문하는 책입니다.    

  


무무 씨는 작은 구둣방 주인이에요. 요즘 무무 씨를 찾는 손님들이 늘었대요. 모두 달에 가는 친구들인데,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가고 싶은가 봐요. 친구들은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달에 가는 이유는 하나예요. 답답하고 숨 막히는 지구를 벗어나 행복을 찾는 것. 친구들이 하나둘, 달로 떠나는데 무무 씨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구두를 닦고 조금씩 달라지는 달을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죠. 무무 씨는 달을 아주 좋아하지만, 달에 가지 않아요. 달에 가면 달을 볼 수 없기 때문이래요. 달이 잘 보이는 곳에 그네를 만들어 가만히 흔들리는 무무 씨의 뒷모습은 조금 쓸쓸하지만 슬프지는 않아요. 오히려 고요로 출렁이는 강처럼 충만해 보이죠.



무무 씨의 뒷모습을 보고 나면 무무 씨가 친구들을 향해 던진 질문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거예요.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을 찾았을까?     


이 질문은 저를 향한 질문이기도 해요. 행복을 찾아 달로 떠나지 않았지만 이미 자기만의 달을 가지고 있는 무무 씨를 보면서, ‘행복’ 뒤에 ‘찾는다’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행복을 저 멀리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달처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완벽하고 완전한 무엇. 그렇기에 행복을 찾아서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가겠죠.      


무무 씨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일이 끝나고 따듯한 차를 마시며 달을 볼 때. 변함없는 일상 속에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달을 알고 있을 때, 달이 어떤 곳일까 상상할 때, 달 그림자가 내려앉는 고요한 강을 찾아갈 때 행복하고 그래서 무무 씨는 이곳을 떠나지 않죠.       


이 책 속에서 무무 씨는 행복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행복의 증거인 환하게 웃는 얼굴도 없어요. 무무 씨의 목소리는 느리고 조용하게 흐르고 무무 씨의 세계는 대체로 어둡고 차분한 색깔이지만 저는 무무 씨가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행복이 찾아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면, 사람마다 행복의 얼굴도 다르겠죠. 무무 씨의 행복은 고요하고 충만한 얼굴입니다.       


무무 씨의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조금 더 생각해 볼까요. 행복과 만족이라는 단어는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작은 것에 만족할 때 행복해진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들어왔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이 말이 어딘가 좀 의심스러워요. ‘주어진 것’과 ‘작은 것’ 때문에 그래요. 주어진 것은 나의 의지와 선택이 아니죠. 작은 것은 큰 것에 비해 간단하고 쉽게 채워질 수 있고요. ‘만족’은 행복을 느끼는 데 아주 중요한 단어가 맞지만 때때로 간단한 눈속임처럼 보이기도 해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황이 분명한데도, 만족스럽다는 말로 눈 감아버릴 수도 있거든요. 정신 승리나 자기 합리화라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겠네요.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이런 말을 했대요.      


일하는 동안 곁에 두기 위해 처음으로 작은 꽃을 꺾은 사람은 인생의 기쁨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이다.


저는 이 문장을 작은 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쓰고 싶지 않아요. 대신, 다른 무엇이 아닌 작은 꽃을 좋아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고, 그 꽃을 곁에 두겠다고 마음먹고 행동했기 때문에 기쁨에 다가갈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무무 씨도 그래요. 그저 지금 여기에 만족하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잘 알고 있고, 나다운 선택을 한 거죠. 다른 친구들을 따라 환하게 빛나는 달에 가는 대신 고요하고 충만한 강에서 달을 봅니다.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행복은 완성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죠. 그래서 행복을 찾으면 저절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행복은 다짐이고 결심이며, 방법이고 행동이에요. 행복을 찾는다. '찾는다' 자리에 다른 단어를 써볼까요. 행복이 더 분명해질 거예요. 행복을 '알아보다', 행복을 '쌓아가다', 행복을 '모으다', 행복을 '선택하다'. 행복 뒤에 올 수 있는 단어들을 많이 가지고 싶어요.


저는 여전히 백 살까지 살고 싶지만, 밤마다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셈하는 일은 그만둘래요. 대신 내가 딛고 선 이곳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래서 어떤 다짐을 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생각하겠어요. 내일이 되면 어제의 생각대로 살고 있는 제가 있을 거예요. 그 얼굴이 제가 가진 행복의 표정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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